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 (사 1:1, 10~20, 히 11:1~3, 8~16, 눅 12:32~40)
2022.08.07 성령강림절 아홉째 주일
[믿음의 한길로 산 인생]
어제 홍창의 장로님의 백수연(白壽宴)으로 가족들이 조촐하게 잔치를 가졌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잔치를 하지 않느냐?’ 물어오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장로님께서 건강을 잘 지켜주셔서, 내년에 교회 건축을 마치고 큰 잔치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창립 역사와 함께 살아오신 장로님에 대한 크고 작은 기억이 교우들에게는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장로님의 삶을 직접 경험하기보다는 은퇴하신 후에 펴내신 수상록을 읽고 그분의 삶과 믿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홍 장로님의 수상록 세 권을 읽었는데요. 그것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삶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평생을 믿음의 동지로 살아오신 안병무 선생님이 70세가 되셨을 때 쓴 <벗>이라는 글을 보면 이런 고백을 하십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에게도 친구가 많이 있었다. 긴 삶의 여정을 지나온 오늘 이 시점에 ‘네 벗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별 생각할 필요도 없이 ‘홍창의’라고 부를 것이다.”
만일 친구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는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이런 친구 한 명 있다면 모든 어려움을 뚫고 갈 수 있겠지요. 안 선생님이 홍창의 장로님을 두고 표현한 대표적인 성품은 ‘일관성’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삶의 외적 조건이나 사회적 위상은 의학계에서 인정하는 유명인사로서 모두 인정할 만큼 많이 변했지만, 변치 않은 모습이 두 가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인간관계의 성실성’이요, 다른 하나는 ‘의로운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철저했다’는 점입니다. (홍창의, <낙엽>, 158~59)
안 선생님은 이런 홍창의 장로님의 삶에 관한 총체적인 인상을 ‘파스칼’과 같다고 요약합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마흔 살이 채 되지 못해서 요절한 천재였기 때문에, 그 삶의 길이로 보면 백 세를 사신 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삶과 믿음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비슷했다고 보신 것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삶을 해석할 때 ‘믿음’의 문제를 중시했습니다. 이점이 안병무의 눈에 친구 홍창의의 삶을 해석하는 핵심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병무와 홍창희 등 일군의 신앙인들이 <야성>이라는 잡지를 함께 내던 때는 한국전쟁 기간이었습니다. 서른 살에 불과한 이 젊은이들은 어둠에 잠긴 시대에 등불을 밝히고자 했고, 근본주의에 묶인 한국교회를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이즈음 청년 홍창의가 쓴 글 가운데 하나는 ‘파스칼의 세 차원’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을 세 가지 차원으로 해석한 내용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삶에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차원이요, 둘째는 정신의 차원이요, 셋째는 자비의 차원입니다. 이 세 차원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차원에 속하는 삶은 정신의 차원에 속한 삶을 알 수 없고, 정신의 차원에 속하는 삶은 자비의 차원에 속한 삶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냉철한 과학자였기에 이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데에는 이성의 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파스칼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믿음 없이는 삶을 충분히 구성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정같이 맑은 이성이 어린애 같은 순진한 신앙 속으로 흡수되지 않고서는 그 삶이 충만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홍창의 장로님은 자신의 글에서, 삶을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뜰 앞에 있는 바위를 치우려면 힘을 써야 하지 철학을 풀어봐야 소용이 없고, 다음날 시험을 치르는 신학생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차원의 삶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앙의 세계를 과학적인 지식으로 증명하려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자신의 빛나는 이성으로 신앙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해명하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이성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경건주의(fedeism)를 제시한 파스칼은 당시의 대중적 세계관이 놓치고 있는 맹점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단순히 사회법칙에 따라 움직이거나, 초자연적인 신의 섭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삶 한가운데에서 믿음을 구성함으로써 궁극적인 가치를 세워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입니다.
저는 이런 경건주의 전통이 모든 교회를 교회답게 지키는 토대가 되었고, 우리 향린교회에도 이 전통이 깊이 흐르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것이 신앙공동체의 토대인 믿음이요, 그 믿음 위에서 하나님과 역사 앞에 정의와 평화를 외칠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 히브리서 11장 1~3, 8~16절]
오늘 서신서 본문 히브리서 11장이 계속해서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by faith, Πίστει)라는 말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을 해석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어떤 율법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은총의 세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보이는 세계 너머를 응시하게 하고, 믿음으로 지어갈 세계를 앞당겨 보게 합니다. 고통과 굴곡으로 얼룩진 삶을 바로 세우는 뜻도, 참혹한 어둠의 역사를 밀고 가는 힘도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가르침입니다.
본문 8절은 아브라함의 삶을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간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세상이 주는 두려움의 극복입니다. 그것은 단지 ‘정신의 기술’이 아니라 정화된 ‘영혼의 긍지’입니다. 따라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하늘을 향해 달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낡은 종교는 믿음을 성공에 대한 보장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을 마치 축복의 보증수표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냉정한 현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나그네와 같이, 어쩌면 마음 둘 곳 없는 비극으로 점철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이 호메로스의 신화의 시대가 지난 후, 우주와 세계에 대한 냉철한 철학의 시대를 뒤이어 문학에서 ‘비극(悲劇)이 탄생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욕망과 올가미들, 진실과 술수가 서로 얽히면서 모든 관계가 파괴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묘사하는 비극처럼, 삶은 어쩌면 슬픔의 카타르시스만 남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서 인생을 ‘고’(苦)로 묘사한 불교가 더 사실적인 것 같습니다.
성서 역시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간 삶 역시 ‘약속한 것을 멀리서 바라볼 뿐, 땅에서는 나그네 신세’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약속마저도 닿지 않는 절절한 삶에 하나의 꿈을 담아 놓습니다. 믿음의 꿈입니다. ‘동경’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16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는 지점일 것입니다.
다시 홍창의 장로님의 글로 돌아갑니다. 장로님이 펴낸 마지막 책의 제목이 <마음의 고향>인데, 그 머리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다. 하나는 북쪽에 두고 온 고향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이 계시는 마음의 고향이다.”
이 ‘마음의 고향’이라는 표현은 홍 장로님의 삶에서는 오래된 언어입니다.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시기, 남산 밑에 신앙공동체를 일구기 넉 달 전에 쓴 글의 제목이 ‘마음의 고향’입니다. <야성> 7집에 실린 그 글의 맨 앞은 성 프란시스의 기도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한용운의 ‘님’에 관한 시를 인용한 후 이렇게 마칩니다. “내 마음속 깊이 한없이 그리워하는 님, 그 님이 계신 나라, 그곳에 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오늘 히브리서가 말하듯이, 믿음의 공동체는 ‘마음의 고향’을 같이 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같은 믿음을 품은 공동체는 참으로 소중하며, 동경하는 힘에 기초한 신앙공동체는 진실로 위대합니다.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미숙한 도덕과 미숙한 종교는 ‘당위’에 매달리지만, 성숙한 도덕과 종교는 ‘동경’에 기반을 둔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비록 삶에서 수치와 실패를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동경하는 그 발자국에 예수의 흔적을 남깁니다.
[예언의 꿈, 그 너머로 이어진 삶 / 이사야서 1장 1, 10~20절]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첫 장부터 기존의 종교에 대한 예언자의 비판이 나오는데, 가장 격렬한 비판가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내용은 믿음의 길을 재구성하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신앙공동체가 믿음의 행진을 하다가 예언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그들은 부족공동체라는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모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만 지키는 옹졸한 부족신(父族神)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을 이루는 정의와 평화의 주님으로 나옵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축복과 번영을 선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참된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의무나 종교적 당위에 따른 활동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동경하면서, 먼저 자신을 씻고 정의와 평화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삶의 겉모습으로 믿음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써 믿음을 살라는 것입니다. 정의의 목소리가 환멸에 이르지 않도록, 삶으로 정의의 열매를 거두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의 목소리는 인류의 정신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위대한 유산이 인류의 꿈을 높였고, 그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긍지와 포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남아 있기에, 삶은 또 다른 위태로운 사태를 빚어내며 역사는 비틀거리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친 위기의 시대는 반복해서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낯선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안토니오 그람시가 ‘궐위의 시대’라고 표현한 병적 징후가 뒤섞인 시대, 낡은 것은 소멸했지만 아직 새것이 태어나지 못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가속하며 노동환경이 변경되면서 ‘진보와 공정’에 대한 감각도 바뀌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새로운 문명을 요구하지만, 우리 사회는 생태문명을 향한 도약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탈-진리시대 확증편향의 문화는 영적 위기를 보이지만, 탈 종교현상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 대부분의 신앙공동체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찾고,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두려워하지 말아라! / 누가복음 12장 32~40절]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역시 암울한 시대에 길을 잃고 삶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들을 향해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짧은 명령문으로 시작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Μὴ φοβοῦ)
이 말은 누가복음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1:1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1:30), 들판의 목자들에게 (2:10)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자기 길을 잃은 어부 베드로에게 (5:10), 딸의 병으로 절망한 야이로에게 (8:50), 삶의 벼랑길을 지나는 제자들에게 (12:4,7)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누가복음의 공동체 자체가 위태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염려로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올 시대를 향해 깨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깨어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태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율법을 넘어선 믿음의 사람은 등불을 켜서 주의 나라를 준비합니다.
위태로운 시대에 신앙의 공동체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삶 속에 내재화하는 ‘생활 신앙’을 길러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며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신앙의 공적 책임을 높여야 합니다. 대안적 가치와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실험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대해가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삶이요, 두려움을 이기는 삶입니다.
그 믿음의 꿈은 거대할지라도, 그 꿈을 이루어가는 구체적 삶은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드리는 작은 기도, 가난한 이웃에게 내어주는 하나의 속옷, 메마른 사막에 심은 한 그루의 나무, 목마른 나그네에게 건네주는 한 바가지의 샘물, 거기에서부터 생명력 있는 믿음이 피어납니다.
홍창의 장로님과 같은 분을 가진 우리 교회는 참 복됩니다. 여러 풍파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믿음의 좌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 장로님의 믿음의 계보를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교회를 섬기는 장로였습니다. 그 믿음이 이어져 믿음의 열매로 맺혔습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믿음을 호(號)에 담은 것 같습니다. 장로님의 호는 ‘석천’(石泉), 돌샘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써주신 글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무꾼이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잠시 내려놓고,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에 목을 축이며 쉬듯이,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모두의 삶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광화문 시대를 열어갈 우리 교회의 삶도 우리 사회의 목마름을 씻어줄 작은 돌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믿음으로 삶을 일구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였습니다. 삶의 현실은 늘 위태롭고, 그 삶 또한 나그네와 같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역사 앞에 작은 샘물이 되어 살아가는 생생한 축복이 우리 삶에서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