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떨어진 밀알 (렘 31:31-34, 히 5:5-10, 요 12:20-33)
2021.03.21. 사순절 다섯째 주일
[역사의 봄]
춘분을 지나며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아직 꽃이 피어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어제의 봄비로 빈들의 마른 풀도 되살아날 것만 같습니다. 만물이 깨어나듯이, 역사의 봄도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2월 초부터 시작된 미얀마 민주화 투쟁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군부가 부정선거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 지도자들을 축출하고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의 불복종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안타까운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벌써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법 구금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 폭력사태에 세계인들의 공분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태를 해석하는 시각이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서양 제국이 그동안 아시아에서 벌여온 악행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즉시 미국과 UN은 규탄성명을 발표했지만, 이와는 달리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태국은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고, 중국과 인도 역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밑바닥에는 남아시아 대륙 안에 최초의 미군기지가 설립될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 제국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비극을 악용했고, 지정학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겉으로는 인도주의라는 수사학을 활용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쟁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저항투쟁을 선택한 미얀마인들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미얀마 민중들은 군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맞서 싸우는 길에 들어섰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세계 시민들과 종교인들이 미얀마 민중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국민을 향한 국가의 폭력과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이 항쟁은 아직 민주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후발국가의 뒤늦은 투쟁만은 아닐 것입니다. 코로나 역병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싸움은 인류가 해내야 할 보편투쟁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국가의 규제가 더욱 강화되고, 그것은 체제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이 맞는 위기 상황은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촛불 정권을 자임한 세력들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에 사회적 양극화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도리어 불로소득의 문화가 조장되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사회적 불평등을 측정하기 위해 국가의 총자산을 한 해의 국민소득으로 나누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그 값이 커지면 노동소득보다 자산소득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의 크기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피케티 지수(Piketty coefficient)로 알려진 이 기준에 따르면, 대부분의 OECD 국가는 4에서 6입니다. 우리나라는 박근혜 정부에서 7.8이었던 것이 현 정부에서는 계속 오르면서, 작년 말 한국은행의 자료에 의하면, 8.6을 넘어섰습니다. 이렇게 높은 이유는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의 비율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 자영업자는 건물주에게 세를 바치는 ‘도시 소작인’이 되었고, 거기서도 밀려난 사람들은 사회적 배제라는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언젠가부터 ‘공정과 정의’라는 프레임에 빠졌는데, 사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서 공정함이라는 잣대는 기계적 평등주의를 조장하여,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가로막는 이유가 됩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지원을 특혜로 보게 되며, 결국 약자에 대한 혐오감정에 휩쓸려 극단적 보수주의에 동조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이념의 대결이 고조될 뿐, 변화를 위한 동력은 잃게 됩니다.
공정성을 강조할수록 혐오 사회의 모습이 더욱 커지는 악순환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찰과 참회가 필요합니다. 두 주 앞으로 다가온 보궐선거를 둘러싼 정치권의 모습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함께 쥐려는 탐욕이 시대정신처럼 활보하는 이 세상을 멈추려면,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역사의 봄을 맞으려는 노력은 미얀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밀알 / 요한복음 12장 20~33절]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은 마치 무언가 완성된 듯한 세계에 던진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는 진리의 대결은 이제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들고, 그들을 번민의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진리의 대결은 끝난 것 같은데, 세워진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그리스인들의 방문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이 어떤 관심으로 예수를 찾아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의 명절에 그리스인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 특이한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는, 오늘 본문 직전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말에 있는 것 같습니다. 19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예수를 따라갔소.’
바리새인들마저 자인하듯이, 대결은 끝났고 모두가 예수를 따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그들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은 밀알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 가르침은 주체의 윤리입니다. 사람이 바로 서는 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일반적인 상식을 거스르며,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예수의 이 가르침은 일방적이고 과장이 담긴 듯이 보입니다. 목숨을 거는 정성만으로 세상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정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둘러싼 여건입니다. 예수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씨앗의 정성만으로는 안 되는 밭의 중요성에 관한 강조입니다. 돌밭이나 가시덤불의 땅에서는 아무리 건강한 씨앗이라도 열매를 제대로 거둘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밀알의 가르침은 죽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식의 순교적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에 관한 비유는 당연한 이치처럼 보이는 것에 담겨있는 엄중한 면을 드러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밀알의 처지에서 보면, 사실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실존적인 선택이 필요합니다. 죽지 않고 자기를 지킬 것인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지. 여기서 밀알의 가르침은 위태로움과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밀알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번민을 털어놓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여기에는 예수의 번민과 결단이 담겨있습니다.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고자 예수의 이 고뇌에 누가 참여할 수 있을까요? 성서는 이 지점에서 청중을 바꿉니다. 예수의 고뇌를 듣는 그 자리에서, 예수를 만나러 온 그리스인들은 사라지고, 늘 예수와 함께했던 민중들, ‘오클로스’가 등장합니다. (29절) 복음서가 여기서 청중을 오클로스로 바꾼 이유는 보다 근원적인 세상의 변화에 주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인은 명절의 순례에 참여한 사람들이지만, 오클로스는 제국이 지배하는 약탈의 세계에서 살길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청중이 오클로스로 변한 상황에서, 예수는 그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31절) 이 말씀은 대담한 선언이지만, 동시에 무거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와 폭력이 일상화된 세계, 그 속에서 하루하루의 생존마저 버거운 민중들에게, 하나의 밀알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일 수 있을까요?
오늘날에도 자본과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 세계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이 깊이 드리워있습니다. 폭력적 상황에 노출될수록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점차 자포자기하며 순응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전쟁의 위협 앞에서도 공포와 두려움보다는 무관심을 선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시적인 불안 때문에,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삶이 정착되고 세상의 질서가 완성된 듯한 상황에서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괴로운 요청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라는 예수의 판단은 기이해 보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라는 생각은 허황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그린 사람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예수의 요청은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 / 예레미야 31장 31~34절]
성서 역사에서 가장 괴로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 가운데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그는 나라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빠진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과거의 약속에 매여서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옛 세계의 파국을 맞으라고 말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던 시기,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통한의 시대를 살았던 예레미야가 품은 약속은 새로운 언약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과는 다른 약속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공정성에 기초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깨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왕하 25:7), 그 약속은 깨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민의 마음에 써질 새 약속을 그려냅니다. 그것은 포로기라는 비참한 시대를 견뎌야 할 사람들이 품을 약속입니다. 역사의 긴 겨울을 견디고, 예언의 꿈을 봄의 대지에 심고 꽃 피워낼 사람들을 위한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새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언약의 기본원리는 말해줍니다. 31장 33절 말씀입니다.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약은 삶을 규제하는 외부적인 율법이 아니라, 가슴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짓과 억압으로 억누르는 관계가 아니라, 진리의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을 알고, 허물과 죄에 대한 처벌로 유지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입니다. (34절)
그것이 예레미야가 꾸었던 예언의 꿈이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새로운 약속에 기초한 새로운 꿈이었습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이 / 히브리서 5장 5~10절]
예레미야가 꿈꾼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과 달랐고, 예수가 구한 영광은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 영광에 이르는 동선과 달랐습니다. 예레미야와 예수 시대에도 영광스러운 이들은 많았습니다. 권세와 부귀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길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예수를 가리켜 ‘고난을 겪고, 순종을 배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5장 본문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영광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상처에 기름을 발라 싸매는 메시아, 어두운 세상에 신의 선물처럼 화육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줍니다. 히브리서는 그를 가리켜 멜기세덱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성만찬의 평화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멜기세덱과 같이 평화의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는 자신이 놓은 그 길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것은 정복을 승리로 보고, 풍요로운 소비를 진보로 보는 세상의 길과는 다릅니다. 예수를 따라 앞으로 걸어갈 길은 이전 시대가 진보라고 부르던 길과는 다릅니다. 산업 문명 시대의 진보는 야만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 문명이 이룬 진보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 생존의 기초마저 파괴된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빵과 포도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멜기세덱과 같이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참회합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밀알이 되어서 생명을 피워내는 삶을 소망합니다. 겨울이 지나 돋아난 새싹은 죽음을 모릅니다. 작은 팔을 벌려서 온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그 모습에서 봄이 지어집니다. 우리도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지어가야겠습니다. 그 삶에 그리스도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역사의 봄을 향한 수많은 노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국가폭력에 맞서 싸우는 미얀마 민중들, 그들과 연대하여 평화를 위해 싸우는 세계 시민들, 얼어붙은 세상을 나눔과 돌봄으로 녹이는 생명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우리도 하나의 밀알이 되어 푸르른 세상을 만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