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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 김희헌 | 2018-03-04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4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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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3-04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출 20:1-17, 고전 1:18-25, 요 2:13-22)

 

2018.03.04. 사순절 셋째 주일

 

  

 

3월이 되면서 봄의 기운이 퍼지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경칩인데, 오늘은 새로운 계절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포근한 날씨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이 봄의 기운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명 있는 것들은 봄의 따뜻함을 잘 받아들여서 스스로 싹트고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것은 그 따뜻함으로 인해 더 빠르게 썩고 해체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봄의 따뜻함 속에는 냉정한 모습이 담겨있다고도 하겠습니다. 겨울의 추위가 매서운 듯해도 역설적으로 거기에는 생명의 판결을 유보하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봄의 따스함에는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결단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다가온 봄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피워낼 생명이 있는가?

 

  

 

[선교의 방향설정,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6년 전인 2012년 3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선교대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해에 부산에서 열릴 WCC 10차 총회를 앞두고 사전대회 형식으로 열린 200명 규모의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 회의는 30년 만에 새롭게 만들어진 선교문서를 최종 검토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교단 대표로 그 회의에 참석하여 1주일 동안 132개 조항으로 구성된 문서의 내용을 배우고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WCC 10차 총회를 맞아 공식적으로 채택된 그 문서의 제목은 “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환경에서의 선교와 전도” (Together Towards Life :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입니다. 이 문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선교의 방향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관심하고 있습니다. 골자를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WCC의 전통적인 신학사상인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신학을 재확인하고 더욱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창조신학’을 명확히 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적용합니다. 이렇게 창조세계 전체로 눈을 돌리면, 두 가지 선교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로 앞으로의 선교는 개종선교가 아니라 생명선교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선교의 목표를 개종(proselytism)에 두고 사람들에게 ‘회심(conversion)을 강요’하는 과거의 전도방식은 도리어 ‘복음전도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67조) 대신 앞으로의 선교는 모든 생명이 함께 ‘충만한 삶’을 살도록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그 가운데 ‘공동의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갖고 선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선교가 빈자와 약자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향해서 (to)’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선교는 ‘그들로부터 일어난 (from)’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복음의 중심으로 본 ‘예언자적’ 관점을 분명히 한 것인데, 이런 변화는 해방신학을 비롯한 여러 진보신학의 활동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개신교의 인적구성의 중심이 북반부에서 남반부로 이동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계교회는 앞으로의 선교의 방향을 ‘창조신학에 기초한 생명선교와 예언적 선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교회의 흐름이 그 동안 우리 향린교회가 가꾸어온 믿음의 가치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선교문서를 교우들과 같이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고민과 관심을 뒷받침 해주는 신학적 근거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는 화요일에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산하기구인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위원회」(CWME)에서 주관하는 선교대회에 참석하러 탄자니아로 떠납니다. 이 선교대회는 10년에 한 번 꼴로 하기 때문에, 이 대회를 통해서 세계교회가 다가오는 10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움직일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주제는 ‘성령 안에서의 활동 : 변혁적 제자도로 부름 받음’(Moving in the Spirit: Called to Transforming Discipleship)입니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정교회와 가톨릭까지 모두해서 8백 명의 교단 대표가 모여서 6일 간의 대회를 갖게 됩니다. 

 

제가 눈여겨본 것은 초대받은 사람들의 구성 비율입니다. 이번 대회는 청년(18-30세)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여성이 50%, 지구 남반부를 대표하는 총대가 60%에 이르도록 구성됩니다. 이런 인적 구성 자체가 앞으로의 선교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약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미래세대를 선교의 주역으로 삼으려는 관심이 거기 담겨 있다고 봅니다. 

 

저에게는 이 선교대회가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와서 배우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누면서 앞으로의 선교방향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 생동하는 믿음과 삶의 지침 / 출 20:1-17]

 

오늘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광야의 자유민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성경 최초의 믿음과 삶의 지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유랑민들에게 주어진 그 원초적인 열 가지 계명이 이후의 모든 성서적 가르침과 종교적 율법의 모체(母體)가 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성립과정에는 출애굽기의 이야기 줄거리에는 나오지 않는 조금 복잡한 역사가 있다고 학자들은 판단합니다. 그 실마리를 서로 다른 두 개의 십계명을 기록한 출애굽기 20장과 34장에서 찾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이렇지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기록한 두 개의 돌 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우상숭배의 현장에서 모세는 첫 번째 십계명이 기록된 돌 판을 깨뜨립니다. (출 32:19)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돌판 두 개를 깎아서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여 십계명을 주시는데, 이것이 34장에 나오는 두 번째 십계명입니다. 

 

문제는 20장의 십계명과 34장의 십계명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20장의 십계명은 4개의 종교적 계명과 6개의 윤리적 계명으로 구성된 반면, 34장에 나오는 것은 윤리적인 계명은 전혀 없고 절기와 제의에 관한 준수 규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20장에 있는 것을 ‘윤리적 십계명’이라고 부르고, 34장의 것을 ‘제의적 십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두 십계명의 내용이 서로 다른가? 그리고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본래적인 것인가?

 

먼저, 십계명의 내용이 왜 서로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십계명을 주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 돌 판 위에 쓴 그 말을 새 돌 판에 다시 새겨주겠다”(출34:1)고 하셨는데, 첫 번째 돌 판에 쓴 내용을 그새 잊어버리시고 엉뚱한 내용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억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성서학자들은 두 개의 십계명이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그렇게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십계명이 만고불변의 율법이 아니라 생동하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서학자들은 34장의 제의적 십계명이 고대의 종교전통으로부터 전해져 온 것인 반면, 20장의 십계명은 기원전 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문서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친 후에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0장에 나온 십계명의 내용을 보면, 아모스와 호세아, 이사야와 미가 등이 증언하고 있는 부자와 빈자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으며, 강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선 이 십계명의 청중은 여자나 어린이, 이방인 등이 아닙니다. 이 십계명은 종교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 헛된 맹세를 통해 야훼의 이름을 남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농토와 가축과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이요, 사회적으로는 가정을 이루고,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십계명은 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규범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십계명 안에는 혁명적인 요소와 시대 제약적인 요소가 같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와 종과 짐승과 나그네까지 모두 쉬도록 한 안식일 규정은 여전히 혁명적인 반면,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는 규정이나 하나님을 질투의 신이나 축복의 신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나의 계명이 완성되기까지 아무리 많은 땀을 흘렸더라도, 생동하는 신앙과 함께 하지 못할 경우에는 결국 새로운 계명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계명도 그러합니다. 십계명의 의미는 문자적인 충실함을 통해서 지켜지기보다는, 그 계명들이 품은 정신을 생동하는 믿음으로 이어갈 때 지켜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계명이라 할지라도, 낡은 질서를 지키는 고루한 율법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종교정신의 문명사적 전환 / 고전 1:18-25]

 

생동하는 종교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깨어있는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자 멍에인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운동을 전개한 바울의 삶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바울이 선택한 것은 ‘십자가’ 전략이었고, 그 전략은 ‘하나님의 약함’이라는 사상에 기반합니다. (John D. Caputo, The Weakness of God: A Theology of the Event, 45-46)

 

당시의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대표적인 생존 전략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율법이요, 다른 하나는 지혜입니다. 율법은 충직성을 가장한 피지배 종살이 정신을 상징하고, 지혜는 포용성을 가장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선택지라고는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여 율법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질서에 편승하는 지혜를 획득하여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와는 다른 세 번째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말씀’(logos tou staurou)으로 열리는 길입니다 (고전 1:18). 이 십자가의 길은 역설적이면서도 전복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순응하거나 그 시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읽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지혜를 대표하는 사람들인 현자와 학자와 변론가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고, 바울은 20절에서 말합니다. 

 

바울이 세 번째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됩니다. 고전 1장 22~24절은 그것을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인은 기적을 요구하고(demand),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desire),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preach).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scandal)이요,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klesis)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구분하고 있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삶을 성찰하게 하는 효과적인 구분이 됩니다. 인생의 질문을 풀어가는 일에서나 공동체적인 과제를 감당하는 일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기적/표징을 요구하는 방식인가, 지혜를 찾는 방식인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방식인가? 앞으로도 우리는 이 세 가지 사이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세 번째 길은 결과적으로 문명사적인 대전환을 일으키는 길이 되었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klesis)을 받은 삶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피해야 할 스캔들로 여깁니다. 지배욕과 결합된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고전 1:25) 이 말은 오해를 빚곤 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워낙에 크기 때문에,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최소한 사람의 힘보다는 크다는 뜻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과 지혜의 상대적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은 약함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말씀으로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그 세계는 힘/권력이 지배하지 않고, 약함이 보살핌을 받는 세계입니다. 율법의 교리가 상대방을 해치는 무기가 되지 않고, 믿음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관계가 창조되는 세계입니다. 과거의 전통이 폐쇄적인 정체성으로서 군림하지 않고, 사랑으로써 성령의 친교가 일구어지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의 낭만적 수사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참된 믿음이 지닌 긍지요, 기품 있는 믿음에 담겨 있는 결코 꺾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향한 소망입니다. 이 생동하는 정신에는 예수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습니다. 

 

  

 

[성전을 새로 짓는데 필요한 시간, 요한 2:13-22]

 

요한복음의 본문은 성전정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의 세 본문은 이 이야기를 두세 절의 짧은 스케치로 그리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열 개의 절을 할당하여 자세히 서술할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도입부에 배치하여 이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정화 사건은 거룩한 공간으로 여겨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열한 협잡에 대한 분노에서 촉발됩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위선이 유통되고,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거래가 벌어지는 그곳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emporion)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외칩니다. 그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본문 15절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묘사합니다.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semeion)을 보여주겠다는 말이오?”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들이 요구한 ‘기적’과 같은 단어(semeion)입니다. ‘무슨 표징을 보여주겠느냐’는 이 질문에는 로마제국을 정점으로 한 식민 질서의 율법에 순응해온 사람들의 기대와 의심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대답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대는 사라지고 오직 의혹만 남은 목소리로 대꾸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이 반문은 의심에서 비롯되었고, 의심은 믿음의 한계를 반영합니다. 그들의 지혜에 의하면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시간은 마흔여섯 해입니다. 사흘이면 된다는 예수의 말은 어리석은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흔여섯 해라는 시간의 실상은 로마 제국에 부역한 헤롯이 민중들의 환심을 사기에 필요한 시간이었을 뿐이지, 아버지의 집을 짓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세울 성전은 역사에 화육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옛 것이 죽고 새 것으로 다시 살아나기에는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마흔여섯 해’와 ‘사흘’이라는 시간의 대비는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대비요, 사대주의적 복종과 자유인의 믿음 사이에 놓인 절대적 간격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이런 대비 속에서 엇갈리는 종교와 문화의 장면들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일 광화문 광장에서 일군의 개신교 무리들이 삼일절 구국기도회를 가졌다는데, 이들은 민족의 독립을 외치며 자주민으로서 일어난 삼일정신을 기리는 날에 성조기를 흔들며 사대주의적 율법에 물든 혐오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의 운명에 몸 바쳐 참여하려고 했던 초기 개신교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독재에 부역하며 맘몬의 부스러기나 얻었던 교회의 악습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촛불정신으로 진화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앞질러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운 존재라기보다는 가련한 존재에 가깝습니다. 이미 역사에 버림받고 병상에서 질러대는 비명만이 그들의 언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예순다섯 해를 살아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지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전통에서 형성된 무언가가 현재 잘 작동되고 있나요? 과거에 형성된 관계가 오늘의 질서를 이루며 진행되고 있나요? ‘만약 무언가가 현재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대에 뒤처진 것임에 분명’합니다. (M. 맥루한) 새 시대를 주도할 정신은 현재의 질서에서는 아직 작동하지 않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동하는 신앙을 갖고 있다면, 지금 익숙한 것들을 넘어서 낯선 무언가를 상상하고 도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외침을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가 길러온 전통이 오늘을 갱신하는 힘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하나님의 지치지 않는 창조의 열정은 새 시대에 필요한 선교의 비전과 새 시대를 살아갈 믿음의 관계를 우리 교회에 화육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사순절이 끝나기 전, 우리는 죽고 다시 태어나기에는 사흘이면 충분하다는 그리스도의 시간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외침이 오늘 우리 모두를 재촉하는 은혜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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