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렘 17:5~10, 고전 15:12~20, 눅 6:17~26)
2022.02.13. 주현절 6.
[방향, 주를 의지하라! / 예레미야서 17장 5~10절]
오늘 예배를 시작하며 시편 1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시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이 시(詩)는 종교적 삶에 관한 이정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세 가지 사항은 악인의 술수, 죄인의 길, 오만한 자리입니다. 이를 멀리하고, 대신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라고 권합니다.
이 권면을 깊은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존재를 울리는 말씀이 됩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의 가르침으로서는 맹점이 있습니다.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삶의 관계가 복잡해서, 말씀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악인의 술수와 선인의 술수는 그 모양만으로는 구분되지 않으며,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와 실패라는 존재의 한계 경험을 하면서 인생을 지어갑니다. 몇 년 전 <창비>에서 4권으로 구성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0년의 기간을 정치적 사건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통사가 아니라, 당대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보여주면서 현대사를 새롭게 읽습니다. 각 권당 10년씩 그려내는데, 각각 시대를 대표하는 두 가지 생활문화를 책의 부제로 삼고 있습니다. 1권은 1950년대로서, 부제는 <삐라 줍고, 댄스홀 가고>입니다. 2권 1960년대는 <근대화와 군대화>, 7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미니스커트>, 80년대는 <스포츠 공화국과 양념 통닭>입니다. 재미있는 접근법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문화는 당시와 비교할 때 크게 달라져서, 이제는 마치 그런 시대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변화하는 환경에 순응하거나 반대로 일탈과 저항을 거듭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세워간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복합적으로 하면서, 자기 생명을 조화롭게 이끌고 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 과정에서, 풍요에 대한 기준도 바뀌고, 행복의 요인도 변합니다.
그렇다고, 삶이 단지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모종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 방향이 낙관적인 목표를 향하면 현실의 부족은 감내할 만한 것이 되고, 방향 없이 길을 잃으면 충족이 없는 갈증에 시달립니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도 그러합니다. 독재의 시대에도 방향을 지닌 민주적 열망이 있으면 살만하다고 느끼지만, 풍요와 자유가 있어도 방향이 불분명할 때는 불안과 좌절이 깊어집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떤 방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삶의 리듬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합니다. 그 방향에 관한 성찰 밑바닥에 종교가 자리합니다. 시편 말씀도 그런 관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편의 가르침과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본문 예레미야서 17장에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두 가지 삶을 대조합니다. 그 기준은 삶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가느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 즉 ‘사람(mortal)을 의지하고, 육적인 것(flesh)에서 힘을 찾는 삶’을 가리켜, 광야의 가시덤불 같은 삶이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메마른 사막과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복 있는 삶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으로서, 그 삶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잎이 언제나 푸르고, 무더위가 닥치든 가뭄이 심하든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 두 방향은 뚜렷이 대별 되어서 어떤 삶이 더 복된 삶인지 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삶보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부름을 향해 자신을 밀고 가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이 가르침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예레미야가 유의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고 기만적인 것이니, 마음의 동요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그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관찰하고, 행실에 따라 보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 대한 회의나 역사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응시하는 이 예언자가 신비주의에 빠져 역사를 잃어버렸을 리 없고, 인간을 회의하는 염세주의에 빠졌을 리도 없습니다. 민족의 파멸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들려준 하늘의 소리는 ‘육적인 것에서 자신의 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은 삶의 동력을 근원적인 생명력이 있는 곳, 우리 삶에 신성이 잇닿아 있는 곳에서 얻으라는 말일 것입니다.
[방향설정을 위한 대결 / 누가복음 6장 17~26절]
하나님과 잇닿아 있는 곳을 찾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세우는 것은 바람과 달리 쉽지 않습니다. 자기 방향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남의 것을 참고할 수 있지만, 자기 옷이 아니면 불편할 뿐입니다. 자기 정립의 과정에 긴장과 고뇌, 갈등과 대결이 동반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살아있음의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할 긴장과 대결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공동체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복 있는 삶’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그것은 마태 공동체와는 다른 현실을 맞은 누가 공동체의 상황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누가복음 6장은 <평지설교>로 알려집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와 비교하면, 같은 가르침을 주지만, 대조를 통해서 더욱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마태의 <산상설교>는 여덟 가지의 복을 말하지만, 누가의 <평지설교>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의 화를 말합니다.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를 내칠 때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눅 6:20~23)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다.
이렇게 복과 화를 뚜렷하게 대조하여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천 년 전 누가 공동체가 맞은 그 상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거대한 꿈틀거림이 있었고, 그것이 평지설교와 같은 대결 구도를 가진 본문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의 공동체는 무엇을 위해서 대결을 무릅쓰고 있었을까요? 평지설교를 곱씹어보면, 거기에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천둥 같은 비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자만, 배부른 자들의 태만, 웃는 자들의 기만에 맞서, 삶의 진실을 밝히려는 간절함이 예수의 설교를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 우리도 거대한 대결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라는 큰 대결의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역사가 뒤척이고 있습니다. 이번 싸움은 그 대결의 핵심에 가닿아 있기 때문인지 흙탕물이 거셉니다. 수백만 촛불의 꽃으로 아름답게 일어나지 않고, 상처와 흠결을 가진 후보자들의 거친 입을 통해서 대결지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대부분 비슷한 곳을 주목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이가 왕이 되고자 하는 낡은 욕심에 빠져 올바른 방향을 세우기보다는 사람들의 결핍과 분노의 틈바구니를 파고드는 갈등사회의 실질적인 적폐인지를 보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어준 인사권자를 협박하면서, 배은망덕의 모습을 가리고자 언어도단을 일삼는 자가 누구인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민족의 안전과 미래의 풍요를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이율 배반의 약속만 거듭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고 있습니다.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이 땅에서 선제타격이라는 말로 보수세력을 선동하고, 생태적 미래를 말하면서도 원전 건설과 수도권 싸드 배치를 내세우는 모습은 어떠한가요? 인기를 탐한 논리의 순간적 활용만 있을 뿐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자의 모습을 통해서, 이 역사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더욱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방향 없이 길을 잃은 시대라기보다는, 촛불로 세워진 방향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도타운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보수세력의 결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생명력 있게 키워낼 공동체적 힘의 부재에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방향의 실현 /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그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천 년 전 바울의 고민이기도 했는데, 그것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새롭게 형성되는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겪는 고투를 보여줍니다. 예수의 복음을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삶으로 체화하지 못한 공동체가 겪어야만 했던 고투입니다. 미숙한 신앙공동체에 그 사회의 갈등이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로마가 해방 노예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켜 만든 도시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지요. 이곳은 다른 마케도니아 지역과 비교해서, 그 사회적 분위기가 초조한 긴장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분에 집착하고 생존에 경쟁적인 그 사회의 에토스가 ‘원자화된 개인주의’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경미,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 281)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공동체로 모인 고린도 교회도 사분오열의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고전 1:12) 그 갈등의 주된 대립 전선은 아폴로라고 하는 뛰어난 언변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아폴로는 당시 ‘세계의 도서관’으로 알려진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행 18:24)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씨를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라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울파와 아폴로파로 나뉘어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추측하건대, 바울이 떠난 뒤 화려한 언변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파한 아폴로에게 사람들의 마음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불온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는 바울의 ‘종말론적 그리스도론’보다, 세련된 헬레니즘 철학으로 해석된 ‘소피아 그리스도론’에 더 매력을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세련된 주장이 아니라, 믿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동선입니다. 이 두 사상은 예수의 길을 걸으며 얻게 될 ‘복된 삶’에 관한 전망도 달리 봤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먼저 ‘여러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지시하는 생명의 방향에서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변론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모두 멸망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지 교리적 믿음을 배격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지적은 예레미야의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mortal)을 의지하고, 육적인 것(flesh)에서 힘을 찾으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운동을 생동하는 삶의 부활 체험을 통해 전개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라고 하는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거룩한 동력이 작동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그것은 ‘교리로 만들어진 예수’가 아니라, ‘참 사람 예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서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좌절을 안겨준 치명적인 기억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여겨 온 오랜 믿음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두 세대가 흘러가며, 십자가의 비극을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과 언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고문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전체, 소유 전체를 내어줄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로 인해 십자가는 다른 상징이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현존의 상징이요, 우리도 그렇게 살고 존재하도록 촉구하는 상징이 됩니다. (존 S. 스퐁, [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411)
바울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고착되지 말고, 부활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파편화된 삶도 예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연민의 대상입니다. 측은지심의 온도계가 없는 세계는 대립의 길을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영원히 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편을 가르는 일에 열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덫에 걸립니다. 보수의 함정이 가치를 경멸하는 데 있다면, 진보의 함정은 가치를 도구화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나비처럼 날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노력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우리 공동체도 우리 고백처럼, ‘주님이 보여주신 진리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짐’을 믿고, 작은 부활을 이루어가야겠습니다.
기지개를 켜야 할 계절입니다. 정의가 부활하는 정치의 시간이요, 어둠을 물리치는 존재의 시간입니다. 씨앗이 흙을 만나면 새싹이 되듯이, 우리도 새로운 발걸음으로 복 된 길을 걸어갑시다.
침묵으로 기도합니다.
[파송사]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참 사람 예수에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푸른 잎과 열매를 맺으며, 작은 부활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