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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섬김 | 김희헌 | 2021-10-17

by 김희헌 posted Oct 17, 2021 Views 13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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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0-17

섬김 (38:1-7, 5:1-10, 10:35-45)

창조절 7 (2021.10.17)

 

[섬김과 하나님 나라 운동]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마다 대선 후보를 선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라 하면 국가의 수반으로서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섬기는 일꾼이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단위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봅니다. 국가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서로 권력을 다투는 경쟁 사회이지만, 또한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파편화되면 지속하기 어려운 운명공동체의 성격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섬기는 사람이 없으면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국가의 최고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섬기는 일꾼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양면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보전을 위해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또한 그 안에는 공동체적인 사랑과 연민에 기초한 희생과 섬김의 장면이 있습니다. 역사가 진보해가고 사회가 성숙해간다는 것은 약탈적인 모습이 순화되어 이해와 섬김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어떤 공간일까요? 교회는 각자가 자기 분량만큼 구원의 몫을 챙기는 이익사회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회 집단보다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한 곳입니다. 교회를 정의하는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실험하는 장소라고도 하겠습니다. 그 실험은 서로 섬기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서로 섬기는 질서가 강고해집니다. 강건한 공동체는 섬김을 기쁨으로 여기는 기풍이 세워진 곳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알 수 없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론을 알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과 사랑은 서로 깊이 얽혀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앎이 없는 사랑은 맹목이요, 사랑이 없는 앎은 공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맹목과 공허가 우리 삶을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물리학의 법칙처럼 실험을 통해서 검증되거나 수학의 논리처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앎의 방식을 세 가지로 말한 바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이 택한 기적이요, 둘째는 헬라인이 택한 지혜이며, 셋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고전 1:22-23) 이 셋 가운데, 기적이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기적과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적 믿음이 지닌 고유한 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이나 능력과는 다른 믿음의 지식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주목했기에 감추어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가시는 은총의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 예언자 이사야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는 말라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가 숨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창조절에 우리가 묵상해 볼 성서 주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새 삶을 지어가는 욥의 이야기를 먼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욥이 겪은 존재의 시간 / 욥기 381~7]

욥기는 파괴된 삶 속에서 신의 궁극적인 답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대화형식으로 그립니다. 먼저 세 친구가 불행에 빠진 욥을 찾아와서 위로하다가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여러 가지 논리로 설명하지만,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욥을 떠납니다. 욥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해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세 친구와 논쟁을 마친 다음에는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등장하여 욥의 고난에 대해 길게 설명합니다. 그의 치밀하고 매끈한 설명 역시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고난에 휘말린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엘리후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침묵을 깨뜨리고 등장한 하나님은 욥의 고통을 해명해 줄 수 있을까요? 2절은 보면, 느닷없이 나타난 하나님이 욥을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 번역은 오해를 나을 수 있어서,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무지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욥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진리에 관한 갈망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침묵을 깨뜨리고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육박해오는 진리의 시간은 자기가 깨지고, 자기 한계와 최면에서 벗어나는 때입니다. 그것이 만만치 않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시간은 밝은 대낮처럼 오기보다는 존재를 심연에 빠뜨려서 뒤흔드는 어둠의 시간으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말합니다. 하지만, 파괴된 욥의 고통스런 삶에 대해 속 시원한 해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질문만 잔뜩 던지고 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도, 욥은 자신의 고난이 해명되기보다는 물음만 안게 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무엇이 땅을 잡고 있는지,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는지 아느냐? 하나님의 이 질문은 창조의 시간에 이뤄진 사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물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욥의 갈망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욥의 고난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시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욥에게 해야 했던 말은, 내가 사탄하고 내기하느라 네가 고통당했으니 참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나도 복잡한 인간사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잘 살라고 변명이라도 했으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속하게도 답은 주지 않고, 질문만 잔뜩 던지고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이렇게 욥을 미궁에 빠뜨리고 있는데, 이것은 욥기의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매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삶의 복잡함과 인생의 신비는 빤한 정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봉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시험당할 때 나타납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마치 자신을 지켜주는 신이 죽어버린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이 죽어버린 듯한 그 절망의 시간에,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가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요, 자기 한계 속에 절대적으로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폭풍을 뚫고 다가와서 묻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욥기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어내는 창조의 시간에 다시 위치시키며 묻습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존재를 새롭게 지어내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을 받은 욥은 자신을 어떻게 지어낼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남겨두겠습니다.

 

[섬김의 삶으로 짓는 세계 / 마가복음 1035~45]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맞게 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도통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가는 이렇게 동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의 고유한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섬기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당돌한 요구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마가는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그 의미조차 모르고 한 우매한 것으로 그립니다.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그것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마실 잔, 그가 받을 세례는 제자들이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열 제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두 사람에게 분개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예수의 이 가르침은 그가 꿈꾸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은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은 우리 안에 깃든 하나님 나라요, 십자가의 참된 의미입니다. 섬김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통로요, 이 세상을 지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섬김의 삶은 이 세상의 질서 너머를 바라보는 충만한 지성이요, 영적 열매입니다. 그 삶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이해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배움 / 히브리서 51~10]

히브리서는 예수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 분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생명의 분투라고 하겠습니다. 생동하는 종교 정신은 영혼의 내면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외부로 육화되며, 개인적 관심을 넘어 사회적 영성으로 확대됩니다. 생동하는 신앙은 영성과 지성의 조화를 이루면서,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의 삶은 정성스러운 믿음이 빚어낸 숨결과 행위요, 고난을 딛고 일어선 영혼이 뜻을 세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몸과 맘의 제사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애타는 마음이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호흡하고자 하는 생명의 간절한 몸짓입니다. 거기에서 진정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이 흘러나옵니다.

고통스러웠던 코로나의 시간도 머잖아 걷힐 것 같습니다. 새로 지어져야 할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이 창조절에 우리는 새로운 믿음과 삶을 구합니다. 그것은 이전에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허물어지는 고통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고난은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더욱 현명하고 자비롭게 이끌기도 하지만, 모질고 이기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더욱 참된 삶을 얻고자 한다면, 더 깊이 묻고, 더 진실하며, 더 관대한 인간의 길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공동체를 향한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요함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모호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추구할만한 것이 있음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사랑이 솟아나고, 섬김의 삶이 기쁘게 지어집니다. 생명 세계를 지어가는 이 섬김의 마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담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께서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서로 섬기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창조절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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