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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그날이 오면 | 김희헌 | 2018-04-01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22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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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4-01

그날이 오면 (사 25:6-9, 행 10:34-43, 요 20:1-18)

 

2018.04.01. 부활주일

 

  

 

부활주일에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성가대의 칸타타도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찬양이었습니다. 이번 부활절엔 각별히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우리 민족이 화해의 길을 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으로 인한 긴 대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그토록 바라던 평화의 ‘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변화된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주일에 묵상하는 우리의 첫 번째 주제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민중들과 함께 했던 예수였고, 부활한 그분의 손에는 십자가에 달리면서 박힌 못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부활은 ‘망각을 통한 과거의 폐지’가 아니라 ‘기억을 동반한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어떻게 죽음의 지배력을 걷어내고, 생명이 저마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부활절을 맞는 우리의 물음일 것입니다. 

 

민족의 부활을 꿈꾸는 오늘도 과거의 무게는 남아 있습니다. 연례적으로 해 오던 키리졸브 한미연합군사훈련은 규모가 축소되었다지만 부활주일인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이번 주에 70주년을 맞게 되는 가슴 아픈 4.3사건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당시는 미 군정체제로서 작전통제권이 미군에게 있었습니다. 제주지구 사령관이었던 미군 대령 브라운은 “내 사명은 진압 뿐”이라고 말했다지요. 아직 진실조차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아픔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단과 대립의 긴 세월을 이제는 끝내자고 남북이 서로 제안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이 부활의 언덕을 함께 오르는 것과 같은 감격이 있습니다. 이 흐름에는 분명히 우리 시대를 울리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담겨있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지난날의 아픔은 기억하되, 고통스런 과거에 속박되지는 말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이 부활절 아침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사야가 기다리던 ‘그날’ / 이사야서 25장 6-9절]

 

금년 부활절에 주어진 성경본문은 이사야서에서 시작됩니다. 이사야는 남북으로 갈라져 싸워온 민족이 새롭게 거듭나는 ‘그 날’을 노래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는데, 그가 주로 활동했던 때는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부패와 불평등이 심했고, 사대주의적인 외교가 민족을 분열과 위기로 몰고 갔습니다. 

 

모든 문제는 민족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긴 대립과 갈등의 과정에서,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옆 나라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남 유다를 공격하자, 남은 당시에 가장 힘이 센 제국 앗시리아를 끌어들입니다. 앗시리아는 차려진 밥상이라고 생각하고, 먼저 시리아를 정복한 후 그 다음으로 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남 왕국 유다는 무사했느냐? 멸망은 피했지만,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하는 봉신국으로 전락합니다. 남 왕국이 이렇게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통합적인 정치를 할 수 없는 불신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층은 가난한 자들을 약탈하는 일에 자신의 권력을 활용했습니다. 사법적 공평함은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적 불평등은 커져만 갔습니다. 종교는 눈에 보이는 허례허식에 빠져서 경건을 가장할 뿐, 정의로운 영혼을 길러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회적인 동력은 갈기갈기 찢겨졌고, 그럴수록 권모술수에 능한 세력들이 득세하여 민족을 위기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시작합니다. 민족의 회복을 염원하는 그의 입술에는 예언자들의 언어 ‘공평과 정의’가 외쳐집니다. 그러나 그의 심장에서 불타는 염원은 입술의 언어보다 더 강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자적 열정과 비전을 대변하는 말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들리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바이요옴 하후’인데요, 한글 성경에서는 ‘그날이 오면’ 또는 ‘그날에는’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 날’은 정의로 회복되는 날이요, 기쁜 노래가 있는 잔칫날입니다. 이사야서에서 42번 반복되고 있는 ‘그 날이 오면’이라는 말은 오늘 본문 9절에서 33번째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죽음(maveth)과 눈물(dimah)과 수치(cherpah)를 없앨 것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날에 모든 민족은 수의를 벗기고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그려봅니다. 

 

9절을 사역해 읽으면 이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hinneh),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가 기다려온 분이 바로 이 야훼이시다. 그가 우리의 구원이 되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구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예슈아’(yeshuah)이고, 이 말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은 부활절을 맞은 우리의 귀에 이렇게 들립니다. ‘보라, 그가 우리의 예수가 되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간절한 기다림이 수포가 되지 않고 구원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이 예언자적 믿음, 이 믿음으로 인해 역사가 비록 고난으로 물든다 할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정의와 평화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새 시대를 열어간 마리아 / 요한복음 20장 1-19절]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는 간절한 기다림으로 부활의 아침을 맞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후대에 덧입혀진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해 곡해되기도 했고, 또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후대의 복음서 가운데 ([빌립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연인처럼 묘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 여성 지도자의 중요성이 선정적인 모습으로 채색되어 감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이 각별한 여 제자에게 집중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무덤을 찾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 뿐이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녀의 본래 삶은 귀신 일곱을 달고 살았다고 표현될 만큼 괴롭고 처참했습니다. (눅 8:3) 그러나 예수를 통해 새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지원하고, 중요 고비마다 스승과 동행하는 여성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모두가 떠난 무덤에 홀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큰 신비 앞에서 그녀는 사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다른 두 남성 제자도 그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절망 속에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울면서 무덤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가운데 천사를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사에게 하는 그녀의 말(13절)은 여전히 두 제자들에게 했던 말(2절)의 반복일 뿐, 새 시대의 여명은 그녀에게 동터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스승을 보고서도 ‘동산지기’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무지를 드러내기보다는 깊은 연민과 고통을 보여줍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부활의 새 시대 속에서 깨어나 외칩니다. “라뿌니(Ραββουνι)!” 이 외침을 통해, 눈물과 기다림으로 얼룩졌던 이 역사에서 부활을 증언하는 첫 번째 언어가 탄생합니다. 그것과 함께 눈물은 기쁨이 되고, 기다림과 고통은 보람으로 변합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을 보면, 부활절 새벽을 채우고 있는 것은 부름을 듣기까지 눈물로 기다린 마리아의 간절함입니다.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변화된 베드로 / 사도행전 10장 34-43절]

 

부활절 새벽이 마리아의 간절함으로 열렸다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삶은 그들 자신의 변혁을 동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가르쳐줍니다. 

 

사도행전은 민족의 테두리에 갇혀 있던 복음이 그 경계를 넘어 확대되는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될 만큼 고통스러웠던 예수의 복음은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차츰차츰 퍼져나갑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로, 그 다음에는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복음을 박해했던 사울에게, 마지막에는 로마군인 고넬료(Cornelius)에게까지 전파됩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이러한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사도행전 10장은 자세히 묘사합니다. 결코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가 꿈을 꾸게 되었고, 그들의 꿈이 이어져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 자체가 이미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에 관한 메시지보다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 변화된 베드로의 삶 자체가 부활을 증언한다고도 하겠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세속적 승리주의자였으며 완고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막 8:27-33),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변화됩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누가 진정한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방군인 고넬료를 만나는 자리에 오는 동안 그는 복음이 모든 이를 위해 열려진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고백합니다. 더 이상 폐쇄적인 민족주의 갇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며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받아주신다’는 사실 (35절), 예수님은 ‘만민의 주님’이요 (36절), ‘억눌림을 당하는 모두를 고쳐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베드로의 선포는 초대교회가 가진 고민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민족적 폐쇄성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이후의 모든 교회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부활주일의 본문은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민족이 회복되는 날, 거듭난 부활의 새 아침을 꿈꾸고 기다리며, 자신을 변화시켜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부활절을 살아갈 우리들의 믿음도 그러하기를 빕니다. 

 

저의 말씀은 여기서 마치고, 두 분을 초대하여 부활절 예배에서 우리가 품을 믿음에 대해 이어서 듣고자 합니다. 지난 3주 동안 세례교육을 받고 오늘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한 최현애, 서가영 교우를 앞으로 초대합니다. 이분들은 준비한 신앙고백문이 우리 공동체를 다시 떨리는 신앙의 출발점으로 인도해주기를 바랍니다. 

 

  

 

[신앙고백문 1 / 최현애]

 

저는 신앙이 없는 채로 살아오다가 20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전도를 늘 받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기 전의 교회의 모습에서는 많은 이질감을 느껴서 전도를 거부하다가 결혼 이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제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융통성이 없고 독단적이며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몸은 교회 나갔지만, 마음은 동화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신앙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저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2006년경 사회선교에 앞장서고 국악 예배를 드리고 있는 향린교회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 개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며 남편이 적극 권했고, 대학 때 풍물을 했던 제게 국악 예배는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대예배를 드리지 않고 안방에서 유아부 유치부에서 아이와 함께 보냈습니다.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어린이집에 행사가 주일과 겹치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며 몸이 아프기도 하여 교회 예배 참석하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은 동화되었지만 몸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 것입니다. 세례는 전혀 생각 못하다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세례식을 보고 목사님께 문의하게 되었습니다. 

 

조헌정 목사님의 이임식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핍박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언제나 거리에서 함께 하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오신 목사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향린 교우들을 보고, 목사님이 함께 하셨던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작게나마 역할을 찾아야하겠다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신앙적으로 더 단단해 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삶을 배우고 따르려고 노력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함께 하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고백문 2. “함께 걸을가영?” / 서가영]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소녀는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와 엄마가 항상 외치는 하나님의 존재가 궁금합니다. 교회를 찾아가봅니다. 찾아가, 하나님을 증명해내라고 요구해봅니다. 답을 찾지 못합니다. 교회를 떠나도 보고, 그 존재에게 협박도 해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나에게서 데려가지 말라고. 그러면 당신을 믿겠다고. 소녀는 기회를 얻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소녀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녀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본인의 내일을 위해 타인의 오늘을 빼앗아 갔습니다. 소녀는 좌절합니다.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소녀는 그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부정으로 깊게 묻었습니다. 그렇게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갑니다.

 

소녀는 예전부터 마음속에 소중히 품고 있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소녀의 오늘을 살게 해주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소녀는 하루하루 그 꿈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가슴이 뛰었지만, 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길을 걸으면서 너무나도 외로워했습니다. 그런 소녀에게 함께 걸을가영? 하고 말을 걸며 한 친구가 다가왔습니다. 안개 때문에 그 형상은 보이진 않았지만, 소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소녀는 하나님이 각기 다른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소녀의 마음 일부를 그 친구를 위해 내어주었습니다. 

 

오늘도 소녀는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고, 서로를 섬기는 세상을 꿈꿉니다. 아픈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사람을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섬기겠단 꿈을 꿉니다. 

 

세상은 소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숫자가 적혀있는 종이쪼가리에 눈이 먼 채 죽어가는 이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인의 생각과 마음이 공동체보다 먼저인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린가 봅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가시와 날이 많이 박혀있었습니다. 

 

소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한 없이 약해, 다치고, 넘어지고, 흔들렸습니다. 소녀는 아직 꿈을 이루기에 미숙하고, 어리숙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괜찮았습니다. 든든한 친구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 갈 뿐입니다. 

 

아무리 부정해 봐도, 소녀의 자리는 결국 ‘여기’였습니다. 결국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제 마음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친구와 저의 꿈대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숙함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것이 제 신앙입니다. 제 믿음과 소망을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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