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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농부는 밭을 포기하지 않는다. | 이성환 | 2020-07-12

by 이성환 posted Jul 12, 2020 Views 25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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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7-12

농부는 밭을 포기하지 않는다.(창 25:19-34, 롬 8:1-11, 마 13:1-9, 18-23)

2020.07.12. 성령강림절 일곱째 주일

 

저는 오늘 함께 나눈 성서 본문 주제를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을 우리 사람이 어떻게 일궈갈 것인가?’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제1성서를 꿰뚫는 주제인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제2성서의 핵심인 선포된 하나님 나라를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구원의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 이야기, 즉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그 미완의 약속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로 그 맥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의인이 아닌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라는 집단에 그 완성의 임무가 부여됩니다. 즉, 창세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서사에서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우리에게 현실적인 숙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남 일이 아닌 우리의 숙제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라는 주제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오늘 제1성서 본문인 야곱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억울한 에서? 영특한 야곱?, 창세기 25:19-34]

 

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설화 등으로 이어지는 사람의 죄로 인한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구원의 약속, 이러한 서사가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사람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둘씩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인 요셉과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역사를 이어갑니다.

 

그중에 에서와 야곱 이야기는 여러 해석이 많지만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문명 갈등론이 그것입니다. 에서는 수렵 문명을 야곱은 농경, 혹은 유목 문명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안에 갈등과 적대를 통해 결국 농경과 유목 문명이 그 이전의 생활방식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는 성서 해석입니다. 살결이 붉고 털이 많은 에서는 거칠고 투박한 성향을 보입니다. 사냥을 통해 고기를 얻지만 실패할 때도 있으니 안정적인 식생활이 보장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 농사와 유목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야곱은 일정한 소출을 보장받아 육식은 아니어도 굶을 일은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만 인류사가 수렵과 채취에서 하루아침에 농경사회로 전환된 것이 아니지요. 상당 기간 수렵, 채취와 농경과 유목이 공존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의 문명이 발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인류 문명사를 에서와 야곱의 생활방식에 적용해 야곱의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서와 야곱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야곱을 더 미화한다고 성서학자 폰라드는 주장합니다. 야성적인 에서, 차분하고 얌전한 야곱, 이렇게 말이죠. 

 

후에 에서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는 순간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는 대목이 나오는데 창세기 27장 36절에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팥죽으로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과 자신을 에서처럼 속여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은 것을 얘기하는데 다우베라는 성서학자는 에서가 먹었던 팥죽을 에서는 애초에 팥죽이 아니라 고깃국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에서처럼 꾸며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챈 것은 속인 것이 분명하지만 팥죽 한 그릇으로 큰아들이 갖는 권리를 약속 받은 것은 에서와 야곱간에 이뤄진 자명한 거래이기 때문입니다. 30절에 에서가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라고 말하는데 사냥꾼 에서가 보기엔 그 붉은 죽이 동물의 피가 섞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에서는 고깃국이려니 하고 먹었는데 팥죽이었다고, 속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설정된 태생적인 차이, 무엇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에서의 처지에서 보면 저주와도 다를 바 없는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참으로 서글프고 억울한 입장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이 증언하는 에서의 죄는 단 하나, 34절에, “에서는 이와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이겁니다. 

 

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형 에서보다 영리하고 상황판단에 능한 자일지는 모르나 성공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추악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형 에서처럼 분장하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독점합니다. 즉, 미개한 사냥꾼이 문화적으로 좀 더 발달 된 목자에게 당한다는 성서학자 궁켈의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언뜻 진화론을 엿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브니엘에서 부러진 야곱의 허리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증언합니다. 왜일까요? 왜 야성적인 사냥꾼 에서가 아니라 이름부터 발목을 잡는다, 즉 속인다는 이름을 갖고 태어난 야곱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허락된 것일까.

 

형을 기만하고 아버지까지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분명한 잘못을 저지른 겁니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사기죄에 해당합니다. 그런 죄를 저지른 야곱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역경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죄를 짓고 형의 서슬 퍼런 칼끝을 피해 광야를 방황합니다. 그 고난의 시간에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열정적인 노력’이라고 구약학자 프레이는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사람의 노력이 덧입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야곱의 끊임없는 노력. 이에 어울리는 사자성어가 줄탁동기(啐啄同機)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부는 밭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3:1-9, 18-23]

 

오늘 복음서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혹은 밭의 비유입니다. 다들 알고 계신 내용이기 때문에 이 비유에 대한 줄거리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13장 8절을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노랫말이 떠올랐습니다. ‘아흔아홉 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 번 승리’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노동가요인데, 숱한 패배를 할지라도 단 한 번의 혁명으로 노동해방은 가능하다는, 그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혁명은 아직도 요원한 얘기처럼 보입니다만 밭에 뿌려진 농부의 씨앗이 언젠가는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로 돌아올 것이라는, 단 한 번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뤄진다는 측면에서 그 둘이 갈망하는 그것은 비슷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는 단 한 번의 결실, 단 한 번의 승리를 통해 쟁취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결론 먼저 말씀드리면, 끊임없이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소위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열심히 하면 이뤄지고 안 하면 좌절된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되었고 그 선포가 수많은 거부와 저항에 직면하겠지만 결국 예수의 선포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일궈가는데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실패와 좌절을 맛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행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하는 씨뿌리는 자의 이야기의 교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 여기서 저는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농부입니까, 밭입니까. 물론 오늘 읽은 마태복음을 비롯해 마가, 누가복음에는 비유에 대한 해석이 친절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밭이라고. 그러나 저는 농부와 밭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밭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가 가능할 때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이 이 땅에 담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농부가 되어 씨앗을 심고, 또 우리가 누군가의 밭이 되어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결실을 이루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절망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 머문 사람들, 로마서 8:1-11]

 

그러면 문제는 야곱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열망하되 구체적으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 그리고 씨앗을 뿌리되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이 남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늘 제2성서 본문인 로마서에 있다고 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롬8:2)는 바울의 증언은 우리 사람을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나약한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야곱이 처음 추구했던 것은 장자의 축복이라는 현실적인 부요함이었습니다. 그러한 욕망은 그를 광야로 내던졌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 삶의 좌표가 바뀌게 됩니다. 개인적인 욕망이 하나님의 구원사에 복무하게 되는 에너지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이 생명과 평화,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힘으로 바뀌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되 자신의 욕망을 투여한 가치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지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나의 에너지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 나의 열심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서 있는지 또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밭을 포기하지 않는 농부처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떠한 성과물이 없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밭을 갈며 생명과 평화, 정의의 씨앗을 뿌린다면 언젠가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까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자리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시편의 노랫말에 힘입어

밭을 포기하지 않는 농부처럼 서로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고 

끊임없이 하늘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 나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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