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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길을 떠날 때에는 | 김희헌 | 2018-07-08

by 김희헌 posted Jul 08, 2018 Views 46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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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7-08

길을 떠날 때에는 (2:1-5, 고후 12:2-10, 6:1-13)

2018.07.08. 성령강림절 일곱째주일

 

[인류는 아직도 출가를 꿈꾸는가?]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길을 떠날 때에는으로 잡았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따온 문구입니다. 그간의 교회 갈등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바람과 다짐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만, 집에서 편히 쉬지 않고 이렇게 모여서 무언가를 함께 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 마음에 어떤 바람과 갈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서 길을 떠나는 것을 출가라고 하는데, 제도화된 종교 안에서 출가라는 말은 가출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나선다는 의미에서 둘 다 기특한 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출에는 무언가 비하의 느낌이 있고, 출가에는 비장한 암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비교가 있더군요. 가출은 더 좋은 집을 찾아 집을 나가는 것이라면, 출가는 집 자체를 불사르고떠나는 것이라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의 출가를 권장하는 것은 어렵겠습니다만,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출가의 본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이 되었든 집단이 되었든, 무언가를 찾으려고 익숙한 집, 익숙한 제도, 익숙한 문화를 벗어버리고자 한다면, 무언가 괴로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개척하고 역사를 밀고 가는데, 무엇이 괴로워서 또 무엇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 길을 열어가는 것일까요?

인류가 가진 세 가지의 고통이랄까 갈망이랄까, 그것을 잘 정리해서 최근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라는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입니다. 그는 <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인류를 고통스럽게 한 세 가지를 가리켜, 배고픔과 질병과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인류가 문명을 개척해 온 이유는 바로 그 세 가지를 해결해보자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저자 하라리는 자본주의 기술문명을 통해서 그것들이 거의 극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주장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인류는 배고픔과 질병과 전쟁에 시달리는 호모 사피엔스(지혜의 인간) 단계를 벗어나서, ‘신과 같은 인간호모 데우스’(Homo Deus)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호모 데우스는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는 인간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동력이 기술문명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문명사에 대한 그의 설명이 다채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엮어가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적 관심을 잃은 자본주의 문명을 태연하게 묘사하는 그의 시각이 불편했습니다. 물론 그 책이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맞을지에 대해 조언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의 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시대는 소위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불리는 시대입니다. 인류가 기술문명의 도움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해가는 시대를 말합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시도를 해오기는 했습니다. 옷은 피부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요, 바퀴는 다리의 한계를, 안경은 눈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차츰 발달되어 오다가, 이제는 비약적인 기술의 진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노기술에 기반한 유전공학과 재생의학을 통해서 노화와 죽음까지 극복하는 기술이 앞으로 1백 년 이내에 나올 것이라 예측하기도 합니다. 또한 뇌과학의 발달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도 소프트웨어를 사듯이 구매해서 자신의 뇌에 장착할 수 있는 시대까지 기대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다른 사람의 경험을 구매하고 장착해서 자기 것처럼 사고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의 인간관계를 맺게 될까요? 아마 민낯을 드러내며 서로 원색적인 대결을 하는 방식은 피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서로의 생각을 바꿔 끼우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예단하기는 이른 듯합니다. 앞으로 지어질 세계가, 호모 데우스처럼 군림하는 소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어두운 세계가 될지, 아니면 서로 돌보고 아낌으로써 신들의 안식처인 판테온의 삶보다 더 충만한 생명 세계가 될지는, 인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해관계에 묶인 이 절망의 세계에서도 옛 집을 불사르고 출가를 감행하며, 비상하고 도약하려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아들 / 에스겔 21-5]

오늘 본문은 에스겔이 예언자로 부름 받는 소명기사(1:1-3:15) 가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이 소명기사에는 에스겔이 보고 들은 세 개의 환상(1:-28a, 1:28b-2:10, 3:1-15)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환상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경험한 환상체험이라 할 수도 있고, 뚜렷한 자기의식을 갖고 예언자로서 말하는 출가선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이름 대신 사람아하고 부릅니다. 히브리어 벤 아담의 직역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 독특한 수사학이 에스겔서에서 93번 반복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84)

월터 윙크라는 신학자는 에스겔서의 벤 아담참사람이라고 번역하는데, 그 의미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서적 인간관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인간이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나아가는 위대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 예언자적 출가선언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가 예언자로서 출가하는 목적은 일어서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서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일어서게 한 것은 에스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ruah)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일으켜 세워 주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 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이것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chosen) 백성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 즉, ‘호모 데우스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향해서 반역의 민족이라고 꾸짖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그렇게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며 뻔뻔한 얼굴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할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

앞에서 예언자로 부름 받는 에스겔은 사람의 아들로 불렸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스스로를 호모 데우스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역의 족속이었던 사람들이 각성해야 할 사실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은 반역의 무리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미래는 이 사람의 아들과 딸이 열어가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선언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자신들이 맞은 암흑과 같은 포로기에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 몸부림의 끝에는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 것과 같이 생명의 부활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한 신비한 능력 / 고린도후서 122-10]

오늘 고린도후서 본문은 논쟁적 상황 속에서 바울이 하는 변명입니다. 이 논쟁은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겼습니다. 11절을 보면, ‘우두머리 사도들’(super apostles)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자신이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위 바보의 진술’(fool’s speech, 11:1-12:11)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두머리 사도들’(super apostles)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편지 내용을 반추해보면, 그들은 화려한 언변술을 사용하며, 계시와 환상을 자랑하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과 이미 모종의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논증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가진 자기 인식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자신이 삼층천(三層天)에 올라간 사람에 대한 환상과 계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점은 저 우두머리 사도들못지않은 자랑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 자신을 두고서는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랑을 삼가려는 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하는 자랑보다 실제로 경험한 인격을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말을 화려하게 해도, 그의 인격이 그 말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위선을 떨고 있음을 알릴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바울의 주장에서 우리가 더욱 주목하려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신앙적 깨달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체험과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게 된 경험에 대하여 7-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 할지도 모를 때, 하나님은 교만해지지 못하도록바울의 몸에 가시’(skolops)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나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라고 세 번이나 간청하지만, 주님의 응답은 분명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가진 바울은 예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다짐을 하게 되지요. 그의 다짐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살아가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약함을 택하는 것에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간 바울의 삶에는 병약함(weakness)과 모욕(insult), 궁핍(hardship)과 박해(persecution)와 곤란(difficulty)이 있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출가한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다반사라고도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겪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약함 속에 머무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품어야 할 신비로운 신앙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지팡이만을 갖고 떠나라 / 마가복음 61-13]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은 두 도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당한 이야기요, 두 번째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옛 체제에서 이루어진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가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들의 말은 여섯 개의 질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것을 비본질적인 헛된 질문으로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많은 질문들은 결실을 거두지 못할 질문입니다. 질문을 하면서도 그들은 달갑지 않게 예수를 대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는 사뭇 다릅니다. 그것은 옛 체제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파송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둘씩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7)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들은 나가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11-12)

오늘 본문이 대비시키고 있는 두 이야기, 하나는 옛 질서를 살아가며 생겨나는 불모의 물음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새 시대를 열어갈 돌봄과 치유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긴장 요소를 보게 됩니다.

종교는 제도영성이라는 두 요소를 갖고 있고, 이로 인해 내부적 긴장이 발생합니다. 한편으로 종교는 자기 제도를 가져야 존립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품고 있는 영성은 그 제도 너머의 해방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과거의 영성이 만들어놓은 오늘의 질서에 기초하면서도,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영성의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가 영성으로 인해 생동한다면, 영성은 제도로 안착하여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역동성이자, 본질적인 딜레마입니다.

어쩌면 종교만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이 그렇다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서 출발하여 미래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는 단선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사건처럼 존재합니다. 현재에 담겨 있는 역동성은 과거의 결실과 미래의 소망이 뒤엉켜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과거의 짐과 미래의 꿈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올바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거가 없다면 실제적인 토대가 없는 관념을 살게 될 것이고, 미래가 없다면 과거의 노예로서 숙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운동이 왜곡되고 교회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미래의 꿈을 상실하고 과거의 성취에 의존하는 종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생동하는 교회는 제도 질서를 뛰어넘는 영성의 충동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생동하는 공동체가 가진 딜레마입니다.

갈등을 겪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과거의 성공으로 구축한 체제의 힘으로 사는 교회는 부패하지만 않는다면 갈등을 겪지 않습니다. 반대로 미래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지배할 뿐 이미 이룬 제도가 없는 교회 역시 그 열망이 지속되는 한 갈등을 겪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룬 제도 속에서 새로운 소명을 키워가는 공동체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갈등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마침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공동체에게 그 목표는 본문 13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아픈 이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의 공동체는 언제든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이 그 동안 너무 무거워졌지요. 우리를 비우고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옛 진지 속에서 농성하기보다는, 진지를 불사르고 길을 나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떠날 때의 물품으로는 지팡이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길을 걷다 힘들면 기대기도 하고, 맹수가 좇아오면 막을 수 있는 지팡이 하나면 된다고 합니다. 단촐하고 가벼운 마음이 아니고는 만족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지팡이는 몇 가지 상징을 가집니다.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38:25, 17:2), 기적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17:5,20:11), 권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왕하4:29). 그런데 심지어 이 지팡이마저도 무거워져버렸을 때는, 그것조차 갖고 가지 말라고 마태와 누가는 말합니다. (마태 10:10, 누가 9:3) 예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총이면 충분하다는 말이겠습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그간 교회의 상황은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아예 의미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 속에 두려움과 꿈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가 반목과 대립을 중단하자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우리 공동체의 존재이유인 예수운동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오랜 만에 강남향린교회 천막을 찾았습니다. 읽기 위해 책을 한 권 가져갔는데, 그것은 신학자 칼 바르트의 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칼 바르트는 제가 20대 때 옛 신앙을 거의 잃고 낙심하던 시절, 맘속에 다시 불을 질러준 신학자입니다. 그의 사상이 지금 나의 신학적 세계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말았지만, 자기 시대를 진취적으로 열어가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맘을 뛰게 합니다.

그의 대표작은 13권으로 구성된 교회교의학입니다. 46살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35년 동안 써 내려간 이 책의 기본구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간격에 대한 강조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 4권은 화해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간격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만남에 대한 강조입니다. 제가 수요일에 들고 간 책은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 책입니다. 그 내용은 성령세례와 물세례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강림절 일곱 번째 주일, 마지막 묵상으로 들려드릴 부분은 칼 바르트의 성령세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성령세례인가?

성령세례는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시작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우리 삶의 변혁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삶은 매일 매일의 참회, 끊임없는 자기 펼침이요, 하나님의 초대와 명령의 빛 속에서 정체됨이 없이 걸어가는 행보입니다. ([교회교의학] IV/4, 68)

성령이 인도하는 이 길을 떠나는데 지팡이 하나면 족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볍게 다시 이 길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초대의 빛 속에서

여러분의 삶이 매일 새롭게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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