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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증인 | 김희헌 | 2018-04-15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35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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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4-15

증인 (행 3:12-19, 요1 3:1-7, 눅 24:36b-48)

 

2018.04.15. 부활절 셋째 주일, 세월호 기억주일, 4.19혁명 기념주일

 

  

 

[부활, 믿음을 잃은 시대에 등장한 증인]

 

오늘은 부활절 셋째주일이자, 4.19혁명 기념주일이요, 세월호 참사 기억주일입니다. 이번 주일 성경본문을 묵상하다가 하늘뜻펴기의 화두를 ‘증인’으로 잡았습니다. 오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본문에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데, 헬라어 원어로는 ‘마르투스’( μάρτυς)입니다. 번역하면 목격자(witness)가 아니라 순교자(martyr)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증인’은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증인’은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 까닭을 생각해보니 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그 하나는 오늘날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부조리가 여전한 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적 질서와 제도 역시 많이 정착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들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위해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역시 좋은 일입니다. 4.19 혁명의 가치를 품고 살아오신 분들이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진리의 증인을 잃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여전히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진리와 생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한 것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증언하는 증인이 존재하지만, 그 증언의 진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불신의 시대에는 증인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증언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증인을 잃은 불신의 시대에는 합리적인 지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신, 즉자적 욕망을 따라 표류하는 반지성주의가 번성합니다. 우리 사회는 4년 전, 눈앞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다 속으로 잠기는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헬조선’으로 불리던 그 사회에서 우리는 반지성이 창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수십 일을 금식하며 진실을 요구할 때 광장에서 펼쳐졌던 폭식투쟁의 야만은 그 단면이었습니다. 

 

종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특히 많은 교회가 정부의 실책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며, 반지성주의를 지탱하는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꿈을 잃은 종교의 모습이었습니다. 믿음을 욕망으로 물들일 뿐 ‘진리의 증인들’을 길러내는 일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지성주의의 실체는 ‘지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상실’입니다. ‘지성의 결핍’이 아니라 지성 자체에 대한 ‘신뢰의 부재’입니다. 그 이면에는 믿음을 잃은 시대의 비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사회가 마치 죽음의 무덤처럼 느껴지던 때에 부활의 전령처럼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던 무덤 문을 활짝 열고, 역사의 한 복판으로 예수가 부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드넓은 광장이 촛불로 뒤덮였고, 진실을 증언하고자 하는 증인들이 행렬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인들이 등장함으로써, 여전히 아픔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는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파동의 시발점은 4.16의 아픔과 몸부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4.16은 하늘이 무너지는 사회적 아픔으로 찾아왔지만, 또한 그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진실을 따라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증인들이 태동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하여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요, 하늘의 진실을 지키는 증인이 되고자 하는 믿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그 삶으로 초대하는 부름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증인, 보고도 믿지 못한 제자들의 과제 / 누가복음 24장 36-48]

 

오늘 누가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평화의 인사를 전하는 스승을 유령으로 여길 뿐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실재하는 스승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 37절은 그들이 “놀라고 (scared) 무서움에 사로잡혔기 (terrified)”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지성을 짓눌러버린 경우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유령과 실재를 분간하지 못하고, 실재를 유령처럼 대합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부활한 스승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눈앞의 스승을 목격하고 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런 불신의 뿌리를 가리켜 성경은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삶의 폭풍우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 본능적인 감정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는 습관이 됩니다. 잔인한 방식으로 죽임 당한 스승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고, 죽임 당한 자의 부활을 꿈꾸지 못하는 불모의 마음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무덤의 문은 이미 열렸지만, 두려움으로 봉인된 제자들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손과 발, 고통의 상흔이 박힌 살과 뼈를 보여줍니다. 그러자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가 되어 제자들의 눈을 뜨게 만듭니다. 역설적으로 부활의 증거는 고통당한 몸이었습니다. 역사를 부활케 하는 것도 고통을 당한 몸이요, 역사가 부활했음을 알리는 표지도 고통을 당한 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고통당했지만 죽음을 뚫고 되살아나는 생명의 원리이자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4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것은 보고도 믿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부활의 증인이 출발해야 할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가 부활 이후의 현장을 갈릴리로 지시한 반면, 누가복음은 고통과 실패의 장소 예루살렘이 부활의 증언 장소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의 2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의 당부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실현되어 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고 하신 예수님의 당부는 사도행전 본문에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는 베드로의 화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떠는 불신의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도들로 나타납니다.

 

  

 

[회개, 진정한 치유 / 사도행전 3장 12-19절]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그 내용은 성전 미문 앞에서 앉은뱅이를 치유해준 사건(행 3:1-10)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 사건은 이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질병까지 떠안고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걷지 못하는 그의 비극을 이용하여, 그를 성전 문밖에서 앉혀두고 구걸을 시켰습니다. 가련한 이 사람은 성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이 상황은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여기서 죄악의 모습을 본다면, 그것은 불구의 몸을 가진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구걸을 시키는 사람들이나, 그를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종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서있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나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에게 줄 것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십시오.” (3:6) 그러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걸어서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했던 말의 첫 번째 논점은 치유를 가능케 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서 비판적인 어조로 그들의 오해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앉은뱅이의 치유가 ‘베드로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치유는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은 흔히 ‘예수 이름만 부르짖으면 모든 질병이 낫는다.’는 세간의 선전보다는 더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의 근원에 대한 해석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치유의 기적을 자신의 ‘능력과 경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질병과 고통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계가 병든 채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요, 사람들은 서로가 부서진 관계 속에서 시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치유란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능케 할 사람의 능력과 경건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의 삶에서는, “의로운 분은 거절하는 한편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고, 결국 생명의 근원이 되는 주님을 죽였다”고 비판합니다. (14절) 

 

그렇다면 이렇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버린 그 시대의 질병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베드로가 한 주문은 ‘회개’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했던 첫 번째 말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막1:15)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여러분이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이제 회개하십시오. 돌아오십시오. 그래서 죄를 씻으십시오.” (15/17절)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삶을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주관적인 구조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영적인 긴장감입니다. 도덕적인 반성이 아니라 존재의 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지성은 지능에 의존하기보다는 믿음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그 믿음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감정의 잉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 / 요한1서 3장 1-7절]

 

요한1서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고유한 자기인식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큰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서,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3절),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6절). 

 

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면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요? 오늘날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이 말은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 윤리보다 더 심오한 믿음의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법’으로 표현된 헬라어 원어는 ‘아노미아(ἀνομία)’ 즉, 영어의 아노미(anomie)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불법’보다는 ‘무법’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고, 법이 없으니 ‘무질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무질서의 겉모습은 혼돈이지만, 그 실체는 욕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과 행위에 질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겉모습은 무질서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 하나의 내면적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욕망과 이해관계를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노미(anomia)가 곧 죄(hamartia)‘라는 표현은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실존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서 낯설지 않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불법’이라는 표현 역시 ‘아노미아’입니다. 욕망의 질서, ‘아노미아’의 종이 되지 말고, 의로움(dikaiosynē)의 종이 되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4.16의 고통을 안고 4년의 세월을 헤쳐 온 유가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큰 슬픔을 안고 있었지만, 하늘만이 말해 줄 진실을 위해 의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역사는 세월호의 유족들에게 커다란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예배를 통해 다짐할 것은 그들과 함께 역사의 증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1서 본문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요한의 이 권고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 (2:27/28, 3:6)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 (행 3:15),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 (요일 4:7)에 관한 권고입니다. 

 

  

 

부활절에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지만, 그것은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우리 삶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부활을 증언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으로써 역사의 부활에 참여했던 수많은 증인들, 그들이 바로 이 역사 속으로 부활하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머물며,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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