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하나님 (학 1:15b-2:9, 살후 2:1-5,13-17, 눅 20:27-38)
2019.11.10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전태일 추모주일, 장로 임직식
오늘은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자 전태일 추모주일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날입니다. 전태일 추모주일에 임직식을 하게 되니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예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태일은 노동운동의 효시가 된 열사로 알려졌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치열한 기독교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억압적인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 자신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자매와 형제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그 사랑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자 했던 신앙인의 꿈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과 헌신의 마음이 오늘 임직을 하는 분들과 우리 신앙공동체에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50여 년간 교회의 전통을 지어온 명동을 떠나서 새로운 터전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장소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선교과제 역시 새롭게 설정하며 보다 창조적인 변화를 추구할 때입니다.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지혜를 함께 발휘하고, 서로 도우면서 힘을 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말씀이 우리 공동체와 임직자들을 위해서 주신 하늘의 뜻이 되기를 바라며, 먼저 예언자 학개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재건 공동체에게 주신 하늘 말씀, 학개 15b-2:9]
학개는 기원전 6세기 말,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한 유대공동체에서 3개월가량 짧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당시는 유대민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강토를 재건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면서도 ‘학개’가 자신의 이름에 ‘축제’와 ‘즐거움’이라는 뜻을 담았다는 사실은 당당한 예언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의 예언이 가진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포로귀환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가장 커다란 지정학적 변화는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Cyrus)가 바벨론 제국을 쓰러뜨리고, 포로들을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포용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유대인 포로들도 네 차례에 걸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귀환은 고레스가 바빌론에게 승리를 거둔 해인 기원전 538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단을 설치하고, 포로기간 동안에 끊겼던 제사의식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민족공동체의 정신적인 중심이 될 성전을 재건하는 과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민중들의 뜻을 묶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는 자기 힘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동체 재건 작업의 주도권은 황제의 정책에 따라 귀환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과 자기 땅에서 고생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과의 갈등요인이 됩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행정구역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인들’로 불렸는데, 그들도 성전재건 작업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귀환한 사람들이 그들을 불순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에서 배제되고, 결국 격렬한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자, 사마리아인들은 페르시아 정부에 상소를 올려서, 성전재건 활동을 ‘반란음모’라고 고발합니다. 결국 모든 작업이 중단된 채, 2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후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는데, 황제 다리우스가 이집트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던 유대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이주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520년에 포로들의 2차 귀환이 있었고, 예언자 학개는 이 시대에 활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당시 상황도 여전히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결속력은 취약했습니다. 이때 학개는 ‘성전을 재건하자’고 외칩니다. 그는 무슨 의도로 성전재건을 외쳤을까요?
성서의 예언자들은 보통 성전 중심의 활동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심판을 선언할 때에는 상징적으로 ‘성전의 붕괴’를 외쳤습니다. (아모스 9장) 그런데 우리는 학개를 통해서 전혀 다른 방향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속한 시대가 요청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개서 1장을 보면,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먹고살기에 바빴고, 자기 집을 짓고, 그것을 더 키우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1:4,9) 지도자들의 사대주의적인 행태는 민중들을 신물 나게 했으며, 바빌론의 포로기는 끝났다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남아있는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지배자가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식민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학개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이 남아 있느냐? 그 영광이 지금 너희에게는 어떻게 보이느냐? 그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이지 않느냐?” (3절 재번역)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물음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혹시 하찮은 것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학개는 여기서 목소리를 바꿔서 시름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제, 힘을 내어라! 총독 스룹바벨아 힘을 내어라, 대제사장 여호수야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마지막에 나온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모든 땅의 백성들’(kal am ha.a.rez)로 번역하는 게 좋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땅바닥에 붙어서 절망적으로 살아온 모든 ‘땅의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이제는 보다 소중한 것을 향해서 일어서야 하지 않겠느냐!
결국 학개가 했던 이 ‘용기에 대한 호소’는 사람들을 움직였고, 성전은 4년여 걸친 작업 끝에 완성되어 봉헌됩니다. 재건된 이 성전은 민족 공동체의 정신적 구심이 되었고, 그 후 500년 동안 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전도서 기자의 말대로, 성전이란 지을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유폐시키고, 민중들을 약탈하는 통치 기관이 된다면, 그것은 파괴돼야 할 우상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을 비판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요 2:19)
학개가 성전을 지으려는 이유는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정신과도 이어진 것입니다. 학개가 성전을 짓고자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 곳’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이전 계획을 가진 우리들에게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교회가 죽은 신을 섬기는 종교의 무덤이 된다면 아무리 웅장하다 하여도 의미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으로 신음하는 시대가 안식할 수 있는 평화의 거처로서 지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쳐서라도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 곳’을 짓고자 했던 예언자 학개의 꿈이 우리들의 꿈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말하고자 하는 것, 누가복음 20장 27-38절]
누가복음의 본문은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논쟁을 통해서 ‘살아있는 종교’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1세기 유대지역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믿음을 따라,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 지핀 논쟁은 ‘부활의 때’에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기만적인 것으로서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조상들이 지켜온 ‘형사취수제도’ (신 25:5-10) 즉,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은 형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진리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형제들이 차례차례 모두 죽었을 때, ‘일곱 형제 모두와 살았던 여인은 부활한 후에 누구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부활’에 관한 물음을 가장한 올가미입니다. 전통을 덫처럼 사용하고 있을 뿐, 부활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에서 ‘부활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의 사례로서, 출애굽기 3장 6절,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생생한 믿음의 삶을 살아간 ‘족장들의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예수님에게 부활은 죽기 이전의 삶에 대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요, 또 죽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 신앙인들이 알고자 하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바울이 준 대답을 보겠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삶, 살후 2:1-5, 13-17]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본문에는 바울의 기도와 권면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갈등과 분열이었던 것 같습니다. (2절)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장 개연성이 있는 대답은, 황제가 지배하는 그 체제 자체를 ‘주의 날’(hemera tou Kyriou)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면, 성도들을 지켜왔던 믿음인 ‘하나님나라(basileia)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1:5) 삶이란 의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준 권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선택하셨고(εἵλατο, choose), 복음을 통해 여러분을 부르신다는(καλέω, call)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13-14) 이것은 신앙공동체(ecclesia)의 삶의 특징을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의 차원에서 찾는 것입니다.
둘째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의 전통’을 지켜갈 수 있도록,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께서 마음을 격려’해주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서 굳세게 해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인의 본질적 특징을 ‘부르심을 입은 삶’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임직을 하는 분들과 우리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교우들에게 주었던 기도로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오늘은 고통당하는 자매와 형제를 위해서 자신을 모두 내어준 전태일 님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자 했던 그의 꿈이 오늘 임직한 분들과 우리 모두의 맘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산자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있는 믿음의 전통을 세워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