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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김희헌 | 2020-02-09

by 김희헌 posted Feb 09, 2020 Views 27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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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2-0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58:1-9a, 고전 2:1-12, 5:13-20)

2020.02.09. 주현절 다섯째 주일

 

[새로운 문명과 기독교 신앙]

지난 월요일 대천에서 열린 교단의 선교정책협의회에 다녀왔습니다. 이틀 동안 나눈 여러 논의 가운데 젊은 목회자들이 했던 두 가지 말이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가 되었다는 말가장 시급한 과제는 공교회성의 회복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은 오래전부터 나왔는데, 공동의 대처를 모색하기보다는 지엽적인 정치에 함몰되어온 안타까운 사태를 반영한 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종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비슷한 위기감을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인구절벽시대와 함께 사회적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농촌지역은 소멸하는 중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양극화와 소비문명을 극복할 대안이 좀처럼 나오지 않으면서 절망은 깊어지고 분노는 커졌습니다. 갈등이 일상화되고, 관계는 파편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식의 삶에 대한 갈망 또한 커졌습니다.

제이 맥다니엘이라는 종교철학자는 앞으로 다가올 문명을 생태문명이라고 말하고, 그 문명을 세우는 것은 아름다움의 감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행복의 본질이자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다섯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는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호기심과 경외감을 가질 때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움들, 언덕과 나무와 별의 아름다움, 강과 모래와 새들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속한 거대한 생명의 연결망 속에서 맛보는 일차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둘째는 그것과 교감하면서 인간이 창조한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예술품이나 건축물 등의 유형적 산물만이 아니라, 이야기와 시, 춤과 노래 등에 담긴 아름다움입니다. 셋째는 사랑과 우정 등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으로서, 우리 안에서 긍정적 연결의 영성을 불러일으켜주는 것들입니다. 넷째는 도덕적 아름다움으로서, 자발적인 관용과 용기, 진실한 겸손 등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굳어지지 않고, 더욱 지혜롭고 따뜻하며 창조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인격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2019한국생태문명회의 자료집, 34)

기독교의 신앙과 선교 패러다임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오백 년 동안 산업문명 시대를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교리와 신앙은 설득력을 거의 잃고 말았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일수록 심한 갈등을 겪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지난 시대의 전통과 습관이 새로운 환경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정신을 펼치기 위해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신앙과 선교방향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내부적으로는 생태적인 신앙을 세워가고, 외부적으로는 평화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입니다.

생태적 신앙이란 회개와 상생이라는 가치에 방점을 둔 신앙을 의미합니다. 풍요와 소비에 젖은 삶을 회개하고, 모든 생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세우려는 신앙입니다. 이 믿음을 따라 펼쳐지는 활동이 평화적 선교입니다. 그것은 남을 꺾고 자기 왕국을 넓히는 선교가 아니라, 저마다 지닌 생명의 아름다움이 상생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도록 돕는 활동입니다.

새로운 가치가 정착되는 과정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는 단지 생각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삶의 경험으로 육화(肉化)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만이 아닌 실천이 필요하고, 실천만이 아니라 성찰이 요구되며, 성찰만이 아니라 수행이 동반돼야합니다.

대표적인 실천의 신학인 민중신학 역시, 수행적 종교로서의 감각을 갖추지 못할 때에는 인간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뼈저리게 느낍니다. 신학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성찰과 수행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너의 짠 맛인가? / 마태복음 513-20]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료한 좌표를 제시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5:13-1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대한 격려와 거대한 비판을 동시에 던집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무엇이 너의 짠 맛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데 너희의 빛이 과연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끄는 빛인가?

이 질문은 제자들을 단지 고뇌의 늪에 빠뜨리는 사유의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온전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관심하신 것은 삶의 온전함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은 어쩌면 손쉽게 걸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스승에게 찾았는지 모릅니다.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하늘의 구원에 단박에 오를 수 있는 새로운 교리를 구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싸늘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과 교리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대의 율법이란 회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들의 믿음이란 세상의 짐을 지고 가는 수행이지, 삶의 무게를 벗고 추는 관념의 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허공이 아닌 이 ’(γς, earth)의 소금으로서 짠 맛을 지키는 것 (13), 그러면서도 우주’(κόσμου, cosmos) 빛으로서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 (14/16),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 하찮고 번잡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믿음에 맛의 존재도, 빛의 감각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꿈꾸는 힘도, 바라는 뜻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을 비판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향린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사는 저의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너의 짠 맛이냐,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너의 빛이냐? 이 물음 앞에서 떨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교단의 정책협의회를 마치면서, 12일 동안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앉아있던 분을 앞으로 모셔서 한 말씀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주 고백교회의 한상렬 목사님이었습니다. 10년 전에 방북한 후에 돌아와 삼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나서, 그간 하신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다고, 이제는 자기를 기도의 사람으로 봐 달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많은 함의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 70이 되고 보니, 기장이라고 하는 교단이 실은 고향과 같은 품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면서, 시를 하나 암송하고 말씀을 마쳤습니다. 그것은 장공 김재준 목사가 서른아홉 살에 쓴 불멸의 동경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꾸는 자, 위대한 동경과 약속에 사는 자, 그의 이름은 크리스천이다. 홍진(紅塵) 중에 묻혀 있으나 새 하늘 새 땅의 위대한 약속에 기뻐하며, 병약과 죽음에 시들어진 몸을 입고서도 불멸의 영광의 몸을 믿음 중에 보며, 죄오(罪汚)에 허물어진 영혼을 응시하면서도 지극히 선하고 거룩한 (至善至聖) 인격적 완성을 향해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곧 크리스천의 심정이며, 혼이며, 특색이다. (김재준전집, 1:98-99)

장공의 이 글은 신앙인의 맛과 빛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관습적 신앙과 위선적 신앙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참 맛과 빛을 구하라는 외침입니다.

 

[참된 경건 / 이사야서 581-9a]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맛을 잃은 신앙, 빛을 잃은 종교에 대한 질책과 훈계를 담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사람들이 입으로는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된 듯이말하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허물과 죄 때문이라고 이사야는 비판합니다.

이사야가 본 그들의 위선과 거짓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으시는데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하며 고행을 하겠는가 하는 형식적인 태도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금식하면서 일꾼들에게는 무리한 일을 시키는 이중적인 모습이요, 셋째는 서로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 가식적인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곳에서 올바른 믿음과 경건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응답 또한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참된 경건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를 제시합니다. (1)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2) 무거운 멍에를 끌러주는 것, (3)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4)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5)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6) 쫓겨난 가난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며, (7)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며, (8)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경건이요,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전한 구원의 소식(61:1-2)으로서 예수에게 이어져서 당신의 사명을 밝힌 취임설교(4:18)에서 밝혀질 내용입니다. 예수를 따른 많은 이들 또한 그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믿음의 기초 / 고린도전서 21-12]

지난주에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말한 세 가지 모습의 종교의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기적을 요구하는 종교, 둘째는 지혜를 갈망하는 종교, 셋째는 십자가의 길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이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logos)이나 지혜(sophia)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 2:1-2)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바울은 말을 잘하는 것보다는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말과 가르침도 성령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공동체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구했던 것은 세상의 지혜나 통치자들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지혜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십자가의 종교>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결부시키고, 통치자들의 철학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깨달은 지혜>와 결부시킵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는 훌륭한 말과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서로 지면서 은혜로 세워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은총의 경험이 없을 때, 피와 땀으로 세운 신앙공동체나 민주주의의 광장도 말쟁이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공청회가 있습니다. 향린의 교육 철학과 활동에 대한 소개와 논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진지하게 모색된 교회교육의 방향과 교육담당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에 기초한 신앙교육을 강화하고자 했던 그간의 평가교단의 교육적 역량을 활용하고자 했던 목회자들의 고민도 잘 나눠지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교회를 떠난 교우 한 분이 뼈아픈 자기 경험을 전해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그 이유가 향린이라는 가치와 교회라는 가치가 분열하여 서로 충돌했기 때문인 것 같다는 평가였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신앙공동체로서의 신학적 좌표가 제대로 설정되지 못한 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향린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공동체인 교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런 분열과 충돌은 반복될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와 선교의 방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담임목사로서 저의 목회철학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을 교우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19살에 한신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앙전통이 빛나던 시기에 그 정신을 배우고 그 우물에서 솟는 생수를 마시며 자랐습니다. 저의 사상에는 기장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기장의 정신은 교단과 교회를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 자체를 바르고 강건하게 만든 몇 가지 원형적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 정신은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와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한편, 세계 교회와 현대 신학의 제반 흐름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믿음의 꿈을 불어 넣으려는 분투 가운데 형성되었습니다. 저에게 목회철학이 있다면, 기장교단이 길러온 네 가지의 원형적인 신앙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낡은 교리와 억압적 권력으로부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변혁적 자유정신입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자기 머릿속에 그어진 국경선을 따라 움직이는 교리주의를 극복하고, ‘성령의 생명 샘이 솟아 넘쳐흘러 이웃과 세계 속에서 생명의 강을 이루게 하는 생명말씀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교리주의와 교권주의에 물들어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와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봤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모험하라!’는 장공의 가르침은 종교가 벌여야 할 인간혁명의 사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의 복음을 교회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민족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꿈과 비전으로 심어가는 예언정신입니다. 문익환, 홍근수 목사와 같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은 성전주의(교회주의)를 깨뜨리고, 분단으로 고통 받는 역사의 한복판으로 나아가 화해와 해방의 사건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배반한 채 교회주의와 성직주의를 강화하는 등 종교적 퇴행을 거듭하며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기만족적인 개교회주의를 타파하고 민족과 시대가 요청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분단된 역사를 치유하는 일은 한국교회의 최대 선교과제이자, 원죄처럼 내재화된 반북주의로부터 풀려나 민족의 교회로 재탄생하는 길입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이 교회를 생동시켜 진취적인 사회선교를 해나가야 합니다.

셋째는 성서에서 들려오는 민중전통의 북소리 즉,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민중들의 외침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민중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민중적 영성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민중과 함께함으로써 믿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신학적 지혜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해온 개신교회는 자본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분리시키지 못한 태생적 한계를 노정해왔습니다. 개신교회에서 노동의 신학은 점차 이교적인 것이 되어왔고, 교회는 자기충족감에 배부른 중산층의 사교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소비주의와 결합된 메시지는 성서의 정신을 일그러뜨렸으며,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난 교회는 민중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왔습니다. 교회는 생명과 노동의 영성을 회복하여 성서적 신앙의 원점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넷째는 한국과 같은 다종교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포용적 영성이 필요합니다. 여러 종교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이웃종교를 품을 수 있는 대승적 면모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배타적인 신학에 사로잡혀 독선적 선교를 펼치며, 사회적 분란과 고통을 유발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편협하게 이해하기 때문이요, 생존과 경쟁에 집착하여 복음의 참된 증언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웃종교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문화를 증진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는 평화의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신앙정신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사상적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잊은 채 보수주의 쟁탈전을 벌여왔습니다. 목표를 잃고 표류하는 동안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도 반생명을 물리치는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기장의 전통에서 피어난 네 가지 정신인 변혁의 자유정신, 역사참여의 예언정신, 민중적 영성, 포용적 영성으로써 복음(케리그마)을 세우고, 선교(디아코니아)를 펼치며, 친교(코이노니아)를 확장시키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 글은 교회에 저를 소개할 때 쓴 글입니다. 이 믿음을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부족한 면은 교우들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고, 가야 할 길이라면 함께 힘차게 나아가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너희는 세계의 빛이다. 너희의 행실로 빛을 비추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생명의 강처럼 흘러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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