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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 | 김희헌 | 2018-02-11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6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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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2-11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 (왕하 2:1-12, 고후 4:3-6, 막 9:2-9)

 

2018.02.11. 주현절 마지막 주일

 

  

 

[평창 올림픽에 담긴 평화의 메시지]

 

평창 올림픽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 남습니다.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는 남북 선수단의 모습이 그렇고, 성화를 점화하기 위해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대표하는 남과 북의 두 선수가 120개의 계단을 함께 뛰어오르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과 북이 앞으로도 평화의 언덕을 함께 오르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드린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회는 스포츠 경기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큽니다. 얼어붙어있던 남북관계의 해빙은 물론이요, 세계에 묵직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개회사를 통해서,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감의 자리가 되게 하자”고 선수들에게 말했고, 남북선수단이 공동입장을 한 것을 가리켜 “통합의 힘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라고 표현했습니다. 

 

선수단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들의 만남 또한 올림픽 경기에 못지않은 멋진 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CNN 방송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부부장이 악수를 나눈 장면을 톱뉴스로 뽑고 ‘역사적인 악수’라고 소개했다고 하지요. 또 어제 청와대 오찬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가 전달되고,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방문을 요청했다고 하니, 다시 한 번 평화의 큰 물결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런 평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은 이질적인 장면도 있었습니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는 축하사절단인지 방해공작단인지 모를 만큼 정치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천안함을 방문하고 탈북자를 면담하는 등 옹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 대표단을 바로 등 뒤에 두고도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던 행동에 대해서, 백악관의 관계자는 “한미일 동맹의 견고함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하니, 가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누가 평화를 원하는 세력이고, 누가 갈등과 긴장을 부추기는 세력인지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아무튼 올림픽 기간 동안 새로운 감동이 많이 일어나고, 지금 맞고 있는 평화의 전기(轉機)가 확고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력으로 이번 주일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되어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새로운 절기로 전환합니다. 주현절 마지막 주일은 ‘산상변모주일’(Transfiguration Sunday)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화한 사건을 성경본문으로 삼고 묵상하면서, 영광에서 고난으로 이동하는 믿음의 전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전환의 시대에 요구되는 봄(seeing), 열왕기하 2장 1-12절]

 

먼저 열왕기상 2장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언 전통이 생겨나던 초창기의 아득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주제는 ‘전환의 시기’에 있었던 리더십의 교체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엘리야로부터 엘리사에게 예언전통이 계승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시대를 연 위대한 인물 엘리야가 활동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큰 스승이 사라지는 이 시기에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가신다니... 위대한 시대가 저물고 마는 것인가!’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활동했던 중앙 성소 길갈을 떠나며, 동행하는 제자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여기 남아 있게. 나는 야훼의 분부대로 베델로 가야겠네.”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헤어질 수 없다고 대답하고 따라갑니다. 

 

이들이 나눈 대화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승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맞서려고 했을 수 있고, 제자는 스승을 홀로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들은 함께 길을 가게 되었고, 길 위에서 둘의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베델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도,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가는 길에서도 이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처음과 동일합니다. 

 

극적인 장면은 요단강을 건너면서 일어납니다. 엘리야는 마치 홍해를 지팡이로 가른 모세처럼,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강물을 내리쳐 물을 가르고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갑니다. 엘리사도 따라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 나눈 대화는 달라집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야훼께서 이제 나를 데려가실 터인데, 내가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지 말해 보게.” 엘리사는 “스승님이 가졌던 영감을 제가 두 배로 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신명기법전을 보면, 고대 사회에서 적법한 계승자는 두 배의 몫을 갖게 된다고 했는데 (신 21:17), 엘리사는 자신이 예언운동의 적법한 계승자가 되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제자의 요청에 대해서 엘리야는 그 요청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만일 자신이 떠나는 것을 보면 그 소원이 이뤄질 것이고,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엘리사가 자신의 소원을 이룰 것인지 긴장감이 흐르면서 행진은 계속됩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불 말과 불 수레가 나타나서 스승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고, 엘리사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사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그 후에는 엘리사가 스승의 능력을 이어받아서 예언자의 시대를 이어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예언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엘리사의 자격이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그것은 10절에서 엘리야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는데, 엘리사의 자격은 ‘보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보면” (if you see). 이것은 예언운동의 이어갈 사람이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통과합니다. 

 

그는 봤어요! 불 말과 불 수레가 나타나 스승을 태우고 승천하는 이 기적적인 장면, 그것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역사가 하나님나라 속으로 편입되는 종교적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일까요, 덧없는 세속의 시간이 영원한 진리 시간 속으로 귀의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말일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사는 스승의 뒤를 잇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엘리사의 자격은 ‘보는 것’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스승이 사라진 절망의 시대를 엘리사는 하늘이 개입하는 역동적인 시대로 읽어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의미를 부여해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언전통의 초창기에 있던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보다 큰 맥락에서 읽다보면 메시지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능력을 이어받아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엘리사는 힘을 행사하는 것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던 종교정신의 미성숙함을 여전히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3-24절을 보면, 엘리사의 폭력을 다룬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베델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리자, 엘리사는 야훼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합니다. 그러자 곰 두 마리가 나와서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물어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언정신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단계의 투박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이 피하기 힘든 ‘힘의 유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을 두렵게 한 것, 마가복음 9장 2-9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변모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놓여 있는 보다 큰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記者) 마가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룬 이 이야기를 특별한 흐름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부분(8:22-10:52)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이 여정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일련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스승과 동행하는 여행의 끝에 큰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서로 누가 더 높은 지를 다툽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난이라는 사실을 세 번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길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진리에 관한 무엇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들은 예수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인지,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관한 대목을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친 이야기(막 8:22-26)로 시작하여, 여리고에서 소경을 고친 이야기(막10:46-52)로 마치는 구도를 갖추었습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속에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을 넣고 있는데, 그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낮아지는 것이요, 자기 소유를 나누는 것이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요,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첫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스승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여 눈부신 옷을 입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스승을 공경하고 전통을 존중하는 듯한 이 발언은 실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말을 가리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엉겁결에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스승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 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이 실상은 겁에 질려서 내뱉은 말에 불과하다니, 마가는 왜 이렇게 평가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마가가 보기에 제자들을 두렵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분명히 그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 보여준 베드로의 태도와 연관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정작 스승이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럴 수는 없노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을 듣습니다 (막 8:33). 

 

그렇다면, 베드로를 두렵게 한 것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 있는 간격,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영광과 이 세상의 질서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인 식민지 백성들에게 본능처럼 배어있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빚어진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승리주의 신학은 사람들을 ‘공포의 자녀’로 만들고, 겁에 질려 만들어진 생각을 마치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올바로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내뱉은 겁에 질린 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제국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어, 그리스도는 황제처럼 높아졌고, 지배와 풍요 속에서만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 것은 비단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닙니다. 한국 개신교 역시 미국의 제국주의 정신에 원초적으로 쇠뇌 되어, 반공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의 원죄를 안고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 집단은 이 긴 분단의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평화와 화해의 길을 맘껏 꿈꾸지 못하는 ‘공포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말을 엉겁결에 질러대는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하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이 이 하늘의 말씀을 듣게 되자, 환상에서 풀려나 스승과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우리가 놓여나야 할 것은 제국의 이데올로기요, 들어야 할 것은 하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바울이 다룬 주제도 이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 사이에서, 고린도후서 4장 3-6절]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3절에서 ‘멸망당하는(perishing) 자들에게 가려진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왜 가려졌는지 그 이유를 4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신’(the god of this age)이 그들의 마음(noema)을 어둡게/눈멀게(blind)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세상의 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은 자신의 책 [하나님과 제국]에서, ‘이 세상(this age)’이라는 말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면 “제국과 문명의 야만성”이라고 말합니다.

 

제국과 그 문명의 힘을 설파하는 이 세상의 신들은 모든 사회 계층이 받아들이기 쉽게 ‘설득력 있는 광고’를 합니다. 거기에는 ‘예언의 약속’도 있고, ‘거룩한 승리’에 대한 보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평화에 이를 수 없는 야만의 발톱을 감추고 있습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 [하나님과 제국], 46) 

 

따라서 바울은 그것과는 다른 복음을 6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는 ‘지식(gnosis)의 빛’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우리의 마음(kardia) 속에 비칠 때, 이 세상의 신들로 인해 눈 먼 마음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려진 복음’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지식의 빛’을 말합니다. 이러한 대비는 당시의 신학적 환경에서 바울이 싸우고 있는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과 12장 11절에서, 바울은 자신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어떤 사도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위대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스스로 위대한 자들이라고 선전을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특출한 사도’(super-apostle)로 불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드라마틱한 환상체험과 비밀스러운 영적 비전을 통해서 성령을 소유하면, 고통을 당하지 않고 성공하면서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특출한 ‘수퍼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도리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고후 11:16). 그의 자랑은 복음을 위해서 겪은 자신의 실제 경험입니다. 

 

바울에게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고하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 죽을 뻔하고, 파선을 당해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추위에 떨고 헐벗었던 일’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얻은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이었습니다. (고후 11:24-28) 

 

이런 이야기를 편지로 전달받은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아마도 딜레마를 느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특출한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설파하고 있는 너무도 명료하고 매력적인 복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이 두 복음 사이에서 그들은 무엇을 선택하였을까요? 

 

  

 

이들의 딜레마는 오늘 우리들 역시 느끼는 유혹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세상의 신이 있습니다. 성공의 신이요, 풍요의 신이요, 권력의 신이요, 배타주의 신이요, 특권의 신입니다. 이 신들이 속삭이는 메시지는 너무도 익숙해서 우리 사회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기도하며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랑과 정의의 길을 걷는 훈련을 합니다. ‘정의가 사랑의 몸’이 되도록, ‘사랑이 정의의 영혼’이 되도록, 믿음의 길을 힘을 내어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크로산, [하나님과 제국], 301)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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