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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요셉의 고민 | 김희헌 | 2019-12-22

by 김희헌 posted Dec 22, 2019 Views 17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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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12-22

요셉의 고민 (7:10-16, 1:1-7, 1:18-25)

2019.12.22 대림절 넷째 주일

 

[진보적 삶이란 무엇인가?]

연말을 맞으면서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이 분주합니다. 그런데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성탄을 앞두고 어떻게 아기예수를 맞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면서 자기 삶을 조정하곤 합니다. 현재 살아가는 내 삶의 모습은 만족스러운가, 이웃과 형제자매에게는 너그럽게 대했는가, 사회적 아픔에 공감하고 응답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들었는가?

향린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대체로 진보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삶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서양의 철학사를 보면, 진보적 낙관주의가 넘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19세기의 전반기로서, 사상가를 예로 들자면, 헤겔에서 마르크스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역사가 끊임없이 발전해가며 마침내 해방과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던 기독교 사상가들 역시,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진보적 낙관주의는 한 세기도 채 넘기지 못하고 잦아들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진보에는 늘 한계가 있고, 과학적 진보정신에 들뜬 서구문명이 만들어가는 세계의 실상은 식민주의 약탈과 제국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즈음 서구의 정신은 실존주의라고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비관적 의식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하여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유한한 역사에 하나님 나라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성찰의 시대를 유럽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밖에 없는 식민지 조선 땅에서 살아갔던 한 사람은 이렇게 외칩니다.

진보주의의 용감한 현대인이여, 지금쯤은 생각을 돌이켜보아도 좋을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이때까지 돌진해 온 것이 반대 방향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은가. 진보, 너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어치운 몰록이냐. 인간은 죽기 위하여, 짐승 중에 어느 짐승보다 더 참혹히 죽기 위하여 진보하느냐, 문명하느냐? 진보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이 차마 볼 수 없는 역사의 비극을 무위로 끝나지 않게 하는 일이 있어야 진보다. (함석헌, <너 자신을 혁명하라>, 104-5)

여기에는 그저 앞을 향한 돌진을 진보라고 생각했던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유린하고, 피폐해진 삶에 대한 비판입니다. 진정한 삶의 진보를 원한다면, 이런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되도록 하는 삶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안산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 드린 성탄절 예배>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밤 도처에서 모인 수백 명 가운데, 우리 교우들도 몇 분 참석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 예배의 주제는 진실을 폭로하는 빛이었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지 5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밝혀진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배에서 맡겨진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저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왜 빛이 없는 어둠을 느꼈을까 하고 말입니다.

대참사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사람들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죽어버렸나?’ 하고 외쳤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옛 교리를 반복하는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돌이켜 보면, 우리가 세상이 어둡다고 느꼈던 것은, 가라앉는 배를 들어 올릴 전지전능한 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의 어두움에 대한 느낌은 인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짓을 일삼는 정부, 오열하는 유족들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소수의 광란, 그리고 삶에 지친 대다수의 절대적 침묵 사이에서, 진실을 증언할 양심과 용기를 가진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둠 사이로 작은 빛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났죠.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때로는 검푸른 침묵을, 때로는 보랏빛 절규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로써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우리 사회는 빛을 보기 시작했고, 그런 작은 촛불이 모여서 횃불이 되기에 이르자, 마침내 정권을 교체하는 평화 혁명까지 이뤄냈습니다.

3년이 지난 오늘에는 그 기운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세상이 어둡다, 삶이 참혹하다외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 시대의 진보는 안녕한가요? 신앙공동체로 모인 우리는 어떻게, 또 다른 회의가 이는 이 시대를 헤치고 살아날 수 있을까요?

죽어갈 옛 종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짐승을 잡아다 불에 태우지만, 나아갈 새 종교는 새 사람을 지어서 역사의 제단에 바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항상 새 사람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당신의 부르심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 깨달은 뜻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복종시키고 삶의 관계를 새롭게 지어가는 사람입니다.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높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아기 예수를 모실 수 있는 낮은 자리를 짓기를 바랍니다. 참혹한 삶이 반복되는 역사의 허무를 달랠 수 있는 것, 새로운 삶을 지어나갈 사람이 등장하는 일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는 삶의 처지 다르고, 삶의 선택이 달랐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유다의 왕 아하스이고, 다른 한 명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한 사람은 국가 최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필부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태도를 가졌습니다. 한 사람은 두려움에 매여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회피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존재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이 두 사람의 삶에서 성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하스의 실패 / 이사야서 710-16]

먼저 본문 이사야서 714절은 성탄절의 의미를 말해주는 제1성서의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아이의 탄생을 통하여 임마누엘의 징조를 전하는 이 예언의 배경에는 다윗 왕조의 불안과 공포가 있습니다. 당시에 남왕국 유다는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침공하는 인접 국가들로 인해 위기상태에 놓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7:1) 위협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유다를 통치하던 아하스 왕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너는 왜 나에게 구원의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지 않느냐?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면 들어줄 텐데, 왜 부탁하지 않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하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12) 이 말은 겉으로는 믿음의 언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기만과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서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었지만 (2), 정작 하늘의 징조를 구해야 할 순간에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하면서 발을 뺀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된 좌절에서 빚어진 왜곡된 응답이었습니다.

이러한 아하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며 예언자 이사야가 비판합니다. “다윗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13) 이사야는 왕 아하스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 말의 실상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위선적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하스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답습하고 있는 삶의 실패를 보게 됩니다. 아하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두려움에 지친 그의 영혼은 자기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할 수 없었고,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를 뛰어넘는 모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이 그의 맘을 흩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참한 아하스에게도 임마누엘의 예언은 주어집니다. 그의 실패와 한계에도 하늘의 은총은 부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 후에도 위로와 치유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7백여 년이 흐른 후에 이 말씀은 요셉이라는 한 청년의 삶을 뒤흔들며 다가옵니다.

 

[요셉의 고민 / 마태복음 118-25]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가 들려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도 마리아도 아닌, 요셉입니다. 마태가 들려준 메시아 탄생의 비화는 시작부터 위태롭습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오늘날보다 훨씬 더 완고한 관습을 가진 이천 년 전에, 혼인을 하기 전에 임신을 한 마리아와 그녀의 아이의 목숨은 위태로웠습니다. 남편이 될 요셉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

요셉은 조용한 파혼을 통해서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로 인해 더 큰 고민을 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태중의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임마누엘의 사건이라고 하는 엄청난 얘기를 들려줍니다.

아마 요셉은 큰 고민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도무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많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선택하려고 했던 조용한 파혼은 당시의 관습에 비춰보면 너그러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을 듣고 난 후에 요셉은, 혼자서 발을 뺀다고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훨씬 거대한 사건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압니다. 함께 읽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잠에서 깬 요셉은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태어난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대목은, ‘파혼을 고민하던 요셉이 어떻게 해서 천사의 말을 따라 행동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말은 모두 요셉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한 후, 요셉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고민의 성격과 내용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고민이 사회적 관습과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서 진행되었다면, 천사의 말을 듣고 난 후로는 하늘에서 밀려오는 요청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은 생각할수록 무거운 목소리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호세아와 같은 뜻을 가진 어근에서 비롯된 이름이요, 이스라엘이 길러낸 거룩한 해방과 예언의 전통이 흐르는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삶 속으로 밀려드는 이 하늘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깨닫고 곧장 순종합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천사의 말을 따릅니다. 여기서 깨어 일어남을 뜻하는 단어 에게이로’(ἐγείρω)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뜻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요셉은 과거의 삶을 털고 일어나, 해방과 예언의 전통을 향해 맘을 활짝 연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게 되었을까요?

한 신학자는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고통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삶에서 작용하는 힘 가운데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입니다. 셋째는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때입니다. (John A. Sanford, <The Man Who Wrestled with God>, 21)

요셉은 자신의 삶에 자기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는 맘을 열고 그 부르심에 응합니다. 마태복음은 거기서부터 성탄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믿음의 순종 / 로마서 11-7]

오늘 마지막 본문 로마서 1장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called, κλητός)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를 사도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문에서 이렇게 씁니다. “나는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1:7) 바울은 로마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를 부르심에서 찾았고,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도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5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 모든 삶에서 믿음의 순종’(obedience of faith, ὑπακον πίστεως)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민족의 삶에서 믿음의 순종을 이끌어내려 하는 이 대담한 발상에서 사도 바울의 모험적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믿음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의 정신적 도태가 진행되면서 믿음의 순종이라는 가치는 차츰 왜곡되었고, 마침내는 버림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의 순종이라는 말이 때로는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호가 되었고, 때로는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성도들을 우민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습니다. 개인주의로 인해 파편화 된 교회에서 믿음의 순종이란 자유주의적 신앙의 선택적 취향이 되었고, 자본주의화 된 욕망의 교회에서 믿음의 순종은 번영을 위한 거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순종을 말하는 종교는 제 명대로 살 수 없는 저급한 종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귀 기울임도 없고, 부르심에 대한 순종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의 진보가 과연 있을까요? 생명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거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책을 한 권 받았습니다. 제목은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입니다. 그 책은 신성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특별한 사람들의 삶과 말을 통해서, 둘째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부르짖음을 통해서요, 셋째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를 통해서입니다. (존 니프시,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38)

성탄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도 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먼저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환골탈태의 시대를 거치고 있습니다. 명목상의 민주주의, 기울어진 인권, 불공정한 정의, 포로가 된 평화, 이 모든 삶의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혼돈이지만, 그 안에는 역사의 분노와 하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속에서도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시겠지요.

우리는 어떻게 성탄을 맞아야 합니까? 삶이 흔들리는 난감한 현실에서도 민족의 가슴을 타고 흘러온 해방과 예언의 전통에 맘을 열었던 요셉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고 그 부름에 순종함으로써 새 세상을 열어간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성탄의 선물로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민족의 숨결을 타고 흘러온 해방과 예언의 요청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그리스도를 모시고, 예수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과 평화의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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