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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수가 있는가 | 김희헌 | 2021-07-18

by 김희헌 posted Jul 18, 2021 Views 15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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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7-18

예수가 있는가? (삼하 7:1-14a, 2:11-22, 6:30-34, 53-56)

성령강림절 9 (210718)

 

[코로나의 교훈, 파괴된 실재를 보는 지혜]

코로나 사태가 1년 반 넘게 길어져 피로감이 누적된 와중에, 날마다 확진자가 1,500명가량 생기다 보니 고통의 끝이 어딘가 싶습니다. 이 사태의 교훈을 문명의 전환이라고 하면서도, 현실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는 미래를 지을 수 없을 텐데하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새로운 삶이 가능할까?’ 하는 회의감도 몰려옵니다.

그동안 대안적인 삶에 대한 상상이 많이 제시되었지만, 코로나 기간에 사회적 양극화는 가속화되면서 도무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대기업과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한 기업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내고 있지만, 불안한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 소위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을 견뎌야 하는 삶은 더욱 확대되는 듯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젊은이들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연대와 협력도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연대란 애초에 없는 것이지만, 노동의 연대마저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져 약화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완성차 3사인 현대, 기아, 한국GM의 노동조합이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법제화를 주장할 때, 노동계 내부에서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시민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대기업 노조에 혜택이 집중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정년 연장은 왜 사회정의가 아닌가,” 시사IN 708, 2021413)

그러고 보면,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자본과 노동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단순화하여 말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지난 세대가 살아온 이분법적 갈등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겠지요.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벌인 후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은 1962년부터 노태우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1992년까지의 30년이 군인들의 시대였고, 김영삼이 문민정부를 연 1992년부터 문재인이 퇴임할 2022년까지의 30년은 민주주의 주창자들의 시대였다고 하겠습니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이 두 세대는 모두 이분법적 대결의 시대였습니다. 친일 대 반일, 친북 대 반북, 민주 대 독재의 진영논리가 실재(the real)를 압도하면서, 상대방을 죽여야 할 적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대결이 격렬한 만큼 많은 것을 생산했지만, 또한 많은 파괴를 동반한 시대였습니다. 파괴된 실재의 고통을 이데올로기로 봉합하는 이념의 시대였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세대는 이전과는 다를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런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 코로나 사태죠. 이 팬데믹의 경험은 이념적 당파성보다는, 고통으로 부서진 몸에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시대의 지혜는 지구별의 파괴된 실제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자체가, 파괴된 지구환경이 빚어낸 실재의 습격사태이기 때문에, 깨진 실재를 직시하고, 그 고통을 돌보고 치유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가 필요합니다. (Benjamin Bratton, The Revenge of the Real)

그렇게 보면,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부터, 우리 사회는 파괴된 실재가 당하는 고통에 집중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투(me-too) 운동과 성 소수자와 관련된 문제가 그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인해 보이지 않던 성적 불평등과 폭력적 현실을 보게 하였습니다. 또한,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몸이 부서지고 결국 죽음에 이른 성 소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편견과 증오를 양산하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생명 현실을 파괴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으로 파괴된 실재를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 깨진 현실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용기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런 지혜로운 실험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극화로 인해 깨질 위기에 처한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소득이나 기본자산을 제공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신기루처럼 감추는 이데올로기, 허구적인 낙수효과 (trickle-down) 경제이론이나 GDP 무한성장주의 등을 벗어던지고, 삶의 존엄성을 지키는 실질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를 살아온 한반도의 몸은 어떤가요? 실제적인 고통을 감추는 분단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에 격렬한 증오부터 산뜻한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준 교훈은, 각자도생의 삶이란 관념일 뿐이며 실제로는 모두 연결된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단된 땅을 잇는 통일평화의 길을 앞으로 더욱 넓게 열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몸의 현실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앞에서 계속한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질문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의 몸,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 관한 물음입니다. 길어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와 친교와 선교 등 교회의 주요활동이 파행을 겪으면서, 한국교회는 존립에 관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크고 작은 걱정과 염려가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신앙공동체로서 그 몸이 튼튼한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물음, ‘예수가 거기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의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예수가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에게 초점을 둔 신앙, 에베소서 211~22]

오늘 서신서 본문 에베소서 2장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서 신앙공동체의 고유한 사명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화해의 사역을 하게 하신다는 사명의식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세계가 차별과 적대감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민족적 장벽, 주인과 종의 신분의 장벽,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억압 등으로 얼룩지고 갈라진 세계는 하나님이 없는세계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를 모시면, 막힌 장벽이 허물어지고, 완고한 율법이 철폐되면서, 동료 인간과의 화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2:16) 바울에게 평화는 어떤 실천이나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요, 적대감이라는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상상력은 바로 여기에서, 평화가 단지 행위나 이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라는 고백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갈 때, 자기만의 장벽에 갇혀 살아가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나그네가 아니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2:19~20) 바울의 이 외침은 예수를 가진 사람의 영원한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적 실존이 세워지고, 기독교적 생명력이 펼쳐집니다.

문익환 목사는 바로 이것이 예수가 역사의 초점이 되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란 영원한 젊은이 예수에 초점을 두는 것이요, 이 신앙이 비록 미지의 세계처럼 보이는 미래를 약속된 미래로 여기며, 그것을 항해 모험 찬 발걸음을 떼게 하는 역사의 추진력이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의 초점 예수,” <문익환 전집> 12, 102)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수많은 행위의 향연과 이념의 주장은 있지만, 예수로부터 평화를 얻는 이 명료한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생겨납니다. 코로나 시대에 느끼는 신앙의 위기도 대부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비대면 시기에 교회는 그동안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해왔는지를 몸으로 경험하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점차 뚜렷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독교 선교 3.0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628일 하늘뜻펴기, “믿음이 이끄는 곳”)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 140년을 크게 반으로 나누면, 그 전반부는 기독교 복음이 가진 원초적인 생명력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때였습니다. 이 시기의 교회는 때로는 고난의 시대를 싸매고 치유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띠고, 때로는 정체된 시대를 깨우쳐 끌고 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띠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늘 예수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흥하고 성숙하는 시기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원초적 생명력을 바탕으로 전도선교가 가능했던 이 시기를 가리켜 선교 1.0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점차 복음의 원초적 힘을 잃고, 권력에 편승하거나 욕망에 들러붙으며 변해갔습니다. 몸집은 커졌지만 복음의 알맹이는 잃고, 행위는 다양했지만 신앙의 초점은 흐려졌습니다. 분단이 고착화하는 과정에 반공주의의 보루가 되고, 국가폭력의 시대에는 탈역사적 교리종교로 피해가며, 소비주의 시대에는 욕망에 편승한 번영종교의 온상이 되면서, 외형적으로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기 길을 잃어버린 종교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으며 작동 불능에 빠진 이런 패러다임의 기독교를 가리켜 선교 2.0시대의 기독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기독교는 다시 복음의 원초적 생명력이 되살아나고, ‘파괴된 몸을 예수의 평화로 치유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운 예배처소를 짓는 일도, 70주년의 선교 방향을 새롭게 세우는 것도, 바로 이 <선교 3.0시대>를 열어가려는 비전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존재로써 예수를 드러내는 신앙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제시되는 이념이나 표출되는 실천도 의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예수가 있는 곳, 마가복음 630~34, 53~56]

복음서 본문 마가복음 6장은 예수 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서 일과(lectionary)는 예수의 대표적인 두 가지 기적 이야기를 일부러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 이야기를 빼고 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드는 생각은, 그 위대한 기적 사건도 예수의 복음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관심하는 것은 위대한 기적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가 있는 곳의 장면, 그 모습의 특징에 대한 묘사입니다. 첫 번째(30~34)는 연민과 연대의 모습입니다.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는 제자들과 예수의 삶에 가난한 민중들(오클로스)이 찾아올 때, 예수께서는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깊은 연민으로 대합니다.

두 번째(54~56)는 치유와 회복의 장면입니다. 예수의 생명력을 알아본 사람들은, 예수가 가는 곳 어디든지 아픈 사람들을 데려오고, 옷이라도 만져서 낫게 해달라고 하며, 정말로 손을 댄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낫게 됩니다. 예수 공동체의 생명력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 ‘3.0 시대를 준비하는 신앙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기적과 같은 양적 성장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수 운동의 꿈을 잃고 예언과 진리의 감각을 버린 뼈아픈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비대했던 몸뚱이에 바람이 빠지면서 무기력해지고, 욕망과 번영의 추구 속에서 복음의 힘과 종교의 길을 잃었다고 직감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보수적인 교회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가며 물어야 할 것은 거기에 예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불/가능성, 사무엘기하 71~14a]

1성서 본문 사무엘기하 7장은 다윗을 축복하는 나단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두 가지 독법이 모두 가능합니다. 하나는 경건한 다윗에 대한 아낌없는 축복으로 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예언의 타락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성서에 묘사된 다윗의 모습이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모범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승리주의 종교의 우상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이중성은 그의 인격이 분열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룩한 성공적인 삶이 빚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인생의 업적이 도리어 존재의 덫이 되는 운명적 비극은 다윗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자손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아들을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시험으로 변한 아브라함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추앙된 민중의 벗이었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예수에 이르기까지, 예언의 역사에는 축복과 시련이 교차합니다. 우리 삶도 그러합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있는 교우들에게, 또한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교회에 나단의 예언과 같은 하늘의 축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일 뿐,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삶에 모든 예언의 가능성인, 예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향린교회를 섬겨온 우리들의 삶에는 예언의 심장이 맥박치고 있습니다. 호세아처럼 사랑으로 상처를 싸매며, 아모스처럼 정의로 난세를 돌파하며, 하박국처럼 격렬하게 평화를 부르짖은 몸짓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가오는 미래의 가능성일 뿐, 다시 한번 중요한 것은 예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선교 ‘3.0시대에는 더욱 생태적인 지혜와 더욱 평화로운 용기를 지닌 신앙인과 신앙공동체가 요청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예수를 드러내는 신앙의 모험이 멈추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를 모퉁이 돌로 삼고, 그 위에 집을 든든히 지어가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고통의 현실, 파괴된 몸, 오늘의 세계는 평화를 갈구합니다. 지친 우리의 삶도 희망을 구합니다. 성서는 묻습니다. 거기에 예수가 있느냐고. 예언의 심장을 구하기보다 예수를 먼저 구하십시오. 시대를 이겨낼 지혜와 용기를 얻기에 앞서 예수의 믿음을 구하십시오. 예수를 모퉁이 돌로 삼고, 그 위에 삶을 든든히 지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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