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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새해의 소망, 사랑으로 l 김지목 l 2022-01-30

by 김지목 posted Jan 31, 2022 Views 15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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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1-30

 

새해의 소망, 사랑으로(렘 1:4-10  고전 13:1-13  눅 4:21-30)

2022.01.30. 주현절4/설주일 

 

 

오늘 우리는 설 주일로 지키면서 신앙으로 올해 임인년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흐르는 대로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주기에 기점을 잡고 순환의 시작과 끝을 구분해서 우리는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자연의 시간은 순환입니다. 태양도 수명이 있어서 언젠가 소멸한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태양계 안에 있는 우리의 관점일 뿐, 은하계 관점에서는 마치 해가 떴다가 지는 것과 같은 순환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끝이 있는 짧은 직선입니다. 사실 처음과 끝의 시점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우리의 짧은 직선이 어떤 순환의 일부일는지 모를 일이지만, 새로운 다짐으로 유한한 시간을 유의미하게 채워나가기 위해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합니다. 새해 인사도 새로운 다짐을 상기시키기 위한 인류의 오랜 습관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해마다 두 번씩 인사를 나눕니다. 음력 설이 명절이기 때문일까요? 서양력 11일보다 설에 나누는 새해인사가 더 마음이 담기고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11일 새해인사가 불필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이 큰 의미로 채워지는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하는 새해인사와 덕담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환기시켜주고, 희망의 세계로 초대해 줍니다.

 

설 주일인 오늘 저는, 올해 여러분과 우리 공동체의 소망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시간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가치일 것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의 유한한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나가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시간을 채울 최고의 가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2성서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랑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묵상하면서, 임인년 새해, 우리의 시간을 사랑으로 채우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송가로 익히 불렀던 고린도전서의 사랑장()은 더없이 낭만적인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4,7) 산문시로 작성되었기에 사랑에 대한 묘사가 더욱 고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편지라는 점을 감안하고 그 내막을 들춰본다면 이 사랑은 낭만적으로만, 고상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습득해야 할, 다만 윤리적 기술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란 신앙인이 채우면 좋을 어떤 기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편지를 보낸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사랑은 신앙의 수단이 아니라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고상한 낭만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본질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속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사도 바울의 심정에 잠시 다녀와 보겠습니다.

 

고린도는 제국 로마가 지방의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무역의 거점으로 만든 전략적 신흥도시였습니다. 인구 교통이 활발했고 다양한 문화권이 한 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문화변동이 일었던 곳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웠는데 이 공동체에 대한 그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공동체에 분란이 생겼습니다. 분란의 핵심은 당시 성행하던 종교적 철학담론이었던 영지주의였습니다. 보다 명확하게는 극단적인 영지주의 사상의 유입이 문제였습니다. 영적 지식을 강조하면서 신비주의적 체험과 광적인 신앙이 공동체를 지배했습니다. 입신 상태에서 말을 하는 방언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소수의 권력이 형성되었습니다. 방언과 같은 신비한 종교체험을 얻기 위해 사회생활을 등지고 육체를 자해하는 금욕 행태가 남발했습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그것은 불순한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훼손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성만찬 예식의 참다운 의미를 훼손하는 고린도교회 내 권력체계를 비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암시하는 방언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유의미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열광적인 종교체험을 숭배하는 신앙행태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을 파괴하는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바울은 악령에 의한 분란으로 보았습니다. 권력을 집중시키는 열광적 신비주의를 해체하고 서로 성령의 은사를 소통할 수 있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교다운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해서 더 큰 은사를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12장 마지막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를 뛰어넘는 더 큰 은사, 그것이 바로 오늘 13장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에는 악령에 오염된 고린도 공동체에 대한 염려가 가득합니다. 13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에서, ‘사람의 모든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영지주의 사상에 통달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천사의 말은 방언을 의미합니다. 즉 영적인 지식에 통달하고 방언을 하는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이라며,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든 종교행위는 전부 거짓이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번역된 꽹과리의 원어적 의미는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갑옷과 투구같은 청동 금속을 뜻하고, 그렇게 소리내는 이교도적인 신앙행태를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모든 현란한 말과 방언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런 신앙은 거짓이다! 라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바울의 모습에서 제1성서에서의 예언자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바울의 이같은 심정은,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논지로 3절까지 이어집니다.

 

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은 은사 중의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랑, 모든 은사들을 진정한 은사가 되게 하는 것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묘사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고 하는 요한복음서와 요한의 서신서의 증언을 덧대어, 4절부터 7절까지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으로 바꾸어 읽어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랑은 사실 구해야 할 어떤 것이라기보다 닮아야 하는 것이 됩니다. 구할 수 있는 것은 소유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닮는 것은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자체를 투신해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은사들과 구별하여 사랑을 더 큰 은사로 지칭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4(“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을 이렇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 “오래 참으시고도 신실하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닮는 것이 사랑입니다.” 5(“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원한을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닮음으로써 사랑을 훈련합니다.” 6(“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처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7(“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모든 것을 견디는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비롯되는 곳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랑이 나옵니다.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행위라면 그것은 필히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거짓인데, 그런 거짓을 이길 수 있는 힘 또한 사랑입니다. 4절에서 7절 구절이 산문시로 담담하게 써있지만, 모든 거짓을 이겨낼 사랑에 대한 확신이 느껴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는 노력으로 거짓은 극복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13절까지에서는 사랑이 영원한 것임을 설명합니다. 은사 중에서 예언은 성취될 때 더 이상 예언이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과 비밀스런 대화라고 하는 방언은 하나님과 만날 때 더 이상 비밀스럽지 않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은사들을 일컬어 부분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궁극적인 것입니다. 사랑을 성취하면 그 사랑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 진정한 사랑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더욱 온전해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신앙인이 구해야 할 은사 중에 으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3장은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고, 사랑으로 거짓은 극복되며, 사랑은 영원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노래에는, 사도 바울의 애절함이 담겨 있고,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의 희망이 노래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사랑을 통한 신앙의 완성 또한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 그것은 구원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며, 신앙의 완성을 위하여 추구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인년 새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에 사랑을 채우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임을 기억하고 이를 위하여 하루하루 기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종교의 외피를 하나씩 벗겨낸다면 마지막에 남을 알짬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약동하지 않으면 그 위에 덧입혀진 외피는 형식주의이며 우리 삶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그 본질을 발현해내지 못한다면 거짓된 신앙으로 오히려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사도 바울의 절절한 권면이 올 한 해 우리들의 삶을 가꾸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사회선교를 주체적으로 활발하게 감당하고 있는 청년 사회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옥바라지 선교센터>입니다. “쫓겨나는 이들 곁에 십자가를 세우고 쫓겨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쫓겨난 이웃들과 함께 거리기도회를 하며 헌신하는 선교단체입니다. 여기 센터에서 만든 노래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회선교 신앙고백을 담아 거리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중에 사랑이 이긴다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 일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이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혐오도 사랑이 이긴다

평화가 이긴다 평화가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폭력도 평화가 이긴다

정의가 이긴다 정의가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현실도 정의가 이긴다

모든 걸 내려놓고 생명을 바라보자 숭고한 그길을 따라가는 우리의 사랑이 이긴다

 

고린도전서 134절에서 7절에서 느껴지는 사도 바울의 사랑이 이긴다는 확신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절망이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이길 수 있다는, 보다 분명하게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명절 연휴 지나면 지지율 경쟁이 더 심해지겠지요. 혹세무민하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선제타격론으로 한반도를 전쟁국면으로 몰아가는 후보도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이런 후보들 그리고 그 지지층들과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더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 역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가 날로 더욱 사랑을 확인하며 그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익숙했던 것들을 재고해보고 새로운 교회당에서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 없으면 그 어떤 시도도 소용이 없고 우리 모두에게 아무런 이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사랑들을 모아 광화문 시대를 열어나가는 향린 공동체 되도록, 사랑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삶에 사랑을 채워나가는 우리의 여정 위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현현하시고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영원한 사랑에 이르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을 신앙생활의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은 마치 복음을 율법으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기를, 위하여 노력합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공동체가 사랑의 띠로 연결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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