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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농부의 꿈 | 이세우 | 2019-11-24

by 이성환 posted Nov 24, 2019 Views 21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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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1-24

농부의 꿈(렘23: 1-6, 시46, 골1: 11-20, 눅 23: 33-43)

2019.11.24 창조절 열세 번째 주일, 들녘-향린 강단교류

 

이세우 목사

 

안녕하십니까? 자매교회인 들녘교회 이세우목사 인사드립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향린강단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농촌은 지금 김장철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농사입니다. 저희 동네에서 김장은 그나마 남아있는 농촌의 풍경이었는데요. 농촌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 공동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할 수 없기에 이웃들과 더불어 해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올해 김장풍경은 예년만 못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양이 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김장을 하지 않는 집도 많았습니다. 자녀들, 친척들 것까지 해주다 보니 그 양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시끌법적 했는데 지금은 그런 집마저도 이 바쁜 김장철에 정적이 흐르고 있습니다. 거꾸로 자식 집에 올라가서 명절을 보내듯이 이제 김장도 도시의 자녀들이 해서 고향집에 있는 부모님에게 가져다주고 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농촌의 김장풍경, 그마저도 사라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김장김치에 들깨가루 잔뜩 뿌리고 묻혀서 먹는 전라도김장김치 먹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앞으로는 맛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잔뜩 우울해 집니다.

 

올해로 자매결연 2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양교회가 농촌을 살리고 지켜보겠다고 노력해 왔지만 농촌의 지금 모습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쪽을 담당했던 저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무익한 종이었다고 하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늘 향린교회는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꾸준히 저희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전량 소비해 주고 계시고 기도와 사랑을 아낌없이 전해 주고 계십니다. 올해도 그 뜨거운 여름에 많은 일꾼들이 농활을 내려와 비지땀을 흘려주셨습니다.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무려 24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결 같이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농촌을 살리자는 운동을 넘어 성서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인 생명의 밥상운동이었습니다. 죽임의 문화인 더 많은 이윤과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거부하고 예수님이 전해 주신 나눔과 섬김, 희생의 남의 밥이 되어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만 놓고 보면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고, 실패한 자의 삶이었습니다. 지금 농촌은 골든타임도 지나 호흡기를 떼면 바로 사라지는 회생불가의 상태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빈집은 더욱 늘어났고, 그나마 초저녁 불이 켜져 있는 집도 대부분 홀로 사시는 집입니다. 오늘 읽으신 누가복음의 본문에서처럼 오늘날의 농촌의 모습을 통해 결국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됩니다.  

 

 

❮농민기본소득 실현!❯

 

올해는 특히 농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문재인정부에게 촛불정신을 계승하고 대선공약을 지키라고 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했었는데 다행히 받아 들여 면담도 하고 대통령직속 농어촌발전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하게 했습니다. 또한 국민의 먹거리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책임지도록 한 국가푸드플랜을 세우도록 촉구했는데 이 역시도 받아들여 시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는 척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GMO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속한 단체가 주가 되어서 작년 4월, 약 22만명의 국민들이 GMO완전표시제 국민청원에 참여한 이후, 민관 거버넌스  차원의 정부와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GMO표시제도 개선 사회적 협의체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의 무능력과 농간으로 협의체는 제대로 된 회의 한번 못 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는 회피하고 외면하면서 방관만 했습니다. 저희들은 더 이상 정부의 들러리만 설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협의체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GMO완전 표시제는 생태 다양성, 건강한 식탁,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국민들의 최소한의 요구인데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그리고 농업이 지속가능하려면 농민에게 월급처럼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별도로 농민들이 나서 농민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운동을 현재 전개하고 있습니다. 국민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다음 달에 이를 위한 전국운동본부 발족식을 가질 계획입니다. 

 

오늘 설교는 바로 이 농민들의 간절한 요구사항인 농민기본소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국가의 기간산업인 농업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논 팔고 소 팔아, 죽어라 농사지어 자식을 공부시켰고 그 자식들이 지금의 산업화를 이끌어 왔습니다. 산업화의 일꾼을 키우는데 농촌의 자본이 투여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생산비에 훨씬 못 미치는 농산물 가격, 농사지면 질수록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농민 수탈 정책을 내내 유지해 왔습니다. 그것을 소위 ‘저곡가 정책’이라 불렀는데요. 이는 노동자의 인건비를 아주 낮게 쳐주는데 기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저곡가 정책은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여주는 국가 물가관리 정책의 최고수단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결국 나라경제를 뒷받침하면서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끼도록 하고 우리 국민을 지금까지 배곯지 않고 먹여 살려온 것은 다른 그 어느 것이 아니라 바로 농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농업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농업에 "수많은 정책을 다 투여하고 지원을 했지만 다 실패하고 망했으니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이제는 농업을 포기하자”라고 인식들을 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게을러서 가난하다.” “농사는 안 짓고 노름만 한다.” “농민들이 무식해서 머리를 쓸 줄 모른다.” “진작 농촌을 떠나서 도시에서 살았어야 한다.”는 둥 철없는 소리들을 퉁퉁 해대고들 있습니다. 이런 소리들을 들으면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사실은 “다른 산업에 다 퍼 줄대로 퍼주고 농업은 그에 따라 희생양”이 되었을 뿐인데, 좀 안다고 하는 전문가라 하는 인간들조차도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서 농업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으니 포기하자는 헛소리들만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농민들이 불쌍하니 지원은 하자고 합니다. 어떻게요? 그들의 방식은 “죽을 때까지 구석으로 몰아넣고, 죽지 않도록 숨구멍 하나 뚫어놓자”는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원금 나오면 그 돈이 농민에게 전달이 됩니까?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지금까지 농촌에 해당된 수많은 지원책들은 농민에게 직접 지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 설 때마다 농촌을 살리고 지키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예산을 투여하는 것으로 말들을 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빠른 산업화가 대기업에 온갖 혜택을 주며 재벌들만 키워낸 것처럼 농촌에서는 규모화 시설화라는 이름으로 그 많은 지원들은 경쟁과 효율, 그리고 성장만을 쫓아 한쪽으로 쏠리면서 농촌도 대농인 기업농과 소농인 빈곤농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농촌에서도 빈부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집니다. 국가가 나서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농업과 농민의 희생은 멈춰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가 되는 현상이 발생되고 맙니다. 지원책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것은 농민에게, 또는 농가에게 직접 지불되었던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기반시절 확충 등 자재와 시설 등을 지원해 왔던 것으로 업자들만 배불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 결과 지금 농촌은 어떻습니까? 농업은 농사를 짓겠다는 후계농들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고 있고 농촌은 과소화를 넘어 소멸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국민의 먹거리는 수입농산물의 과잉공급으로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지속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농업과 농촌, 그리고 국민 먹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자 극적인 반전을 이룰 마지막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민사회단체들과 먹거리 진영은 농민기본소득을 외치게 되었습니다.‘농민기본소득’은 무너져가는 농촌의 농민들에게, 시시각각 먹거리 안전을 위협받는 국민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농민기본소득은 현재의 농업∙농촌문제를 해결할 비상 처방입니다. 

 

왜 농민들에게 농민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나요? 50년 이상 도시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온 농민과 농촌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식량주권의 보루인 농업과 농촌이 소멸될 위기라는 절박함이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전 국토의 인구 구성이 수도권과 경부축에 70%가 몰려 있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서 농촌에 사람이 유입되고 지역공동체가 복원될 것입니다. 안정적인 소득지원은 규모화 보다는 가족농중심의 다기능농업으로, 화학농업에서 자연친화적인 농업으로 전환을 통해 국민 먹거리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여낼 것입니다.

 

 

❮왜 농민기본소득을 계속 말씀드리는 걸까요?❯

 

조금만 더 농민기본소득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너무 중요하다고 여겨져서 그렇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농어업·농어촌의 공익적 기능에 대한 사회적 보상을 위한 농민수당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농어민 스스로 공익적 기여에 대한 권리를 찾아가는 농민 주권선언이자 ‘사람중심 농정’으로 대 전환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민수당’은 직접 영농에 종사하는 농민당사자가 아닌 가구(경영체)를 대상으로 하고 선언적 부조(월5만원)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은 농민수당 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생산의 당사자인 농민 개개인에게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을 넘어 기본적인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최소의 비용을 직접 지원함으로서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사회안전망을 새롭게 구축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당장은 직접 영농에 종사하는 모든 농민에게 지급하지만 장차 인구 과소화, 소멸 지역의 농촌 주민들 모두에게 지급하는 농촌주민 기본소득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종국에는 전 국민기본소득을 추동하는 견인차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농민수당 또는 농민기본소득의 요구는 이것을 농민에게 직접 지불하여 농민에게 지원되는 지원금이 다른 누군가의 배를 불려주는데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듯이 농민의 최저생산비를 보장하는 것 또한 정부의 몫입니다. 정부가 농민의 최저생산비를 보장하는 것이 농민 인권 보호입니다. 노동자의 최저임금과 농민의 최저생산비가 의미하는 것이 같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것이 마치 농민들에게 퍼주기식 정책처럼 말하는 가벼움은 사라져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농민들은 그 돈 받아 부자 되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다. 띵까띵까 놀겠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농민은 평생 베풀어 왔음에도 농민수당을 전액 "지역화폐"로 받아 지역에 되돌려 지역순환경제에 일조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바다와 같이 더불어 살려는 농민들의 마음, 농부의 꿈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편 46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오늘 시편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습이 나옵니다. 자신들을 못살게 구는 침략국 강대국이 물러갔으니 얼마나 기뻐겠습니까! 우리 농민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도 이런 해방승리의 날이 하루 빨리 돌아와 마음껏 목 놓아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정부는 지난 달 25일 세계무역기구(WTO)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트럼프가 압력을 넣자 꼼짝없이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 결으로 농가들이 입을 피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농업 기반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을 눈뜨고 당해야만 하는지 우리의 경제구조가 너무도 허술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선진국을 입에 올리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농민이 한마디 합니다. “차라리 완전 무너져라. 다 깡그리 사라지게 하라.” 뭔 소리야? 했더니 “그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희망을 완전히 저버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교회에 다니는 지는 확인할 수 없었어도 나보다 믿음이 더 있어 보였습니다. 

 

 

❮에레미야23: 1-6/정의와 인권❯

 

이 본문 역시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유도 모른 채 포로로 끌려가 갖은 고생들을 하였으니 그 원통함이 얼마나 커겠습니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천재지변이 또는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죄라면 열심히 산 것밖에는 없는데 고통은 언제나 자신들의 몫이었습니다.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에게 정의와 인권은 사치일 뿐입니다. 어디다 하소연하고 보상을 청구할 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들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귀양살이로 파괴적인 삶을 살도록 한 잘못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성서는 운명이나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주요 책임이 그 왕들의 정책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농업에 대한 잘못된 정책,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책임을 진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책, 악순환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 오셔 농촌과 이 사회에 정의와 인권이 회복되기를 기다립니다.  

 

 

❮골로새서 1: 11 -20/농의 철학과 가치의 회복❯

 

바울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겼던 종교,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전해 듣고 옥중에서 편지를 씁니다. 꼭 종교적인,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만 세상의 뒤틀린 모습과 인간의 잘못된 삶의 형태를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식과 기본선에서 바라봐도 그것은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세상이냐! 이게 인간이냐! 이게 교회냐! 하는 탄식에서 그의 울분을 적어내고 있습니다. 거짓과 참이 뒤바뀌고, 불의가 정의를 이겨먹는 세상구조로 억울한 희생자들이 거리에 넘쳐납니다. 그 어디에서도 희망과 대안은 찾을 길 없고, 불안과 공포만이 가득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희망이요, 대안이니 조금 더 신발 끈을 조여 메고 참고 견뎌 주기를 부탁합니다.(골로새서 1: 11) 

 

우리는 오늘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을 핵심구절로 잡고 함께 낭독했습니다. 골로새서의 중심말씀뿐만이 아니라 성서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구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 발표된 지소미아가 사건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힘의 관계, 참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은 이익추구에만 전념합니다. 교회는 녹색신앙이 아닌 적색신앙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없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의 미래마저도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만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지구가 그렇듯이 농촌도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과 땅, 농촌은 하나님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골로새서1:16) 농부는 농업의 가치를 되찾는 생명의 세상을 꿈꿉니다. 다함께 침묵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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