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 일을 완성 하십시오 (삼하 1:1, 17-27, 고후 8:7-15, 막 5:21-43)
2018.07.01. 성령강림절 여섯째주일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분단의 장벽을 허물며, 남과 북의 협력과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다방면의 교류가 논의되고, 많은 회담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와야 한다고 기대하며 바라던 시대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지나온 시대와 도래한 시대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사회가 아직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삶의 가치를 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년 동안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입국하고 있는 예멘 난민들의 문제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과제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숨 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주창되었던 정의와 평등에 관한 이상이 이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을 만큼 커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낯선 이웃을 환대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합의하여 마련하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인간의 자격’을 묻는 물음이 되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과거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 지난 수요일에 있었지요.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로 고통당하던 노동자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사의 해고와 결찰특공대의 폭력진압과 국가기관의 투옥처분에도 낙망하지 않던 영혼이 9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서른 번째의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낡은 질서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은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입니다.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으면서 지나온 시간이었습니다.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인해 때로는 버겁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경이롭게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면서, 교우들과 함께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맘에 하나님의 말씀 한 줄 새겨지기를 바라며 성경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본문은,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민중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탈리싸 쿰! / 마가 5장 21-43]
오늘 마가복음서 본문은 곤경에 처한 두 여인의 이야기가 포개져 있습니다. 한 명은 12년 동안 혈루증에 고통을 당한 여인이요, 다른 한 명은 죽어가는 열두 살 먹은 소녀입니다. 두 이야기가 겹친 까닭은 마가복음 편집자의 실수라기보다는 무언가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뜻이 있을 듯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모두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 명은 열두 해 동안 피 흘리는 병을 앓았지만 의사들을 만나도 고치지 못하고 재산만 모두 허비하고 병세는 더 악화된 상태이고, 다른 한 명은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열둘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숫자가 반복되어 사용된 까닭은 어쩌면 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써 민족 전체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전체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씩 살펴보지요. 첫 번째 부분은 이야기의 배경을 묘사하고 있는 21-24절입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시자, 삶의 뿌리가 뽑혀 고통당하던 민중들, 오클로스(ὄχλος)들이 모여듭니다. 예수님과 오클로스가 모여 있는 이 자리에, 한 사람이 찾아오지요. 마가는 그를 의미심장하게 소개합니다. “회당장 가운데 한 명인 야이로”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회당장 가운데 한 명’이라는 수식어는, 단지 야이로의 직업이 회당장이라는 사실보다 더한 것을 말해줍니다. 그가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로 추앙받던 회당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의 이름 야이로(Ἰάϊρος)는 ‘빛을 비추다’ 또는 ‘구원을 베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들은 그 사회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도록 안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야이로는 그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딸에게마저도 빛과 구원을 보이지 못하고, ‘딸이 죽게 되었다’고, ‘살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예수는 그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두 번째 이야기(25-34절)가 끼어듭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피 흘리는 병’(rhysei haimatos)에 걸려 12년 동안 고통당한 여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누가 그녀를 고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녀는 놀라운 능동성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갑니다. 회당장이었던 야이로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가는 수동적 태도를 취했다면, 그녀는 예수의 옷만 만지더라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리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러자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비난하지 않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4절) 절망적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바로 그 믿음이 자신을 치료하였다(sesōken)고 하시며, 그녀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피흘리는 병’에서 회복된 여인에게 개인적으로 발설되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의 경우에는 ‘민족의 패망’이라는 절대적 비극 앞에 놓인 자기 공동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네 믿음이 너를 치료할 것이다’는 메시지입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장면(35-43)은 오늘 이야기의 완성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예수의 반응입니다. 마가는 35절에서 실망스런 반전을 보여주면서 야이로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는 병’에서 회복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는 자리에 축복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따님이 죽었다’고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듯이, ‘선생님을 괴롭혀서 무엇 하겠냐’고 점잖게 말하지만, 그것은 예의를 차린 태도라기보다는 ‘믿음을 포기’한 말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마가는 묘사합니다.
36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들의 말을 “곁에서 들으셨다”고 말하는데, 파라쿠오(παρακούω)라는 동사는 ‘묵살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그만 여기서 관두자’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예수님은 ‘묵살하고’(disregard), 사람들을 간추려 아이를 향해 떠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요구하신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통곡하며 떠들고 있었습니다. 마가 공동체에게 이 장면은 초상집과 같은 패망한 나라를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를 비웃습니다.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살리려는 희망이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취한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내보냅니다. 현실에서 죽음만을 보고 믿음을 잃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초대하는 일은 주어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부모와 제자들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싸 쿰’(Ταλιθὰ κούμ), ‘소녀야, 일어나라’(egeiró)고 외칩니다. 그러자 소녀는 일어나서 걷게 됩니다. 이 부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커다란 황홀감’(ekstasei megalē)에 휩싸이게 됩니다. 죽음의 세계가 끝나는 부활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절망과 죽음에 맞선 사람들의 믿음과 회복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자기 시대의 비극을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이야기에 담아 전합니다. 절망에 빠진 두 여인과 같은 자기 시대의 사람에게,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 헬라어가 아니라 자기 동족의 언어인 아람어로 ‘일어나라’고 호소합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시련의 상황에서도 믿음을 갖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미 죽은 현실이라고 판단하며 부활의 희망을 비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일어나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경이롭게 열리는 삶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열정을 공동체적으로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듣게 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의 길 / 고린도후서 8장 7-15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그 일을 완성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란 가난하고 약한 공동체를 돕는 일입니다. 그렇게 돕는 일을 가리켜, ‘은혜’(8:7)로운 활동이요, 서로를 향한 ‘축복’(9:5)이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봉사’(9:12)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격려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7절)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사랑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사는 것으로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서 상대방을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사랑의 진실이 담긴 그 일을 ‘이제는 완성하라’고 말합니다. ‘시작할 때부터 가졌던 열성을 따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마무리 짓느냐 하면,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핍한 사람을 채워 주어서 공동체 간의 ‘평형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형으로 번역된 헬라어 이소테스(ἰσότης)는 평등(equality)이나 공평(fairness)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모두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독교적 이상을 대변합니다.
바울은 그런 이상적인 관계의 실마리를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생활을 할 때 함께 먹었던 ‘만나’에서 찾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인 만나는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출 16:18) 놀라운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해방공동체로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예시해주는 하늘의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는 달리, 인류는 ‘많이 거두면 남고, 적게 거두면 모자라는’ 방식으로 문명을 전개했습니다. 로마의 삶이 그것을 대표하는 문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세속의 삶과는 다른 길,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함이 없는 삶의 길’을 열어가라고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고전 16:1-4, 고후 9:1-15), 다른 편지에서도 그와 같은 활동을 소개합니다. (롬 15:26, 갈 2:9-10)
안타깝게도,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서는 초대교회를 생동감 있게 만들었던 상호부조 활동과 빈자 구제 활동이 점차적으로 빈약해진 습관으로 굳어지기도 했습니다. 구제 활동이 사랑의 실현보다는 양심의 짐을 더는 행위에 가까워지면서, 공동체 간의 평형을 이루려고 하는 ‘이소테스’의 정신이 희미해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이제는 그 일을 완성 하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평등과 공평의 정신을 실현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앞으로 남북교류의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이 권고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 문명은 많은 점에서 진보를 이룩했지만, 또 다른 많은 점에서 길을 잃고 인간다운 삶에서 너무도 멀리 떠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활의 노래 / 사무엘하서 1장 17-27]
사무엘하서 1장에 나오는 본문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그리워하며 지어 부른 조가(弔歌)로서, 활의 노래(the Song of Bow)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활의 노래’는 애도의 노래로 지어졌지만, 실상은 전쟁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지어서 부르며 기대했던 효과는 다윗 왕조의 미화와 왕권의 강화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노래를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였을 것이고, (1:18) 이 노래가 성경에 배치된 위치 역시 정치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다윗과 사울은 애증의 관계였고, 다윗과 요나단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부하였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사위가 되었고, 바로 그 자신의 출중함으로 인해 경쟁관계에 놓였다가, 결국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친구 사이의 변해가는 관계를 지켜보면서도, 요나단은 변함없이 다윗을 신뢰하였습니다. (삼상 18장)
그런 이들이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분명히 다윗은 자기 삶에 찾아온 비극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사람들은 다윗이 지은 애가를 듣고 그를 위로했을 것이며, 함께 부르며 다윗의 편이 되어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느끼는 고통을 저주하거나 조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세대를 지나며 불리는 동안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운반하는 수단이 되었고, 사람들의 정신을 길들이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 노래 안에는 애도와 사랑이, 증오와 비탄이 교차합니다. 용사들에 대한 찬사와 쓸모없이 버려진 무기들에 대한 탄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을 함께 노래하는 삶이 신비합니다. 무언가에 포박되어 있으면서, 또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삶이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활의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어쩌다가 두 용사는 엎드려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이 구절이 제 맘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현재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수년 동안 시달려온 내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갖은 방식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갈등이 이 공동체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공동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저는 공동의회 개최 결정이 정의를 드러낼 일도, 사랑을 실현하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결실을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움은 남길 것입니다. 배움이나마 얻고자 한다면, 불가피한 이 길을 걸으면서 계속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와 벌이는 행위가 우리의 미래를 열 수 있을 만한 것인지를.
저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에게 이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안합니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향린의 역사와 정신을 모욕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거꾸로 향린이 추구한 가치를 이데올로기처럼 추앙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현재 무언가에 포박되어 있지만,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잃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에,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詩를 한 편 읽으며,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후손들에게 (An die Nachgeborenen)
I
참으로, 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말이란 어리석다. 매끈한 이마는
무감각함을 드러낸다. 웃는 이는
무서운 소식을
미처 듣지 못했을 뿐이다.
어떤 시대인가,
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범죄가 되는 시대는,
침묵은 그렇게 많은 불의를 담고 있기에.
저기 느긋이 길을 가는 사람은
곤경에 빠진 친구들에게
이르지 못 하겠지?
사실,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믿어다오, 그것은 우연일 뿐.
내가 하는 일로 배불리 먹을 아무런 자격이 없다.
우연히도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내 운이 다하면 버림받을 것이다.)
내게 말하기를, 먹고 마셔라! 그리함을 기뻐하라!
그러나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것이 목마른 자에게는 없는 것이라면
어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지혜로워 지고 싶다.
옛 책에는 지혜로움이 무엇인지 쓰여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그 짧은 시간을
두려움 없이 보내며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원하는 것을 다 채우지 않고 잊는 것이
지혜에 합당하다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구나!
II
굶주림이 휩쓸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분개하였다.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전투 중에 밥을 먹고
학살자 사이에 누워 자고
되는 대로 사랑에 마음을 기울이고
자연을 참을성 없이 보았다.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리 시대엔 길들이 늪을 향해 있었다.
내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했고 나도 그걸 바랬다.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빈약하였다. 목표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보였지만, 나로서는
닿을 수 없었다.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III
너희는, 우리가 잠겨버린 밀물 속에서
떠오르게 될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의 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가 지나지 않은
이 어두운 세상을.
그러나 우리는 걸어왔다. 신발보다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불의만 있고
분개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천박한 것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려 했지만
우리 자신이 우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날이 이르면,
우리를 생각하라,
관대한 마음으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무언가에 포박되어 있으면서도,
또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삶이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언어와 행위가
빈약한 습관에 머물지 않도록 깨어있으십시오.
주님은 우리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믿음의 꿈이
우리 모두를 인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