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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바로 당신의 이야기"ㅣ김정원ㅣ2021-10-31

by 나비정원 posted Oct 31, 2021 Views 22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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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0-31

<“바로 당신의 이야기”>

 

(시편 119, 룻기 1:1~18, 히브리서 9:11~14, 마가복음서 12:28~34)

 

유튜브에서 제 설교를 찾아 들은 저희 어머니께서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뭔 설교가 그리 어렵냐.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다. 읽는 게 아니고 듣는 건데, 좀 술술 들리게 할 수는 없겠냐사실 저는 제 하늘뜻펴기가 꽤나 재미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엄마의 충고는 적잖은 충격이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제가 세미나하는 공간에서 제 설교문을 피드백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거기에는 저명한 구약학자, 조직신학자, 민중신학자, 여성신학자분들이 함께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피드백 역시 듣기에 쉽지 않다. 어렵다였습니다. 문제는 세 개의 본문을 2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풀어내려고 한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의 본문에 집중을 할라 치면, 바로 다음 본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가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 역시 성서일과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저처럼 두 달에 한 번 하늘뜻펴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간 여러 만남과 경험을 통해 사유의 역동이 일어났을 터인데 그것들을 성서일과에 끼어 맞추다 보니, 교인들의 삶의 자리가 적게 부각되어 덜 흥미롭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정의주일혹은 창조절에 맞게 짜여진 성서일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성서일과를 그에 맞춰 바꿔야할 것인데, 그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달콤한 피드백은 아니었지만,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선생이 되시는 분들의 피드백을 담아보려 노력하였는데요. 오늘의 하늘뜻펴기가 조금은 잘~들리고, 보다 재미지기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개의 본문 중 룻기의 말씀만을 가지고 하늘뜻을 펼쳐보려 합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제 사유의 역동과 오늘 룻기의 말씀이 딱 맞아떨어졌답니다. 그렇다면 제 사유의 역동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바로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맞아요, 제 정동은, 저의 다이나믹은 바로 제가 만난 그대들에게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첫 번째 당신은 누구일까요? (그림1,2-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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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영선 님입니다. 참고로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시는 저의 당신들을 교회의 직분이 아닌, 한 인간, 한 여성, 저의 당신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얼마 전 출판한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단전에서부터 힘이 차올라 퍽 많이 미소지었답니다. 한 대목을 읽어드리자면, “저는 이제 다시 혼자가 되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찬란한 노년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더라도 십 년 후면 놀라운 변화가 여러분 인생에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저는 제가 바로 그 승리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고 믿고 있습니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두들 고맙다, 안녕! , 내가 두고 가는 세상도 안녕!” 세상을 떠나며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안녕이라는 말이 이토록 청량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던가요! 80이 넘은 노인의 당당함이 노년의 삶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이어서 저의 두 번째 당신을 소개합니다.

사진작가, 박영숙 님과 그의 사진 속 주인공들입니다. 잠깐 사진을 볼까요?(사진 3,4-박영숙)

 

그림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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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사진은 소현세자빈 강씨’, 두 번째 사진은 나혜석을 재현한 것입니다. 아마도 작품이 익숙한 교우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작품은 미친년 프로젝트 중, 2003년에 발표되었던 화폐개혁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사진들입니다. 작가 박영숙은 왜 이들을 미친년이라고 칭했고, 왜 그들을 화폐 속으로 소환하였을까요? 작가는, 남성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거나 남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사회적으로 미친년이라 불리었던 그들이야말로 진보적 여성이었다고 말합니다. 소외, 말살, 은폐로 묻혀버린 여성들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호명하며, 남성들이 주인공인 혹은 현모양처가 자리 잡은 화폐의 인물을 개혁하고자, 역사에서 미친년이라 일컬어진 인물들을 화폐 속에 주인공으로 다시 불러온 것입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대체 얼마나 미쳤었고, 얼마나 급진적이었을까요? 소현세자빈 강씨는 심양에서 만 8년 동안 볼모로 잡혀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뛰어난 경영능력과 리더십으로 무역과 대농장 경영을 통하여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 재물로 노예로 있던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시켜 농사꾼으로 고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재물을 바탕으로 소현세자는 청의 고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강씨의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귀국한 후에는 되레 그 능력으로 인해 역모로 몰려 폐출되고 사사되었습니다.

 

 

 나혜석의 삶 역시 만만치 않았지요.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글, 그림, 시 등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근대여성으로, 여성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한 그야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였습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연애론을 주장하며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과 가정폭력을 일삼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무려 80여 년 전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의 차별과 모순을 비판하였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였고, 화랑에서도 그의 그림을 냉대했으며,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어디서도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있는 예술가라기보다 그저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모성의 역할을 하찮게 여긴’, ‘정조를 팽개친부도덕한 신여성일 뿐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페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은 무연고자 병동의 한 여성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모시는 저의 당신은, 시대의 풍파에 꺾이지 않고 끝까지 삶을 살아낸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들입니다. 혹시 주변에서 종갓집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바로 얼마 전, 우리 장여분들과 커피 한 잔 나누었는데요. 그때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경북의 한 마을에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갔던 한 어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루에도 밥상을 열 번을 넘게 차려야했고,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어, 떡을 종류별로 착착착 빚어 수많은 제사상에 올려야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장례 때마다 상여를 꾸밀 꽃을 일일이 손으로 만든 이야기, 기름 대신 모래에다가 한과를 튀기는 이야기까지, 가슴이 먹먹해져서 듣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자식들이 너무나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차라리 도망가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나도 도망가야겠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못살겠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아부지 들어오시면, 허락받고 내가 도망가겠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 밖에도,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자식을 둘이나 두고 남편이 돌아가시자, 살림만 하던 엄마가 풍파에 굴하지 않고 생활전선에 나서 두 아들을 키워낸 이야기, 이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소설 토지를 다시 읽으며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 이 모든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모시는 저의 당신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계속 말해져야 하고, 계속 복원되어야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할 소중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역사 속에서, 아니 오늘날 역시도 주변부 존재들로 제한하고 규정하고 있는 존재들을,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이야기들을 오늘 하늘뜻펴기의 한 복판으로 소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소개될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저항과 개혁의 렌즈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오미, , 오르바라고 하는 세 여성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의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남성이 다 죽게 되자 자식이 없던 이들 셋 모두는 과부로 남겨지게 됩니다. 이들은 자녀가 없는 생과부였기에 고대 중동 사회 속에서 주변부에 속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쌍하게 여겨, 두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아이를 낳아 과부의 삶에서 벗어날 것을 명합니다. 오르바는 지체 없이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립니다. 16~17절 말씀을 보면, “어머님,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나의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어머니와 저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고백이지요? 결국 룻은 나오미 곁을 평생 지켰고, “그의 효심을 본 하나님이 룻에게 복을 내려 부잣집에 시집도 가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방의 가난하지만 효심이 지극한 한 며느리가 복을 받아 아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직까지도 많은 교회에서는 가정의 달인 5월이 되면 시어머니에게 충성하는 룻으로 해석될 때가 많고, 한국교회의 이상적인 며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룻기가 소개되곤 합니다. 이렇게 성서를 읽으려 했다면, 제가 앞서 저의 소중한 당신들을 소환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성서를 볼 때, 역사비평학적으로만 봐서는 생동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감과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숨겨진 주체를 찾아내고, 틈새를 공략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다양한 해석의 렌즈이자 상상력입니다. 근대적 사고를 넘어서고 있는 우리에게 주석이란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제시한 제도적 가치를 '누가', '', '무엇을', '어떻게'라는 기준을 가지고 살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이영미).

 

 그간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관계를 고부 관계로만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가부장적 구조 속에 나오미와 룻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소환한 당신들의 자리에서 읽어낸다면, 아주 다르게 읽힐 것 같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둘의 관계를 나이, 세대, 국가, 인종을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편과 아들이 죽자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내팽개쳐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닥쳐올 역경을 함께 감당하기로 결단한 사건으로,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사회적 소외에 정면으로 직면하기 위해 연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이영미). 지극한 효심이나, 가부장제의 수행자가 아닌, 사회적 차별에 대한 저항자들이이었고, ‘끝내 살아낼 것이다!’라는 과감한 모험의 결정체로 본 것입니다.

 

 오늘 저는 가치 없는 여자가 또 다른 가치 없는 여자와 결합하고, 또 그녀를 선택한 사건, 혹은 고난받는 존재와 함께 고난받을 것을 선택하는 또 다른 고난 받는 여성의 이야기로 룻기를 해석해내고 싶습니다. 주변부로 전락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라는 해석이 아닌, ‘주변부로 규정된 사람들이 그 규정을 거부하고, 고난을 선택하여 관계의 새 지평을 연 이야기’, 이렇게 해석해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이 어두워져도 끝까지 글을 써내며 자기결정권한을 잃지 않으려는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대현실에 대항했던 여성들을 위로하고자, 아픈 다리에도 셔터를 누르는 당신이 우리 향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귀한 집 딸이었다가 하루아침 만에 한 집안의 부엌데기가 돼버린, 그렇지만 끝내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어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 없이도 생명을 키워낸 당신, 현실에 굴하지 않고 기어코 학교를 다녔던 당신, 큰 배움 없이도 살림의 지혜로 집안을 밝혔던 당신, 소박데기, 바리데기로 외롭고 고독했지만, 한 평생을 버텨온 무명의 살림꾼인 당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시대에 저항하며 길거리에서 죽어간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선택했듯, 당신들이 선택한 고난이 생명을 키워냈습니다.

 

 

 오늘은 교회개혁주일입니다. 개혁은 오늘 이 자리에 소환된 존재들처럼 고난을 선택할 때 가능합니다. 그간의 해석과 사고로는 개혁의 열매를 맛볼 수 없습니다. 찢긴 존재, 경계인, 불순분자와 같이 주변부의 존재들과 연대할 때 개혁의 길은 펼쳐질 수 있습니다.

 

 최영선 작가의 말처럼, 우리 향린이 10년이 흐른 뒤에 전 세대 속에서 자긍심을 가진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간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듭 재해석 되어야합니다. 그 재해석으로 인한 틈과 균열을 묵묵히 수용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지금껏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것을 침투해 올 때, 그것을 계속해서 빨아들일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항의 렌즈와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소개된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가 제 삶에, 여러분들의 삶에, 그리고 우리 교회의 진보 속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합니다.)

 

 

 

<파송사>

지금-여기에 당신들과 당신들의 이야기가 있으니,

성서해석의 자리가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자리 역시 새롭게 해석됩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을 선택하며, 생명과 개혁의 길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당신이 되고, 당신이 곧 우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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