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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마른 땅을 지나듯 바다를 건넌 사람들 | 김희헌 | 2019-08-18

by 김희헌 posted Aug 18, 2019 Views 30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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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8-18

마른 땅을 지나듯 바다를 건넌 사람들 (5:1-7, 11:29-12:2, 12:49-56)

2019.08.18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501, 329, 국악 215)

 

[마술적 사실주의, Magical Realism]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갈등이 두 달 가까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대립이 경제전쟁으로 비화된 양상입니다. 갈등의 배후에는 과거 식민지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베정권의 반역사적 태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지나가면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단지 과거에 대한 평가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의 삶의 양식을 결정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한일 간의 갈등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 정부를 비판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도리어 아베에게 사죄를 뇌까리는 극우세력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무분별한 책동은 친일의 잔재를 뿌리 뽑지 못한 우리 역사의 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또한 무역 보복에 대응하고 소재-부품 산업의 국산화를 촉진한다면서 규제 완화를 시도하는 기업과 관료들의 태도는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큰 위기를 만날수록 대의에 호소하며 문제를 풀어야 할 텐데, 정부는 정의로운 큰 뜻을 세울 기회로 삼기보다는 무능과 실정을 감추기 위해 애국주의 포퓰리즘에 의존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지난 광복절에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에 대해서 다음날 북은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발맞추어 나아가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그 사이가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는 불길한 조짐처럼 보입니다불신을 쌓고 있는 이 흐름에는 한국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조건 없이 교류하자는 연초 북의 제안에 대해서 유엔재제와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승인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신중함이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민망한 수준입니다. 또한 작년 9월 평양에서 남북정상이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814일에 국방부는 연평균 7% 이상씩 국방비를 늘려가며 내년부터 5년 동안 총 29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분단시대의 관성을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율배반의 시대에 익숙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식민 질서와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지 못한 역사의 업보 탓도 있지만, 지체되고 있는 현실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무능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분단시대를 통제했던 낡은 질서가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고 판단하곤 합니다. 반면에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해방의 꿈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인식이 아닙니다. 분단시대의 관행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주인다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1950년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 해방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운동을 지원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사상 가운데, 남미에서 유행한 비평이론으로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Jacques S. Alexsis, “On the magical realism of the Haitians,” 1956) 그것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민중들이 미래를 구상할 때 자신들의 신화와 전설에 담겨 내려오던 해방 전통과 결부지어 상상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마술적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유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구사상과는 다른 특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 암담한 현실을 뚫고나갈 힘과 지혜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30년 전, ‘벽을 문처럼 여기고분단의 장벽을 뚫고 나간 문익환 목사님의 태도와도 같습니다구약성서 학자였던 문 목사님은 성서의 가장 오래된 해방 전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또는 하비루로 불리던 노예들이 이집트 제국을 탈출함으로써 세운 전통인데, 이 해방전통은 3,500년이 지난 후에도 이어져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바다를 건넌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되었습니다.

바다를 마른 땅처럼 여기고 건너버린 사람들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성서가 전하는 그 믿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실패한 포도농사 / 이사야서 51-7]

2성서의 본문 이사야서 5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정성껏 길렀는데, 좋은 포도가 열리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들포도만 열렸으니 갈아엎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기원전 734년에 벌어진 앗시리아 제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Syro-Ephraimite War)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과 동맹을 맺고 제국을 상대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패망하여 나라를 잃었고, 제국에 굽실거린 남왕국 유다는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으로 전락했습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지 200년가량 지난 상황에 벌어진 이 비극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분단체제의 갈등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부패가 있었고, 북왕국의 정치적인 만용과 남왕국의 사대주의적 근성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은 통합된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서로 패망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실패한 포도농사로 비유하였는데, 그것은 문명을 구성하는 당시의 삶의 방식이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는 이것을 단지 정치적인 힘의 문제로 보지 않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도덕적 정신의 실패로 봤습니다. 여기서 도덕적 정신이란 제1성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 이상인 미슈파트(mishpat, 정의)와 체다카(tsedaqah, 공의)입니다.

성서는 정의와 공의를 이루지 못한 사회는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사회요, 그 사회는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것이 이사야서 5장의 주제입니다. 본문 7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정의롭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요, 공의롭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고 외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 내용이 마치 운율에 맞춘 시처럼 라임을 살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mishpat)를 기대했지만 보이는 것은 살육’(mispach) 뿐이었고, 공의(tsedaqah)를 기대했으나 들리는 건 희생자들의 부르짖음(tseaqah) 뿐이었다고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이런 사회적 비탄을 만들어내는 근본 원인은 힘을 가진 사람들의 그치지 탐욕과 그것을 막지 않는 불의한 제도입니다. 그 모습이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진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의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버젓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세상에서도 법집행은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고용노동부 앞에서 20일이 넘도록 단식투쟁을 하는 현대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애타는 목소리가 무려 15년 동안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2004년에 고용노동부가 스스로 현대기아자동차의 사내하청 9,234개의 공정이 불법파견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판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시정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불법파견을 확인한 법원의 판결도 지난 10년 동안 10건이 넘습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판결을 무시하며 불법상태로 뭉개고 있습니다.

이런 고용노동행정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구성된 문재인 정부의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작년에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사건에 대해서 장관이 직접 나서서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내리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유감표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수준의 정의 밖에 살지 못하는 사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국 실패한 포도농사만 짓게 될 것이라고 성서는 경고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단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소극적인 형태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런 법률적 정의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율법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성서가 요구하는 정의는 보다 적극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제도적 악에 대해 능동적인 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억압의 멍에를 꺾고, 압제당하는 사람을 풀어주며, 부당한 결박을 풀고 자유하게 하라고 성서는 명령합니다 (58:6).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정의는 단지 재판을 공정하게 하는 균형 잡힌 저울로 상징되기보다는, 강물처럼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생동하는 정의로 묘사됩니다. (5:24) 이런 살아있는 정의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인류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행진을 계속해왔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힘의 본능을 이겨낸 믿음 / 히브리서 1129~ 122]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보상과 축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지 못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나그네로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3, 39). 그 삶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히브리서 본문이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지만, 매우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습은 33-34절에 나오는데, 믿음의 이름으로 이룩한 9가지의 성취에 대한 기술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1) 나라를 정복하고, (2) 정의를 실천하고, (3) 약속된 것을 받고, (4) 사자의 입을 막고, (5) 불의 위력을 꺾고, (6) 칼날을 피하며, (7) 약한데서 강해지고, (8)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9)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성취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굳이 믿음의 이름을 달지 않고도 이야기될 수 있는 인간사회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믿음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해서 36-38절에서 그려냅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사람이 당한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이 묘사됩니다. 이들은 비극 속에 파멸하였는지 심지어 이름조차도 갖지 못한 채 어떤 이들’(λλοι, others)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36-38)

이 이야기는 믿음으로 인해 받은 시련과 박해, 죽음과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배경을 기원전 2세기 셀류커스 왕조에 저항하여 독립을 획득한 마카비 혁명 시대로 봅니다. 외경(外經)에 있는 마카베오와 동일한 시기에 읽혀지던 위경(僞經),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Martyrdom and Ascension of Isaiah)에 나오는 이 장면들은 훗날 예수운동을 벌인 신앙공동체가 당하게 될 시련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이 믿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비교할 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단지 경험에 대한 관찰만으로는 모두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믿음이 진행되면서 생겨난 뚜렷한 대비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삶에서 나타난 인간의 성취와 관련된 감각의 변화입니다. 앞에 나오는 9가지 묘사는 막강한 힘에 의존한 인간승리를 그려낸 것이지만, 그것들은 믿음의 이름을 달지 않아도 추구될 법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박해와 죽음은 어떤 저버릴 수 없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에 관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고후 11:23-27)

성서에는 수많은 모양의 믿음이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믿음이 진화해가는 방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힘으로 이룬 가시적 성취에서 보상의 기쁨을 얻는 정신은 점차적으로 희미해진 반면, 힘의 본능을 이겨내고 해방의 길을 걷는 믿음, 즉 십자가의 길로 일컬어진 삶을 추구하는 정신이 분명해진 과정입니다. 그것이 성서적 믿음의 발전과정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묘사를 마친 마지막에 이르러 히브리서 121-2절이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도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성서의 믿음이 자라고 자란 끝에 도달한 곳이 십자가의 자리라는 것은 냉정한 깨우침을 줍니다. 고난과 죽음까지 감내하며 자라난 믿음에는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깨트리지 못하는 하늘의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심장에 대한 경고 / 누가복음 1249-56]

그런데 우리는 누가복음 본문에서 아주 당혹스러운 내용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의 전체 구도에서 보면 이질적입니다. 누가복음은 평화로 초대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에 대해서 사가랴는 그가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노래했고 (1:79),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하는 축복이었습니다. (24:26)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열과 분란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형식논리로 이 말을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싸우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서로 싸우며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면, 집안이 망하기 전에 성경이 먼저 시궁창에 박히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53절에서 멈추지 않고, 56절까지 이어지면서 다른 결론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초점이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있지 않고, 위선적 삶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본문은 평온한 세상에 대한 분란이 아니라, 위선적 세계에 대한 전복을 말합니다.

이 난해한 본문은 그 동안 주로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자유주의적 신앙인들은 오늘 본문을 정의로운 전쟁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혁명가요, 그가 일으키는 혁명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담긴 자의적인 측면이 얼마나 인류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루 다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보수적인 사람들은 오늘 본문이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내용이라고 가르치곤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분돼야 하고, 그런 분리주의적 태도는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담긴 편협함이 얼마나 종교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관념적으로 고립시켰는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방식으로 읽은 것이 좋겠습니다. 56절의 말씀에 방점을 두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kairos)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위선적 삶이란 갈라진 심장분열된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눈에 보이는 율법적 질서에는 충실한 반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열려있지 못하는 삶을 위선적이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바울도 믿음에 대립하는 것을 율법으로 봤습니다. 율법은 힘의 질서로 만들어진 정신의 장벽을 의미하지만, 믿음은 그 장벽을 문처럼 여기며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이 귀하다 해도 그것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삶에 믿음이 세워지기보다는 위선이 자라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가 위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율법을 복음으로 간주하고 믿으면서 적폐를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쌓인 적폐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친미 사대주의요, 둘째는 이웃종교와 다른 문화에 속한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주의요, 셋째는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속물주의입니다. 그것들은 교회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태워 없애야 할 썩은 관념들입니다.

위선적 삶에 대한 본문의 경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제를 안겨줍니다. 본문 50절에서 예수님은 본인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받은 세례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삶이란 십자가를 통해 진리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고통과 비참마저도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벽을 문처럼 여기며 밀어 제치는 믿음이자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바다를 건너가는 믿음입니다.

분단시대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혼란의 시대를 낮은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믿음의 사람은 벽을 문처럼 여기고 밀고 나가며,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 바다를 건너갑니다. 정의와 공의의 삶으로 초대하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율법에 갇히지 않고 평화의 씨앗을 심으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 믿음의 삶을 새롭게 세워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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