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새롭게
(왕하 5:1-14, 갈 6:7-16, 눅 10:1-11, 16-20)
2022.07.03.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1.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올해 목회계획에 실었던 인사를 다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같은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더 많으시겠지요. 저는 어린이부에서 3년째 어린이들과 예배를 드리고, 또 함께 뛰어놀고 있는 이민하입니다.
밝고 힘찬 인사말을 건네드리고 싶지만, 실은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와 당신의 주변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차마 가늠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몇 달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지옥과도 같은 때를 보내고 있는 이들의 시간을 감각할 수 없지요. 다만 기사에 적힌 공습 소식과 사망자 수를 통해 그들의 시간을 전해 들을 따름입니다. 숫자로 죽음을 헤아리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섬뜩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 전,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중단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습니다. 여성의 몸의 권리가 순식간에 49년 전으로 후퇴해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다가올 거대한 고난을, 우리는 차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숫자로도 쳐주지 않는 죽음을 불러올 것입니다. 지금, 절망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몇 주 전, 미션21 청년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스위스에 다녀왔습니다. 청년 프로그램의 목표는 각국 청년들이 국제 청년 네트워크망을 형성하고, 정의, 평화를 위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4개 대륙에서 온 청년들은 2주 동안 타 문화, 타 종교 간의 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역량 강화를 통해 청년들이 자신의 경험과 맥락에 맞는 평화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프로그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청년들이 각자 준비한 몫이 있었습니다. 각국 청년들의 “중대 사안”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서로 배경이 다른 만큼, 청년들이 가져온 사안들은 다양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청년은 공교육의 질과 실업을 중대 사안으로 꼽았습니다. 멕시코의 청년은 여성혐오살해와 낙태권, 퀴어 이슈를 꼽았지요. 인도네시아의 청년은 연령주의와 혐오발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젠더불평등과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약자 혐오를 논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슈들이 서로 동떨어져 있는지요?
제가 매우 어둡고 무거운 프로그램에 다녀왔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서 굉장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만 청년들이 그토록 진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구보다도 변화를 향한 간절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희망”이겠지요. 이십여 명의 청년들은 자신이 경험한 불합리와 정의롭지 못함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마다의 간절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부패한 정권 아래에서, 내가 나로 살 수 없는 곳에서, 전쟁통에서, 그리고 국가가 내 몸을 통제할 때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 참 허황되게 들릴지 모릅니다. 이 엉망진창 세상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찾기 위해 이곳에 계신가요? 우리의 간절함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2. 간절함이 향하는 곳
오늘 열왕기하 본문에는 ‘나아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어느 날부터 피부병을 앓게 됩니다. 이에 나아만의 집에서 시중을 들던 이스라엘 출신 소녀가 사마리아의 한 예언자를 만나 보라는 제안을 하지요.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고,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답변을 얻습니다. 엘리사의 답변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거리가 멀자 나아만은 화를 내며 발길을 돌립니다. 그러다, ‘강에서 몸이나 씻는 일인데 그것쯤 못할 일이 무엇이냐,’는 부하들의 말에 요단강으로 향하지요. 그리고 그의 살결이 깨끗하게 낫습니다.
저는 크게 아파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로서는 낫고자 하는 나아만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을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예상하건대, 나아만의 곤란함은 병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왕의 총애를 받는 강한 용사였습니다. 드높은 명예를 누렸을 테지요. 그런 용사에게 피부병이라니요? 질병은 나아만의 권세를 깎아내렸을 겁니다. 피부에 드러나는 질병이니 혐오스러운 눈길도 받았겠지요.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제법 의외입니다. 타국에서 잡혀 온 시종의 제안이라도 받아들일 만큼, 나아만은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스라엘로, 그리고 엘리사에게 갈 때, 나아만은 머리가 복잡했을 겁니다. “정말로 나을 수 있는 걸까?” “믿어도 되는 걸까?” “이 예언자라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고쳐줄까?” 그렇게 기대와 걱정을 품고 엘리사의 집 앞에 갔을 때, 나아만의 예상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엘리사가 심부름꾼을 시켜 나아만에게 낫는 방도를 알려준 것이지요. 나아만은 직접 나와 자신을 정중히 맞이하지 않은 엘리사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기도를 해주지 않은 엘리사에게 화가 납니다.
이러한 나아만의 행동은 황당하게 보입니다. 분을 내는 나아만의 모습은 그가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는지를 우리가 묻게 만들지요. 그러나 이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나아만의 간절함이 ‘얼마나 충분했는지’보다 그의 간절함이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묻게 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따지고 싶었던 것은 엘리사의 태도와 방식이었습니다. 고작 이스라엘의 예언가가 시리아의 장군인 자신에게 ‘정중하게’ 굴지 않은 것에, ‘그럴 듯한 의식’을 치르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것이지요. 나아만의 간절함은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향해 있었습니다. 병이 낫고 ‘새로워지는 것’보다 자신의 위치가 더욱 앞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부하들의 소리가 그에게 들려옵니다.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병에서 해방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후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엘리사의 종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지요. 이 사건이 놀라운 이유는 단순히 나아만이 병에서 나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권력을 누리고 또 그것을 유지하려는 나아만의 집착이 ‘생명’을 향하는 간절함으로 변화된 것,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의 기적입니다.
나아만은 생명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 기적의, 변화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의 이야기에는 누구나 듣고 흘려버릴 법한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소녀의 목소리와 부하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아만은 주변부로 치부되는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귀 기울임 몇 번이 나아만의 병을 치유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고 바꿔놓았습니다. 고작 ‘귀 기울이는 것’이 말입니다.
고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귀 기울이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경청하는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지요. 스위스에서 지낸 2주 동안 경험한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안전한 공간’이라고 느꼈다는 점입니다. 4개 대륙에서 모인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같은 경험과 관점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요. 국가, 교단, 신학적 배경까지 모조리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떻게 그 공간이 안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곳에 존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고민과 아픔, 신앙을 이야기하더라도 비난받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우선은 들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물론 불편한 경험 역시 있었습니다. 여성이나 퀴어 이슈를 접한 경험이 없었던 청년들의 말과 행동은 저를 포함한 여럿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청년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어려움을 마주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느낀 감정과 해당 이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서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비난을 뒤로 하고 말입니다. 프로그램 담당자분들이 준비한 젠더폭력 워크샵과 LGBTQI+ 워크샵, 다시 말해 성소수자 워크샵 또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든 청년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프로그램 말미에 청년들이 서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 것을 기억합니다. 서로의 간절함에 관심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은 지식에 국한된 배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태도와 포용, 함께 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서로를 듣고자 할 때, 우리의 간절함은 방향을 바꿔 다양한 곳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렇게 나와 당신의 간절함이 맞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취약성과 새로운 창조
2주 간의 일정 중 굉장히 중요한 회의인 Mission 21의 Synod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는 대륙별로 세 명의 이사진이 참가합니다. 의장과 여성 코디네이터, 그리고 청년 코디네이터가 회의에 참여하지요. 그리고 청년 대표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들 역시 이곳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체 총회와도 같은 이 회의에서는 그 해 중대 사안에 대한 발제를 하고, 대륙별로 연간 리포트를 제출하고, 또 회계 감사를 하는 등 많은 일을 진행합니다.
Mission Synod에서 중대 사안에 대한 발제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지요. 발제의 주제 중 하나는 신성과 인간의 취약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치유와 위안이었습니다. 발제자 중 한 명인 아프리카의 청년은 자신의 발제에서 취약성의 ‘힘’을 이야기했습니다. 흔히 취약함이라고 하면 연약한 상태, 약점 등을 떠올리곤 합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취약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회피하거나, 그 위에 ‘능력’과 ‘힘’이라는 가면을 덧씌워 방어적으로 굴곤 합니다. 취약성이 불러일으키는 고난을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요. 고난을 직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을 구할지 알지 못하면 듣지도 못하겠지요. 이것을 깨달을 때, 약점으로 취급받았던 취약성이 실은 ‘다른 생명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힘’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에는 갈라디아 교회가 겪는 분란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 갈등의 핵심에는 이방인 신자들을 상대로 유대의 의식, 특히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순진하게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신도들이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이것을 과연 ‘고난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동료 신자가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 취약성 위에 가면을 덧씌우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는 이들을 비판한 후 예수의 십자가를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갈 6:14) 예수는 취약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 역시 ‘온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행보는, 예수의 삶은 비틀거리고, 불안하며, 불온하기까지 한 위반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약하다고 이르지 않지요. 십자가 위에서 그 무엇보다 취약하게 꺼져간 생명은 후에 부활로 다시 깨어납니다.
그렇기에 바울에게 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간절함이 연결될 때, 당신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무시하던 취약성입니다. 우리의 취약함은 서로를 듣게 합니다. 우리의 취약함은 서로의 삶을 연결하는 힘입니다. 그렇기에 취약함은 결코 나의 할례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저 거대한 고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취약성은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품도록 우리를 독려합니다.
취약성이라는 단어는 ‘개방됨’, ‘노출된 상태’라는 의미와도 비슷합니다. 열려 있다는 것이지요. 열려 있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내가 언제, 누구로부터 침범당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들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간절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 또한 내가 어떤 고난을 마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듣기 위해, 우리는 취약함 위에 덧씌워둔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 가면을 벗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4. 평화의 띠
청년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워크샵과 여행, 공부, 대화의 시간은 청년 모임을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뒤 각자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 프로그램의 의미는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일정인 청년 회담에 참여했습니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그간 나눴던 사안들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긴급하게 행동을 취해야 할 이슈는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주제는 총 네 가지였습니다. 젠더 이슈, 실업과 가난, 연령주의, 교육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제별로 흩어져서, 각국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들은 당연히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몇 달 뒤 후속 모임에서, 각자가 변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그리고 그 운동은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나눌 예정입니다. 각국에 흩어진 청년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내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어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는 칠십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파송하며,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합니다. 청년 회담에서는 네 가지의 주제를 꼽았지만, 2주 동안 청년들이 나눈 고민은 그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보여지지 않는 고통까지 생각한다면, 고난 당하는 이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자리가 바로 오늘 우리가 향해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전할 때, 우리는 마치 이리 가운데의 양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방비하고 취약할 것입니다. 우리는 괜찮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쁨에 가득 차 돌아왔던 일흔 명의 사람처럼, 우리는 괜찮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을 무찔러서 기쁘기보다는, 우리가 평화의 띠로 이어져서 기쁠 것입니다. 절망이 가득한 이 땅에서, 그 취약함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맞닿을 때 나와 당신의 세상은, 우리의 희망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자꾸만 새로워집시다. 취약한 몸뚱이들이 서로를 잇고 기대어, 새로운 희망을 자꾸만 피워냅시다.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존재를 가늠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그 위험하고 경이로운 길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서로를 듣고, 서로의 간절함이 이어짐을 믿습니다. 우리가 자꾸만 새롭게 창조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