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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변혁의 원동력 | 이성환 | 2019-10-27

by 이성환 posted Nov 01, 2019 Views 18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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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0-27

변혁의 원동력(욜 2:23-32, 딤후 4:6-8,16-18, 눅 18:9-14)

2019.10.27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아직은 시월이지만 깊어져가는 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이런 날씨를 아랑곳 않고 서초동에서 여의도로 옮겨간 촛불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국회 앞으로 달려가신 분들이 꽤 계신 것 같습니다. 검찰청에서 국회로 검찰개혁의 목소리가 옮겨 가는 것을 보면 공수처 설치나 검경수사권 조정과 같은 구조를 만드는 것이 검찰개혁의 척도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반면,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목소리도 큰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마 내년 총선까지 소위 혐오유발 정국을 유지하는 게 그들의 속셈이겠지만 개혁, 혹은 변혁의 과정에는 반드시 반동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민의가,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 시기를 지혜롭게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모아 잘 견뎌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개혁 기념주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에는 교회개혁당시 이론적 근거로 삼았을 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만인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주장한 루터의 만인사제설의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디모데후서에 언급되는 의의 면류관은 바울의 의인론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아다시피 의인론 또한 교회개혁 당시 주창되던 신조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예수의 비유는 정의는 율법이 아닌 죄의 고백이란 성찰을 통해 세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들을 ‘변화와 변혁은 어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관점을 갖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만백성에게 임하는 야훼의 날

 

오늘 1성서 본문인 요엘2장은 심판과 구원이 있을 야훼의 날을 설명합니다.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을비와 봄비를 흡족히 내려주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비’라는 뜻의 מוֹרֶ֥ה(모레)는 늦은 비, 가을비, 농부의 비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교사’라는 다른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23절 중반에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는 말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의의교사를 보내셨다.’로도 해석이 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심판의 날, 야훼의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처럼 불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비처럼 내린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살펴보면 야훼의 날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28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영을 내려주시는데 그 영이 내리는데 어떻게 내리느냐.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다가 아닙니다. “아들과 딸, 노인과 청년, 그리고 종들에게 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왕이나 예언자들과 같은 특권층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요엘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영은 만인에게 열려있다는 메시지는 성서의 대중화, 만인사제설과 같은 교회개혁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개혁의 슬로건, ‘의인론’의 연원

 

오늘 디모데후서 본문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와도 견디어 낼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에서 의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이 전하는 ‘의’라는 것은 사도바울의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의인론 또는 칭의론이 말하는 의입니다. 옳음, 의로움, 정의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신약성서 원문으로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정의라는 뜻이 담긴 의인론이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존재론적인 이론이 됐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이 의인론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많은 개신교인들에게 마틴 루터의 의인론이란 가톨릭교회와 싸우는데 뒷받침이 되는 이론이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 김창락 교수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교회개혁 직후인 1547년 트리엔트 가톨릭 종교회의에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결의함으로써 의인론을 공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의인론은 더 이상 구교와 신교를 가르는 시금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달리 말하면 루터가 말한 의인론, ‘사람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의인이 된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보편적인 신앙관을 종교개혁이후 가톨릭이 받아들임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념은 신교와 구교 공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인론, 믿음, 이런 것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할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의인론이 처음 제기되던 때와 장소입니다. 사도바울의 ‘의인론’의 연원을 찾아보면, 소위 안디옥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때는 십자가 사건이후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안팎에서 벌이던 예수 운동이 확장되던 시기였고 장소는 말씀드렸다시피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전통을 강요하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나중에 바울에 의해 그러한 교조적인 전통은 없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그러한 유대교 율법의 아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한 관행이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 내에도 율법과 예수의 복음이 뒤섞여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안디옥교회에 방문한 베드로 일행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당연히 안디옥 교회에는 이방 기독교인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일행이 그 자리에 가게 된 것이죠.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를 뜹니다. 이게 안디옥 사건의 전말입니다. 간단하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 초기 교회의 모순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즉,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들 간의 갈등이 그것이고 그 사건이 유대인 비유대인간의 갈등으로 비화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건의 근저에는 율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율법에 의하면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겸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그러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베드로가 함께 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밥 먹다가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운 나머지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안하니 만 못한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행복했던 안디옥교회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분개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울의 의인론의 연원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설파되었습니다. 즉, 안디옥 사건은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주인이나 모두에게 전해진다는 자명한 진실이 왜곡될 때, 그래서 차별을 낳고, 혐오를 낳게 될 때, ‘그게 아니다, 정의는 법률이나 이론이나, 사상이나 편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믿음으로, 제대로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선다.’고 말하는 것이 바울의 의인론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겠습니다.

 

마틴루터의 교회개혁의 기치였던 의인론, 그 의인론이 처음 이야기되던 자리는 예수의 복음이 율법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바울의 의인론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의인론은 그 자체로서의 이론, 교리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이 부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의인론은 율법의 관행으로부터 예수의 복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쓰인 무기인 것입니다. 

 

브레데, 슈바이쳐, 스텐달과 같은 소수의 신학자들은 바울의 의인론을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사상투쟁과 같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생산해낸 투쟁교설로 해석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당시 약자였던 이방 기독교인들 편에서 그들을 옹호했고 복음의 보편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불의한 상황, 평화와 생명, 정의의 가치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자리를 변화의 출발점, 변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것, 이게 중요한 것이지 의인론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죠. 

 

디모데후서 본문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이나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러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몫인 것입니다. 바울의 의가 따로 있고 예수의 의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 그것을 실천하는 길에 구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의는 삶과 실천의 영역이지 의식이나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의롭다 평가하는 것 또한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혁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수는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는 것, 그리고 그 의로 남들을 비난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전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의 공로의식, 윤리의식보다 죄를 지은 세리의 자기성찰이 더 옳다는 이야기죠. 

 

누가복음 18장 9절에 나오는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서 ‘의’도 정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를 비롯한 제2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의’ 즉,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등에 나오는 의는 거의 대부분 ‘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의, 종교적인 의, 내면의 의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얘기했듯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행위나 사유가 정의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정의를 행하는 것과 남의 의를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내 의로움을 가지고 남의 불의를 들춰내는 일이 오히려 불의한 일이라고 전합니다. 철저한 생활로 법률을 지키는 의로움의 상징인 바리새인, 그리고 구조적으로, 때론 의도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세리, 이 전형적인 캐릭터를 놓고 예수는 의로움이 역전되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해학과 도발적인 비유를 통해 예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수가 비유를 통해 고발하는 바리새인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을 통해 정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자기 확신과 교만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 당시 실제로 이렇게 기도했던 바리새인이 과연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비유이기도 하지만 예수는 바리새인과 세리라는 캐릭터의 극명한 대비를 위해 과장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의 약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이 녹아 있다고 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세리는 약자가 맞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 둘 중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다.” 여기서 예수의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위치가 저 바리새인보다 이 세리에게 더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세리의 자세, 낮고 겸손한 자세 때문에 그가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의를 세운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세리의 마음가짐에 대입해보면, 그저 자기의 자리를 낮추는 자세, 겸손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성찰하는 그 자리, 모순과 불의가 도사리는 내면의 한구석,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믿음, 그것이 불의한 세리를 정의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성찰’이라는 말자체가 스스로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어서 그것이 남에게 하는 가르침이 되는 순간, 그것의 효과는 반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서 말씀에 기대어 이렇게 ‘자기성찰’을 전하고 있습니다. 

 

깊은 자기성찰이 전제될 때 자신의 잘못을 포함한 불의한 상황은 변화의 동력이 됩니다. 당면하게 되는 그 모순과 죄가 크면 클수록 성찰을 통한 변혁의 힘 또한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불의한 상황이 생겼다고 합시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그 때, 바울이 약자인 이방 기독교인들의 편에 서서 예수 복음의 진실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의 약자의 편에서 서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변혁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혁의 원동력,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땅에 억압받는 민중들과 함께 했던 예수의 당파성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원점이고 그 복음을 제대로 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이 됩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무엇이 정의인지 분별하기 힘들 때, 모순과 부정의가 뒤섞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주저하게 될 때, 갈릴리 예수복음의 원자리를 다시금 우리마음에 되새기며 함께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훼손되는 자리, 불의와 모순이 판치는 그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시작 하는 자리이고

변혁의 원동력이 샘솟아 나오는 자리임을 믿고 우리 함께 복음의 행진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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