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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영광을 위한 고난 | 이성환 | 2018-05-27

by 이성환 posted May 29, 2018 Views 21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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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27

20180527증언

 

영광을 위한 고난

 

이사야 6:1-8, 로마서 8:12-17, 요한복음 3:1-17

 

이성환 목사

 

한반도 정세가 널을 뛰고 있습니다. 지난 주 한 주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입니다. 지난 목요일 밤이죠. 밤잠을 설치신 분들도 꽤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빴던 건 꿈에서까지 미국대통령을 봤다는 것이죠. 미국의 북미정상회담 취소 통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졸이며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한숨 돌리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이 땅 한반도가 참 비극적이고 비루한 운명을 타고난 지역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지리적 여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우리의 운명을 다른 열강에게 맡겨야하는 이 한반도의 독특함, 이것을 감내 하며 살아야하는 이곳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광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한반도에 주어진 운명을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근현대사만이 아니죠. 이 땅에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대륙열강과 해양세력들의 위협 속에서 나라는 유린당해왔고 왕은 굴종을 강요당했으며 무엇보다 수많은 민중들의 삶은 무참히 짓밟혀왔습니다.

 

이제 그런 비극의 역사와의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도 운명이겠죠. 아니,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일 겁니다. 촛불혁명은 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을 너머 한반도의 운명마저 바꿔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리적 역학관계에 놓인 비루한 역사의 연속이었다면 판문점선언 이후 이 나라는 평화와 번영이라는 지금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전인미답의 길, 이 길 앞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죠.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래왔던 것처럼 이 중요한 길목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변수로 존재합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요 며칠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중국, 일본이라는 열강도 변수로 작용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수로 남아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이북입니다.

 

결국 함께 살아야할 존재, 우리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앞으로 수많은 날들을 함께할 나라는 북한밖에는 없습니다. 어제의 전격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남북이 더욱 끈끈해 질수록 미, , , 러의 변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우리 한반도의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30년 전 우리나라를 식민지다, 아니다, 새로운 식민지다, 이렇게 규정했던 사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명했던 36년의 식민지를 지나면서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 그리고 세계 냉전체제의 대리전으로 치러진 전쟁, 강대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서의 경제발전, 그리고 군사적인 종속관계, 뭐 이런 요소들 때문에 우리나라를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라고 불렀던 것이죠. 지나친 측면이 없진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다 틀린 얘기는 또 아닙니다.

 

식민지백성의 설움, 일제 강점기에 느꼈던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다른 것입니다만 지금 우리가 느끼는 열패감 같은 것은 오늘 선지자 이사야가 느낀 감정과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감정들이 우리 신앙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민중들이 느꼈던 소외와 착취, 억압으로 인해 쌓여만 가는 울분, 그리고 그것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민중들이 감당해야 했던 존재의 고달픔, 이것은 결국 울부짖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기도로 하나님께 전해집니다. 해방사건의 시작인 것이죠.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시작은 밑바닥에서 시작합니다. 더 이상 희망을 찾아 볼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시작되고 해방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어느 열강의 손에 들어가느냐 하는 길목에서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왕 마저 죽게 된 것이죠.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이사야는 새로운 시작을 단행합니다. 그동안 궁정 예언자였던 이사야가 웃시야 왕의 사망으로 광야로 나오게 됩니다. 먼저 이사야는 환상을 통해 그간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자각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하나님을 만나면 화를 면치 못하겠구나.’ 이러한 이사야의 죄책고백은 이사야 2913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순간, 이사야 마음에 엄습했던 두려움의 실체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로만 했다는 겁니다. 정작 본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두려움과 존경, 사랑인데 그저 말로 흉내만 내었을 뿐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자 스랍이라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이사야의 입술에 제단에서 타고 있던 숯을 댑니다. 그리고 너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궁정 예언자에서 광야로, 하나님을 대언하는 예언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몰락 가운데 회복과 희망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이 물음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할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책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때의 두려움과 떨림, 그것을 직시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때 죄 사함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으로의 진입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난가운데 주어지는 새로운 삶으로의 진입을 영광과 고난, 상속자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을 합니다. 결국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른 생활, 전혀 다른 신앙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단서는 그 신앙의 주체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 사람은 결코 혼자 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광을 받기위해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그저 홀로 영광을 받기위해 고난의 길을 고독하게 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실체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시다 시피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통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인 것처럼, 예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걷다보면, 이 땅의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고, 함께 비난 받으면, 예수와 함께 그리고 함께 고난을 이겨낸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얻는 게 없다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오늘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증언은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함께라고 하는 공동체적 특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개인의 성공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엘 갔는데 문 앞에 개인사절, 단체 환영이렇게 써있다는 것 아닙니까? 개인과 구원, 나의 영생, 내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계승할 수 있는 길을 요한복음은 거듭남으로 전합니다.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이자 랍비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바리새인이자, 랍비, 선생이죠. 선생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예수가 펼친 선포와 사건에 매료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분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기적사건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뜬금없는 다시 태어남에 대한 주문을 소화할 능력은 없었나 봅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그의 위치가 의심스러워집니다. 본문에 니고데모를 설명할 때 바리새파 사람이자, 산헤드린 성원이자, 랍비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지식인이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주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구약성서를 비롯한 유대교에는 없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니고데모로 상징되는 유대교, 회당종교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요한복음의 고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거듭난다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거와의 단절 아닙니까? 부분 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적인 변화, 사람 본성이 새롭게 재정립되는 것이 다시 난다는 것의 속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엄중하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거듭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우리 가운데 과연 하나님 나라 문턱에라도 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걱정도 듭니다.

 

믿음을 통해 신앙을 통해 내 삶이 전적으로 변혁되는 사건, 그것을 좇아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주저앉게 되는 것일까요? 몇 주 전 이병일 목사님을 통해 들었던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는 홍근수 목사님의 소회를 오늘 이 요한복음의 거듭남의 주제로 끌고 와 봤습니다. 서글퍼지죠.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신 목사님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게 다 신앙에 대한 부정의 의미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오랜 목회와 신앙생활 끝에 얻게 되는 깨달음이자 자성을 촉구하는 일성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이전과는 결별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데 지금까지의 신앙과 믿음은 다 무엇인가? 믿으나 마나인가? 아니, 예수 왜 믿어? 여러분, 예수 왜 믿습니까? 이렇게 비관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이 농어촌선교주일이기도해서 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 희망을 찾아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씨를 뿌립니다. 돌짝밭에도 뿌리고 가시덤불에도 뿌리고 새들이 쪼아 먹어도 끊임없이 씨를 뿌립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그 씨앗이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과거로부터의 단절,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 중에 있더라도 그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으로 믿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경주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 된 죄책고백과 예수 그리스도가 걸었던 고난에의 동참, 그리고 전적으로 달라진 삶을 살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 이것이 오늘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의 길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영광을 누리는 교우 여러분들 되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달려갈 길 달려가다 넘어지거든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의 임재를 바라십시오.

그리고 주지 앉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영광을 향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계승자가 되는 그날까지

과거의 나와 끊임없이 결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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