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사람 (행 11:1-18, 계 21:1-6, 요 13:31-35)
2022.05.15 / 부활절 5, 교회창립69주년기념주일, 5.18기념주일
[신앙공동체를 향한 신학적 질문]
오늘은 교회창립 69주년입니다. 여러모로 광야 생활을 실감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예배당을 새로 짓고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의미심장한 전환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시공사와 내년 5월 10일까지 완공하기로 계약했으니, 70주년 기념 예배는 새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69년간 우리 공동체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를 이끈 정신은 무엇이었나요? 안병무 선생이 좋아하신 성서 구절이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신약성서 학자였던 그분이 복음서에서 혁명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한신대 신학대학원 도서관 입구에 써진 문구입니다. 안선생님은 이 말씀이 하늘과 땅을 가른 모든 이원론적 사상에 대한 철학적 거부요, 금수저와 흙수저를 나누는 모든 지배철학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겼다고 해석합니다.
어쩌면 향린의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 저항정신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스스로 베는 칼이기도 했습니다. 이점을 요한복음 전체로 확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의 전체 골자를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니, 너희도 길과 진리이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돼라.’ 이 가르침은 신앙인에게 모든 용기의 원천이 됩니다. 하지만, 또한 모든 오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일 수 없다’라는 말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쓴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기독교 신학의 고전인데, 거기 담긴 하나님에 관한 방대한 서술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단순성’(divine simplicity)이라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토마스는 신의 특징을 한 마디로 ‘단순하다’(simple)라고 표현했는데요. 그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은 본질(essence)과 실존(existence)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신은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선(善)을 가진 존재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기(omniscience) 때문에 어제의 지혜와 오늘의 지혜가 변함이 없고, 온전히 선하기 때문에 아는 바대로 행하며, 전능(omnipotent)하기에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의 실존은 그분의 본질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유한한 인간은 그 지혜가 변하여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같지 않고, 온전히 선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도 아는 바대로 행하지 않으며,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 삶이 복잡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인간 삶이 복잡한 이유는 그 본질과 실존이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설명도 비슷합니다. 성서는 인간의 본질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삶은 죄에 사로잡혀서, 그 실존이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그것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모든 인간은 분열된 자아를 갖고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에고(ego)는 참 나와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분열된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비극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의 삶, 영생의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미 천국을 맛보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결코 이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행동합니다. 반면, 바울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땅에 사무친 죄악의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번뇌를 말합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합니다. (롬 7:24) 바울은 자기 자아가 분열되어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자기 안에 또 다른 법, ‘죄의 법’이 자신을 포로로 사로잡았다고 고백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 더 생명력 있는 삶,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율법주의자인가요, 바울인가요? 바울처럼 ‘죄악에 사로잡힌 실존’과 그 속에서 ‘분열된 자아’의 실상을 꿰뚫어 본 사람이 더 살아있는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분열된 자아’를 갖고 살아갑니다. 건강한 삶이란 이 분열된 상태를 꿰뚫어 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죽어버린 자아는 오히려 자신의 분열된 상태를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법에 사로잡힌 자기 삶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의 율법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양극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공주의에 몰두하고, 분단체제의 이데올로기인 반북주의에 젖어 있으며, 다양한 모습에 담긴 삶의 축복을 저주하는 배타주의를 당연시하는 것은, 이 세상의 율법에 사로잡혀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이 온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을 ‘법이요, 진리’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은 도덕적 문제라기보다는 실존의 질곡입니다.
반대로, 살아있는 주체는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자각합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은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 앞에서도 여전히 소비 문명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한계를 깨닫고 탄식합니다. 분단체제의 폭력과 증오를 보면서도 평화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삶의 한계를 보며 수치와 절망을 느낍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타고 죄의 율법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요, 그 삶이 죄에 매여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맨날 죄인 타령이나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좀 성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의 굴레를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 17:21)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을 낳은 신앙공동체의 믿음이요,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지난 시기 동안 살아있는 신앙공동체였다면,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자랑할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알면서도, 거기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계속 행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이 발동하는 지점 / 요한복음 13장 31~35절]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그런 행진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지침에 관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에 관한 예수의 새 계명인데, 본문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5)
예수는 율법에 사로잡힌 죽은 삶을 되살리는 길이 ‘사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 삶의 좌표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랑이 천사의 말보다도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사랑은 예언하는 능력이나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나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는 행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가르침에서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계명이 도리어 새 삶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단지 ‘정서의 확장’이 아닙니다. 자기감정이 부풀어 올라 남에게 이르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죄로 굴절된 현실의 질곡을 모른 채 사랑만 뇌까리면 자아도취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믿음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의 세계로 도약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다짐이요, 그 길이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사랑은 기계적 계명이 되고, 공동체의 행진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영원한 진리이지만, 또한 어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맹목적인 사랑은 타인을 파괴하고, 삶의 중층적인 고통을 외면한 사랑은 관계를 질곡으로 빠뜨립니다.
성서 역시 이 사실을 엄중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걸 암시하는 대목이 오늘 요한복음 본문이 시작할 때 나오는 도입 문구입니다. 13장 3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저는 이 문구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왜 요한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 사랑의 새 계명을 얘기하고 있을까? 거기에는 사랑을 빌미로 삼은 도덕적 유혹에 대한 경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앞 장에서 유다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했던 행위를 전합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유다는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낭비하느냐?’ 얼핏 보면, 매우 도덕적인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는 그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두둔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기적인 모습처럼 보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여인의 등골을 빼먹은 사람이요, 유다는 그것을 비판하는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사랑, 삶과 죽음을 꿰뚫는 사랑은 ‘입술의 언어’보다 더 깊은 실체적 진실이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공동체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실행되는 것이며, 새 계명인 사랑은 ‘계명’이라는 요구 자체를 넘어갈 때 가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계명 너머로 건너가는 부활의 사람들 / 사도행전 11장 1~18절]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의 선교보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를 대표하는 마음 뜨거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삶의 경계선에서 늘 마음이 흔들렸고, 스승의 가르침과 배신 사이에서 주저했습니다. 스승이 떠난 후, 예수 운동이 확장될 때도 그는 경계선 위에 있습니다. 바울처럼 이방인을 향한 외향적 활동에 몰두하지도 않고, 야고보처럼 유대인을 위한 내향적 돌봄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는 교회의 선교방식이 부딪치는 접점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경험한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전통주의자들의 문제 제기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서, 베드로의 이방 선교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서, 할례받지 않은 사람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을 증언합니다. 기도 중에 경험한 신비체험과 고넬료의 집에서 본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옛 방식을 버리고, 믿음의 도약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이 유대주의 율법의 경계선을 넘어서 사랑의 모험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한 율법의 계명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윤리적 좌표가 되지만, 때로는 환멸의 지점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정신이 이끄느냐에 따라 ‘계명’은 그 사용법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의 질곡을 이겨내는 무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의 질곡을 가중하는 도구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계명은 현실의 생동력을 죽이는 교조주의적 원칙이었지만, 베드로에게 계명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일 뿐 그것이 예수를 향한 모험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의 계명이든, 예수의 새 계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모험이어야 하며, 거기에 의에 굶주린 사람들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 목마름이 부활의 길로 이끕니다.
[목마른 사람을 위한 생명의 샘물 / 요한계시록 21장 1~6절]
요한계시록은 그 마지막에 예언자 이사야의 비전(65:17)을 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무수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꿈이면서, 동시에 인류를 광기에 빠뜨리는 부질없는 수고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꿈을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는 결코 역사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갖습니다. 성서는 한편으로 이 땅에서 벌이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마저도 육신을 입고 내려올 만큼 종국적인 중요성을 가진 이 세상의 의미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인류의 꿈은 계속됩니다. 환멸이 이는 좌절과 참혹한 실패가 거듭되지만, 그 너머를 향하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 역시 계속 탄생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단지 지독한 삶을 견디는 사람을 위한 위로의 책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책입니다. 어두운 시대 많은 사람이 어린 양처럼 무력하게 죽지만, 또한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될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신실하고 참된 이 말을 기록해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것은 만물이 새로워지는 세계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되, 그 삶의 구성방식을 ‘어린양’과 같이 걸어갈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자기 삶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archē)이요 ‘목적’(telos)으로 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목마른 것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40년도 더 된 광주의 5.18을 기념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폭력으로 시민들을 짓밟을 때, 이름 없는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저항했습니다. 어떤 이는 광주항쟁이 비폭력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된 투쟁이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허약한 사람의 한숨 어린 해석입니다. 광주시민의 무장은 계엄군을 멸절시키려는 단순한 대항폭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폭력이 만연한 곳에서 정치가 소멸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겨난 저항적 폭력이요, 그 안에는 계엄군의 극악한 폭력을 소멸시키려는 ‘반(反)폭력’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광주항쟁은 역사에 대한 사랑이요, ‘민중이 생명을 바쳐 쓴 서사시’입니다. (김정인 외, [너와 나의 5.18], 331~41)
하지만 세월이 흘러,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오늘 우리 사회는 역사에 대한 권태가 퍼져 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현 정부가 탄생한 이유 중 하나이겠지요. 우리는 오늘 광주항쟁을 기념하며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그것은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고자 하는 다짐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주체의 성숙 없이는 제도적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종교에서 신앙의 성숙 없이는 사랑의 요청도 피상적 구호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다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행진이 시작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창립기념주일을 맞으며, 새로운 일꾼으로 장로를 세우는 임직식을 갖습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목마른 믿음의 행진이 우리 공동체에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람을 위한 생명의 샘물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42년 전 광주에서 정의로운 역사를 위해 피 흘린 시민들의 목마름, 69년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행진한 향린 공동체의 목마름, 주님께서 생명의 샘물을 부어주시니, 마시고 힘을 내어 다시 앞으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