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 생명 치유 회복 (사 62:1-5, 고전 12:1-11, 요 2:1-11)
2022.01.16. 주현절2. 여신도회주일
향린교회는 내 모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1971년 안병무교수님의 부름으로 신학교 3학년 때 와서 어린이교회학교를 시작하였고, 1987년 독일로 공부하러 가기까지 16년을 향린교회에 몸담았습니다. 독일에서 돌아와 남편과 같이 창신동 산동네 빈민촌에 있는 청암교회에서 민중목회를 시작해 향린을 떠났습니다. 어린이주일학교 제자였던 김지원목사가 제 후임으로 청암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것도 향린이 맺어준 인연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 특별히 향린교회 여신도회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 다녀간 지원을 해주셔서 이 땅의 이주여성들과 함께 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대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에 있는 장로교가 함께 드리는 여신도주일입니다. 여신도주일은 1937년 총회에서 1월 셋째주일로 제정되었는데, 교회가 복음을 위한 여성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열악한 교회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가부장적인 교회를 평등교회로 바꾸기 위함이며, 여성의 영성을 드높이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기장여신도회는 창립 이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시대가 요청하는 선교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고 추진해 왔습니다. 60년대, 70년대에는 여성인간화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인권선교에 앞장섰습니다. 80년대부터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라는 슬로건으로 생명이 억압되는 이 세상의 문화를 죽임의 문화로 규정하고 생명문화운동, 평화통일운동, 나눔 선교, 연합선교 등을 해 왔습니다. 1990년대에 기독교어버이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어버이 운동은 '생명운동을 교인들의 일상운동'으로, 교인 개개인의 생활 속에 생명운동을 심겠다는 사명으로 전개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와서 그동안 해오던 생명문화, 통일, 인권, 나눔 등 모든 선교활동을 “생명선교”로 통합하고 실천방법으로 ‘기독교어버이운동’을 통해 이를 저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을 벌이면서 놓치지 않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평등공동체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위대인 교회가 먼저 평등해야 세상을 공의로운 세상으로 만들 수 있고,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와도 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다!”하신 그 세계로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동은 비단 여신도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장여성들(여신도회, 여교역자회, 여장로회, 한신여학생회)이 연대하여 함께 하고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기장 여성들은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에 서 있으며, 기장 여성들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가 많이 변화고 있습니다.
오늘 여신도 주일 하늘 뜻 나누기 주제는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생명-치유-회복”입니다. 이 주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2022년의 과제로 정한 것을 우리 교단이 받아 일 년 동안 기장 교회들이 걸어 갈 주제로 삼은 것이고, 이를 기장 여신도회가 이어 받은 것입니다. 기장 여신도들이 이 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상처받은 이 세계를 어떻게 치유할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고 참 좋았다 하신 그 세계로 회복할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삶으로 실천하겠다는 결단이 녹아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62장 1-5, 고린도전서 12:1-11, 요한복음 2:1-11절의 말씀은 생명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공동선을 회복하라는 분명한 음성을 들려줍니다. 처음 읽은 이사야서 본문은 바벨론 유배기에 쓰인 것으로서 공의와 회복이 그 주제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에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결과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다”(59:1-14) 고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이렇게 탄식하는 소리가 실려 있습니다.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며, 밝음을 바라나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58:11).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결과 공평이 없어졌다는 유다백성의 고백, 공평 없는 공동체를 보며 탄식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슬퍼하고 공평을 이룰 중재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던 하나님이 마침내 나섭니다. 62:1절의 말씀, “시온의 공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가지 쉬지 않겠다.” 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의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공의, 즉 공평과 정의가 빛으로 나타나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상징은 ‘신부’라는 새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시고, 유다는 그 새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새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새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새로운 자리에 놓인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버림받은 자’에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여인’으로, ‘버림받은 아내에서’ ‘결혼한 여인’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는 생존의 위기에 내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버림받은 아내가 ‘좋아하는 아내, 반기는 아내’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삶의 자리가 회복되는, 그야말로 구원입니다. 반평생 여성운동을 해온 제 눈에는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이 너를 반기신다.” 이 구절이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남녀 간에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버림받은 자, 버림받은 아내가 아니라 좋아하는 여인, 반기는 아내라는 이 관계는 호세아서 2: 19-20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나옵니다. 아내 고멜이 산당 제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음란한 여인이라고 내쫓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의 이름도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다,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붙였던 호세아는 아내가 침묵하다가 집을 나가자 돌이켜 변화합니다. 죽음의 아골 평원이 희망의 문이 되는 상징으로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너를 영원한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호세아 2:19)”
남녀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표징입니다. 요새 정치계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일고 있는데, 남녀 사이의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본문 역시 공의와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은사 때문에 혼란을 빚고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고전12:7) 강조하면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가 있다, 방언, 치유, 기적, 예언 등 은사의 종류도 다르고 일의 성과도 다르지만 그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은사의 종류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비단 이런 은사만이 아니라 교회에 여러 직책이 있는 것 역시 섬기기 위해 있는 것이지, 누가 더 높으냐,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성직주의, 성차별 등의 위계질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성, 공동선에 방해가 됩니다. 향린교회는 오래전부터 교회의 교권주의를 배척하고 평등교회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령의 은사라고 봅니다.
세 번 째 읽은 말씀 요한복음 2:1-11은 가나의 혼인잔치이야기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예수의 첫 기적이야기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예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생명-치유-회복’ 이라는 오늘의 주제와 연결하여 보고자 합니다.
문맹(文盲)은 동정 받아 마땅하고
컴맹(Com 盲) 은 도움 받아 마땅하나
환맹(環盲)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파괴하는 자,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다 쓰는 자,
오늘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신의 발밑을 허무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박노해 시인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시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을 이렇게 지탄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 많은 통찰을 주는 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참 좋은 세계로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으로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세계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해서, 인간과 더불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생태계가 파괴되어 갑니다. 기후변화, 난민, 빈곤, 가아, 전쟁 등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라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사슬고리다. 박노해 시인이 지적했듯이 오늘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 자녀들이 미래에 쓸 자산을 당겨쓰면서 지구 생태계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구촌이 아니라 나 중심 이기주의가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촌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물질만능의 세상풍조에 휩쓸려서 성공과 번영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인들 역시 편리함과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통해서 지구의 환경파괴에 일조합니다. 그로 인해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19절에서 탄식했듯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줍니다.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진 것을 발견하다-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자.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잔치 집에는 잔치를 잔치답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포도주였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님으로 온 마리아는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손님으로 그냥 대접받는 위치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집에 관심을 갖고 구석구석을 살폈기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느라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모르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가 타성에 젖어 정신없이 성장주의, 개교회주의, 물량주의에 빠져 흥청거리다 보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무엇인가를 상실할 날이 오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온 손님처럼 그냥 방관자로만 있으면 우리 공동체에 꼭 필요한 그 무엇이 떨어져도 우리는 모르게 됩니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역할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노라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때를 촉진시키다-불가능을 가능케 하자
문제가 발견되면 대안 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그 대안을 예수에게 찾습니다.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립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는 싸늘하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 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지만, 나는 여기 예수의 태도에서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반응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보개 됩니다.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에 흥이 깨지는데, 공동체의 윤활유가 떨어져 공동체가 삭막해지는데 상관없다고 합니다. 내 이익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 나서지 않겠다고 합니다. 공동체에 대해 이러한 무관심이 공동체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흐르게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이릅니다. 결국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대안이 찾아졌습니다. 비록 예수는 자기 때가 아직 안되었다고 했지만, 마리아는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 공동체가 위기에 빠진 바로 그때가 때”라고 인식했습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는데 언제 준비된 사람만 나설 수 있겠는가? 비록 준비가 안 되었어도 공동체의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 마리아의 입장이었고, 그 결과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때가 안 되어 불가능하다는 예수를 떠밀어 때를 촉진하도록 하였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행하게 만들었다. 우리도 공동체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 등을 떠밀어서,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발뺌을 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힘을 발휘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3. 빈 항아리-죽임의 문화를 걷어 내라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받은 예수는 하인들에게 돌로 만든 큰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이 물 항아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비어있는 항아리였습니다. 비어있는 항아리라야 물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항아리에 담겨있던 묵은 것들, 썩은 것들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구시대적인 것들, 죽은 것들을 쏟아낸 빈 항아리가 아니면, 새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어떤 것을 들어내야 할까요?
저는 오늘 우리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가부장 문화와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성장주의라고 봅니다. 가부장 문화란 단순히 남녀의 지배질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아버지들이 가진 힘을 정점으로 놓고 그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하고 다스리는 질서를 의미합니다. 가부장문화는 이 세상의 권위를 “남성/여성, 인간/자연, 백인/유색인종/가진 자/가난한 자”라는 구조로 구분해 놓고 이것을 다시 자연-여성-남성이라는 피라미드 질서를 만듭니다. 위계질서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폭력이 수반됩니다. 전쟁, 테러리즘, 성폭력, 가정폭력이 다 여기서 파생됩니다. 가부장문화는 본질적으로 폭력문화요, 죽임의 문화로서, 들어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본과 상품이 인간보다 더 우위에 있는 문화입니다. 물질이 가치의 척도가 되고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느냐에 사람의 가치가 매겨집니다. 인간이 상품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은 상품의 노예가 되어 주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이런 소비문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서의 가치만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상품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 사람의 능력이 상품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가받습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소유하는 삶의 양식만 있고 존재를 위한 삶의 양식은 없습니다. 더 많이 갖고 더 쓰고 더 편리하게 살려는 것이 인간의 삶의 양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요, 이는 결국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펜데믹 현상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한국 교회 역시 비판을 면할 길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문화 역시 가부장문화와 소비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구조는 남성에 의해 독점되는 가부장문화에, 물질이 가치의 척도가 되어 성장위주의 개 교회주의가 대세입니다. 교회의 방향이 수 불리기와 교회의 대형화로 이어지고 교회를 상품화하고 있는 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가부장 문화와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소비문화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쌍둥이로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죽임의 문화입니다. 이 죽임의 문화를 걷어내고 그 곳에 새로운 문화로 채워야 합니다. 그 새 문화는 무엇인가요?
4.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생명적인 것으로 채우자
예수는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물이라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 몸의 70%가 물이며, 인간은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또한 물은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삭이 평화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도 생존의 근원인 우물을 양보하며 다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적이고 깨끗한 영성으로 거듭나야 함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영생에 대한 진리,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에 대한 대화를 나눈 곳은 우물가였으며, 요한계시록에는 새로운 세계를 생명수가 흐르는 강으로 비유함으로 물이 갖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상징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생명적인 것이 있어야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국 죽임의 항아리를 비우고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은 생명의 문화인 것이다.
5. 떠다 주어라-살림의 문화를 퍼 나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자 예수는 일꾼들에게 “이제는 떠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어라” 하고 말합니다. 일꾼들이 그대로 하여서 질 높아진 포도주로 인해 잔치는 새로운 흥을 더하게 됩니다. 아무리 항아리에 새로운 포도주가 가득 찼어도, 떠서 나르는 사람이 없으면 그 포도주는 잔칫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퍼서 나르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항아리는 새것으로 채웠는데, 떠서 나르는 일꾼들이 부족해서 새로운 포도주는 여전히 항아리에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생명문화를 퍼 나르는 일꾼이 됩시다. 반생명적인 삶의 양식을 갖고는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살림의 문화를 추구하는 생활양식, 생명의 문화를 퍼 나르는 길만이 우리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생명문화를 퍼 나르는 일꾼이 된다면 이 세상은 처음 포도주보다 더 좋은 기적의 포도주 같은 맛이 나는, 그런 세상이 될 것입니다.
코로나 19 펜데믹 앞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일상의 삶이 파괴되는 현실 앞에서 절망 내지 깊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과 탄식 앞에서 우리는 다르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둠이 어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후에 빛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월터 부르그만 교수는 이 당혹스러운 슬픔․ 불안․ 상실․ 불확실성의 시대 앞에서 곧 다시 춤추게 될 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패배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분의 신실한 백성들의 삶 또한 그럴 것이라고, 침묵은 어둠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침묵을 이기실 것을, 생명의 주님이 이기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죽음을 부활로 이끌어내신 그 생명의 하나님이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속에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연대선상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공의 없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피조물들의 탄식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기 위해서 나설 때입니다. 마리아가 가진 때를 촉진하는 영성,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영성으로 펜데믹 위기를 지구공동체를 생명적인 것으로 바꾸는 기회로 삼읍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디 있느냐? 공의를 세울 중재자가 어디 있느냐, 울부짖는 피조물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공의를 세우는 중재자가 됩시다. 마리아처럼 우리가 중재자가 되어 구원의 횃불을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 이 세상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읍시다. 그럴 때 상처 입은 지구의 생명이 치유, 회복되고 어두움 후에 빛이 오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미래 없는 탄식이, 탄식 없는 미래로 인도되며,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가 올 것이다.
함께 묵상합시다.
우리는 사람들을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우리 아닌 사람들로 구분하고,
남성을 남성 아닌 성보다 선호하고,
이성애자와 이성애자 아닌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이제야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특권의 구조물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웃이 처한 상황의 실상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바이러스 한가운데서,
우리 아닌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취약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혼란과 상실감과 심각한 불편을 감지합니다.
우리의 일부는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던 옛날의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다른 길로 보냅니다.
우리는 이전과 다르게 살며, 서로 신뢰를 나눌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는 우리를 극도로 긴장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임을 알기에,
아쉬움은 있지만 그것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으며,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월터 부르그만의 ‘새로운 정상의 가장 자리에서’ 발췌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