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창 2:15-17, 3:1-7, 롬 5:12-19, 마 4:1-11)
2020.03.01. 사순절 첫째 주일 (3.1절 기념주일)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이자 3·1절 기념주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회중예배를 대체하여 인터넷으로 드리고, 우리 교회 역시 가정예배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는 못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아 묵상의 글을 교우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기후변화 시대에 알맞게 생태적인 영성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 마음속에 세우고자 하는 것은 녹색 십자가입니다. 녹색 십자가는 생태적 십자가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녹색 십자가의 사회적 의미는 상생과 공존의 정신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해 101주년을 맞은 3·1운동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정신에 입각하여, 종교의 차이와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 거족적으로 전개한 주권회복 운동입니다. 평화와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자고 인류의 지성과 양심에 호소한 이 운동의 정신을 잘 지켜서 이어가야겠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삶은 미리 예정된 길을 따라 진행되지 않고 열려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선택에 관한 성경의 대표적인 두 이야기를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선악과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광야시험 이야기입니다.
[자유와 한계 / 창세기 2장 15-17절, 3장 1-7절]
창세기 본문은 ‘선악과’와 관련된 성서 신화입니다. 신과 인간과 뱀이 나눈 대화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상상력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런 신화적 이야기들이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창조신화는 어떤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완성된 답을 주기보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상징적 언어로써 삶과 역사의 의미를 찾도록 요구합니다.
이 이야기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셨지만, 인간(adam)이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설정해 두셨습니다. 2장 16-17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kol, all)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허용했지만, 단 하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맺고 있는 원초적인 결속 관계를 비집고 뱀이 등장합니다. 보통 신화 속에서 뱀은 ‘불멸과 지혜’을 상징하는데, 성서신화에 나온 뱀 또한 간교한(‘ārūm, crafty) 지혜를 가진 동물로 묘사됩니다. 그 간교함은 말의 왜곡에서 시작됩니다. 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을 파괴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모든 나무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뱀은 ‘모든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했던 은총의 언어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는 억압적인 질문으로 바꿉니다. 그것은 하나님마저도 걸려들게 만드는 기막힌 어법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만일 ‘선악과’라는 단 하나의 열매라도 금했다면 그건 ‘모든’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는 논리가 구축됩니다.
뱀의 질문을 받은 여자는 또 하나의 왜곡을 첨가합니다. 여자는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를 먹지도(akal, eat) 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naga, touch)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뱀이 결정적인 충고를 합니다. ‘먹어도 적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뱀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거짓말쟁이의 말은 믿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금단의 열매는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그것을 따서 차례로 먹었습니다. 그러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기 몸을 가립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일단 끝납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의 전개과정을 보면 뱀의 말이 맞습니다. 선악과를 먹었어도 인간은 죽지 않았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신화가 인정하지 않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뱀의 말대로 열매를 먹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 일’은 생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선과 악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한 말에 대한 해석이 중요합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뱀의 말대로 행동한 인간에게 떠진 것은 무슨 눈일까요? 여러 해석 가운데 두 개만 골라보겠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몽매함으로부터 각성의 눈을 뜬 인간의 이야기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화는 삶의 주체로 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뱀의 도움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설정한 한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주체로 서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선악과 이야기를 고삐 풀린 욕망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신을 잃은 삶의 기원에 관한 것이 됩니다. 인간은 뱀을 통해서 신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고, 자신을 가리고 신을 피해 숨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원초적인 친밀감이 파괴된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신화적인 이야기는 논리적인 결론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묻습니다. 선악과라고 하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것을 따먹고 자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지, 그것은 열려있는 질문입니다. 한계를 초극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 실험은 역사를 밀고 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파멸시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해석 가능성과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또 인간의 자유는 무엇을 위해 발휘되어야 하는가? 성서신화가 던지는 이 질문은 모든 삶에 미치는 항구적인 물음이 됩니다.
[분리와 결속 / 마태복음 4장 1-11절]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의 광야시험에 관한 내용입니다. 창세기 신화에 나오는 뱀처럼, 광야의 예수를 유혹하는 악마(diabolos)가 겨냥한 것은 ‘하나님과의 결속’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을 파괴하는 방법은 실제를 왜곡하고 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맞선 예수의 응답은 과장된 것의 허위를 드러내고, 실재세계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광야시험 이야기는 의미심장한 도입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겉모습은 괴로운 신 부재의 현장이지만, 그 속 실상은 하나님이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인생의 대표적인 세 가지 괴로움을 당합니다. 악마는 그것이 신 부재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배고프고, 권력도 명예도 누리지 못하는 삶이란 하나님이 없는 삶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현실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유혹합니다.
한국교회를 물들여온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은 이런 주장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고통의 현실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하고, 고통 자체가 하나님이 심판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축복과 번영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달콤한 ‘지식의 열매’로 유혹합니다.
광야의 예수님은 그런 유혹을 물리칩니다. 차라리 배고픔을 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영광을 위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거나, 악마에게 절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자리에 머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서적 리얼리즘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독특한 실재론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통과 수난’ 자체가 신앙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반생명적인 음울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고통과 수난이 아닙니다. 성서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순절 첫 주일에 광야시험 이야기를 읽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합니다. 악마는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을 던집니다. 자신을 배고픔에 가두지 말고, ‘돌로 빵을 만들기까지’ 욕망의 자유를 누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생명이 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그 한계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빵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빵만으로는 채울 수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쓴 잔일지라도 달게 마셨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고, 성서가 말하는 모든 신앙의 낙관주의가 태동합니다. 신앙의 낙관주의는 욕망의 자유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예수 / 로마서 5장 12-19절]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담과 예수’를 비교하며,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는 아담에게서 비롯된 죄와 죽음의 질서와 예수로 인해 시작된 새로운 생명 사건을 대조합니다. 바울에게 예수사건은 죽음의 지배가 종식되고 생명이 주도하는 정의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계가 죄와 죽음의 질서로 얼룩져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모습은 아니라고 봤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빚어내는 생명의 열매들입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선물’(δώρημα, free gift)이라고 표현합니다. 함께 읽은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은 죄로 인한 결과물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비대칭성’을 의미합니다. 옛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대칭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범죄에는 심판이 뒤따르고, ‘유죄 판결’(κατάκριμα, condemnation)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요, 따라서 죄에 대한 ‘무죄 선언’(δικαίωμα, justifica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이 땅에 도입된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17-19절)
종교가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을 사유화하여 독식하고, 의로움을 자기 능력으로 여길 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종’(ὑπακοῆς, obedience)으로 인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비관을 뚫고 하늘의 은총에 잇대어 살아가는 믿음의 낙관주의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20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고난을 감내하면서 자기 의지와 용기가 참된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은 사순절의 정신이 아닙니다. 사순절의 과제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뜻하는 ‘Lent’라는 말은 앵글로색슨어로 ‘lencten’(spring), ‘샘’과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 사순절의 은혜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끝을 모르는 욕망 위에 세워진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돌아봅니다.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소비하는 것에 익숙한 삶을 참회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갈망합니다. 그 마음에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가 모셔지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또 한 주간 우리 사회는 바이러스가 몰고 온 고통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 헌신하는 분들에게 힘주시고, 이 시련의 기간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을 기억하고 서로 도우면서 삶을 지켜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의 수난과 순종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우리 사회는 힘겨운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련이 끝없는 욕망 위에 세워진 우리 삶의 방식이 몰고 온 재앙은 아닌지를 묻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의 선물을 베풀어주셔서, 죽음의 질서가 걷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생명의 세계를 놓기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의 삶에 하늘의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