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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달리다 굼! | 김희헌 | 2021-06-27

by 김희헌 posted Jun 29, 2021 Views 13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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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6-27

달리다 굼! (3:22-33, 고후 8:7-15, 5:21-43))

성령강림절 6 (210627)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위기 속의 고백 / 애가 322~33]

오늘은 이곳 명동 예배당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입니다. 직접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든 영상을 통해 참여하는 분이든 여러 상념이 마음에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을 제1성서의 본문 <애가(哀歌)>가 어느 정도는 표현해 줄 것이라고 봅니다. ‘애가는 남 왕국 유다가 겪은 비운의 경험을 배경으로 지은 노래책입니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노래는 기원전 6세기 바벨론 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도성이 불타고 성전이 무너진 고통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땅에서 쫓겨나 낯선 삶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 교회의 사정은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정붙이고 살던 예배당을 떠나는 심정이 작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애가>에 기록된 애달픈 심정이 그저 먼 느낌만은 아닙니다. 손때 묻은 의자는 잘려서 쌓여 있고, 믿음을 다짐하며 걸었던 십자가를 다시 떼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주는 의미를 새겨보기 위해서, 지난 역사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현재 자리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대지 114평을 매입한 때는 19674월입니다. 기록을 보면, 그해 9월 기공식을 하고 4개월 만에 건물을 완공하여 12월에 첫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이듬해 19686월 헌당식을 가졌으니, 그때로부터 꼭 53년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기 위해서 교회의 두 번째 터전이었던 남창동의 대지와 건물을 매각했을 때의 심정은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오래전 교회 역사책을 보면, 당시의 교인들은 새 시대가 요청하는 교회로서 새 출발을 다짐하며명동으로 옮겼다고 말합니다. (<향린 20>, 116)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향해 출발한 54년 전의 발걸음이 지금 우리에게는 지나간 발걸음으로 기억되기에, 우리는 역사의 회한을 느끼게 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눈부신 진보와 변화를 겪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에는 군사독재 정권의 폭정이 깊어지고 있어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곳에서 그 과제를 비교적 충실히 담당한 것 같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종교 공동체로서 내부적인 개혁 정신과 진취적인 믿음을 추구하는 노력 또한 열심히 해왔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써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우리는 더 앞으로 나가고자 합니다. 명동 예배당에서 퇴거하는 것은 큰 전환을 의미합니다. 광화문에 새로 지을 네 번째 예배당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시대가 부여하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크게 보면 세 차원입니다. 문명사적으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태 문명을 열어가고, 역사적으로는 포스트 분단시대의 광활한 상상력을 펼쳐야 하며, 교회적으로는 포스트 성장주의 시대의 깊이 있는 종교적 수행을 뿌리내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든 예배당이 준 안정감에 머물 수는 없고, 이제 낯선 광야의 시련과 모험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은 애환과 비탄의 시간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고백과 성숙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출발을 앞두고 함께 생각해 볼 성서 말씀은 애가서에 표현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3장은 고통의 시간에 표현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고난의 절정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것은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19~23)

고난의 시간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하심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야훼 하나님의 특징으로 알려진 신실하심은 히브리어로 에무나’(emunah, אֱמוּנָה)인데,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는 변함없는 신뢰를 뜻하는 에무나가 성서가 가르치는 믿음을 대표하는 언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신실하시듯, 하나님을 향해 신실한 믿음은 광야에서도 생명의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선교 / 고린도후서 87~15]

지난 금요일은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었습니다. 풍요와 번영의 세계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가 실상은 광야 생활과 같은 고통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전쟁의 여파입니다. 두 세대가 넘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 전쟁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채 서로 증오하며,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역사의 질곡을 이겨내고자 하는 헌신적인 노력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연대와 협력 관계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제7차 한미교회협의회가 진행되었는데, 이 모임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모임은 1970년부터 오십여 년간 이어오고 있는데, 처음에는 양국의 민권/민주화 운동을 서로 격려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는데, 1986년의 제4차 협의회를 통해서 미국교회협의회(NCC-USA)가 한반도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대해 참회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양국 교회의 연대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1997년 뉴욕에서 개최된 제5차 협의회에는 한국과 미국의 교회뿐만 아니라, 북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그련), 세계교회협의회 (WCC), 캐나다 교회, 천주교와 정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석하여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논의를 본격화했습니다. 공동의 과제로, 평화협정 체결 동과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운동, 평화교육을 강화하고 북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하는 노력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런 기조를 유지해 오면서, 이번 7차 협의회에서는 4가지 주제로 연대하며 양국 정부에 촉구하기로 했습니다. 1) 한국전쟁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도록 촉구하며, 2) 신뢰회복을 향한 상호군축과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고, 3) 대북제재를 해제하여 인도적 교류와 협력을 재개하며, 4)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체제인 쿼드가 신냉전체제를 강화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여기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하도록 촉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주요 사안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교회가 이렇게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요, 교회가 생기면서부터 가진 사명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8장 본문에서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가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위해 구제금을 모아서 보내는 일을 하도록 바울이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연대하는 행위는 언제나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민권의식이 성숙한 오늘날에는 물론이요, 교회가 태동하던 1세기의 사회상황에서 그런 연대는 더욱 빛나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연대와 협력을 하도록 이끄는 가르침 가운데, 기독교 정신이 보유한 위대한 사상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잘 표현된 것은 9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구제 활동을 독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직관적인 가르침입니다. 나의 부요함이 스스로 가난해진 그리스도에게 빚지고 있다는 의식, 이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요, 생명의 세계를 향한 열쇠입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기독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눈으로 보는 지혜입니다. 힘의 논리로 질주하는 이 세계가 파멸하지 않는 이유,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서 새로운 문명이 열립니다.

지난 금요일 한미교회협의회에서 미국NCC 총무인 Jim Winkler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인용하여, 미국이 세 가지의 질병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문명에는 인종주의, 물질주의, 군국주의가 나타나는데, 이윤이나 재산권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이 질병이 절대 극복되지 않으며, 그렇게 지속한 문명이 이제는 기울어서 쇠퇴와 붕괴의 임계점(티핑 포인트)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1세기의 마케도니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빚진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나섰듯이, 우리도 이 역사에 빚진 마음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다짐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번 한미교회협의회에서 양국 교회가 약속한 네 가지 공동행동 가운데 첫 번째 목표는, 정전협정 70년이 되는 20237월까지 한반도 종전평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기장 교단이 먼저 나서기로 했습니다. 오는 9월 교단총회에서는 전국 1,600개 교회가 이 일을 참여하자는 공식결정을 하게 될 텐데, 시작되면 우리 교우들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반도 평화통일 선교를 포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힘껏 감당하면서 다가오는 시대를 잘 준비할 수 있기를 빕니다. 광야로 나아가는 삶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 일어서는 삶이요, 그 모습이 마치 예수께서 달리다 굼! 하고 외치는 것처럼 힘찬 행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살림의 이야기 / 마가복음 521~43]

오늘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병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한 사람은 십이 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 더욱 병세가 악화되어 곤경에 빠졌고, 다른 한 사람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열둘이라고 숫자가 반복된 까닭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민족 전체의 암울한 현실에 모종의 깨우침을 주려는 마가의 의도도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애가가 바빌론에 의해 제1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나온 노래라면, 마가복음은 로마제국에 의해 제2성전이 파괴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애가가 변함없는 신뢰를 강조했다면, 마가는 더욱 적극적인 믿음으로 삶을 경이롭게 열어가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두 이야기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데, 오늘은 예수의 말씀에 주목하여 그 가르침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십이 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께 와서 그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묻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사람들이 많아 떠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물음을 하시냐고 반문했지만, 예수께서는 손을 뻗어 자기를 만진 그 여자를 찾아내서 말합니다.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안심하고 가라는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 개인적인 발언으로만이 아니라, ‘민족의 패망이라는 절대 비극을 경험한 공동체를 향한 어떤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믿음을 잃지 말고, 구원을 향해 손을 뻗으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열두 살 먹은 회당장 딸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와 그 소녀가 이미 죽었다고 말할 때, 예수께서는 그 말에 개의치 않으시고(παρακούω)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요청합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살리려는 희망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비극의 현실 앞에 선 시대의 징후를 대변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소녀에게 가서 달리다 굼!’(Ταλιθκούμ), ‘소녀야, 일어나라’(egeiró)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나 걷게 됩니다. 희망을 잃은 세계에 불어넣은 부활의 경험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어둡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전한 예수의 말씀입니다. 절망의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열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광야로 나아갑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주어진 과제는 비교적 잘 마쳤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안고 있던 사회에서 우리 교회는 맡겨진 역할을 해냈고, 그것이 교회 정문 기둥에 붙어 있는 동판의 의미라고 봅니다. 다시 광야로 나아가는 지금, 우리는 쫓겨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소명에 합당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마음을 모읍니다.

광야는 거추장스러움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예수의 꿈을 또렷하게 기르는 곳입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새 시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사명을 드높이는 예수의 꿈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시대에 고백한 십자가는 떼어 마음에 간직하고, 새 예배당에서 다시 그 십자가를 걸 때까지 예수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지난 54년 동안 이곳 명동에서 교회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떼어 마음에 품고 광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셔서, 광화문에서 펼칠 새로운 선교 과제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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