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 향린 창조절1 / 한가위감사주일, 재일동포선교주일
“돌이킴”
렘 18:1-11, 몬 1:1-21, 눅 13:25-33
새로운 신앙의 절기를 맞았습니다.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는 오늘날, 창조절의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보다 진지하게 맞이하게 됩니다.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아주 구체적인 실천의 결단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이러한 중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4개의 본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피며 다시 한 번 깊은 결단하며 창조절의 신앙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제1성서의 예레미야서는 “돌이킴”, 곧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의 작업하는 모습을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하는,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계약했던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물레질을 하면서 그릇을 만들려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을 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계획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계약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은 시내산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민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시내산 계약을 성실히 준수하여 순종하고, 악한 행실에서 돌이켜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토기장이와 같이 다른 그릇을 계획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 비춰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사랑과 정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현대 선교신학은 “사랑에서 기인한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실현”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부족신의 속성을 초월한 신성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에게 종속되는 부족신은 자기 백성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의무가 부과됩니다. 백성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간에 부족신은 백성이 원하는 복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바알신앙이 그 일례가 됩니다. 바알은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것을 권력자의 욕심에 복무케 하는 이데올로기 안에 귀속되면 제국주의와 맘모니즘이 융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1성서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 근동 셈족의 야훼 신은 그러한 부족신의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행실에 초점을 맞추고 시내산에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법리적 이유는 이스라엘이 행할 정의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기반이 될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저버릴 경우 시내산 계약이 파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족신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야훼신앙의 색다른 면모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돌이킴’ 곧 회개입니다. 악한 행실에서 돌이켜 다시 계약 준수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리를 ‘천도(遷都)’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기억하고, 시내산에서의 감동을 되살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돌이킴’, 회개입니다.
오늘날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신앙적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돌이킴’, 회개로부터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인류가 지구생태계에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근현대 기술문명의 발전은 사피엔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지만, 결국 그것은 사피엔스의 지혜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누리는 풍요는 다른 지구생명체를 절취한 것이었고 후세대의 생존권을 갈취한 것이었습니다. 인류가 풍요로울수록 자원은 고갈되고 지구는 뜨거워졌습니다. 생물의 종이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이내 인류종의 멸종도 계산이 되는 지경입니다. 지금 우리가 풍요롭고자 지구별을 망가뜨리고 그 책임을 후손에 전가시키는 파렴치의 극치가, 오늘날 우리의 무지한 자화상입니다.
“창조세계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자” 하는 세계 교회의 외침이 오늘도 독일 칼스루헤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단체 일각에서도 꾸준히 생태-기후정의 선교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생명문화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그리고 몇몇 교단의 생태선교단체가 함께 연구한 결과물로, 지난 8월24일에 “한국교회 탄소배출 감축 중장기 이행목표 -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교회가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체계적인 실천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한국교회에 제안한 것입니다.
창조세계 온전성 회복을 위하여, 기후정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발표된 이번 로드맵은, “한국교회가 2040년까지 탄소배출을 100% 감축하고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생산 및 자연기반 탄소흡수원을 확대”해 간다는 중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을 감축하기 위하여 교회 조직기반의 변화, 시기와 실천의 체계적인 과제 제시, 교회당과 부속시설 등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탄소배출의 가능성들을 따져보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서서히 감축할 수 있을까,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 감축, 그리고 재생에너지 활용과 더불어 대기 중 탄소를 흡수저장하는 생태계(숲, 초지, 습지)의 복원에도 관심을 두고, 이것이 교회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같은 생태선교의 연합활동에도 손을 보태고 함께하면서 ‘돌이킴’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이명박 정부시절 강행된 이른바 ‘4대강 사업’과 ‘녹색성장’이라는 기만적인 정부시책에 저항한 것을 시작으로, 총회본부 내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 선교를 위한 ‘평화공동체운동본부’와 함께 ‘생태공동체운동본부’를 설치하고 교단 내 생태선교사업을 감당해 왔습니다. 기장 생태공동체운동본부는 올해 9월에 개최될 제107회 총회에 부의할 몇 가지 헌의안을 제출하였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총회 상임위원회에 기후정의위원회를 신설하여 총회의 책임적인 생태선교를 제안한 것입니다. 기장은 작년 제106회 총회에서 <기후위기 극복과 창조세계 보전을 위한 한국기독교장로회 탄소중립 선언>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선언과 부문운동으로서 생태선교의 한계를 넘어서서 명실 공히 교단의 선교활동이 될 수 있도록 총회 상임위원회로서 기후정의위원회 신설을 헌의한 것입니다. 교단 규모가 위축되면서 상임위원회를 줄여나가자는 분위기가 한창인 상황에서, 이번 헌의가 어떻게 허락될 지는 미지수입니다만, 헌의안이 허락된다면 총회와 노회, 교단의 기구적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생태선교를 펼쳐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창조세계의 온전성 회복을 위하여 우리 공동체에서도 깊은 관심으로 마음을 모으고 있음은 우리 서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미래선교연구위원회의 생태문화선교팀의 활동이 있었고, 내년 교회창립 70주년을 준비하면서도 구체적인 기후정의 선교사업이 제시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올해 3월에는 ‘그린엑소더스’ 기도회를 주관하여 드렸고, 6월 환경주일을 지내면서 교회적 차원에서 결의한 선교사업이 있습니다. CBS와 ‘푸른아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는 “몽골 나무심기”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헌금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목적헌금에 참여하면서 기도하는 우리 개인과, 생태선교를 향한 우리 공동체적 결의와, 기장 교단을 비롯한 교회 연합활동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깊은 관심, 그리고 WCC 세계 교회가 품고 있는, “창조세계의 온전성 회복”을 위한 기도운동에 더욱 깊이 마음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기독교 생태선교가 씨줄이 되고, 동시에 종단을 초월한 연대활동, 시민사회단체와 함께하는 활동들이 날줄이 되어서 기후정의를 실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우리 향린공동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드린 씨줄과 날줄의 생태선교가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돌이킴’ 곧 회개의 구체적인 신앙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교사업이 그러해야 하듯이 생태선교 또한 우리 신앙의 깊은 성찰과 소명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저는 신앙에서 비롯된 생태선교에 대해서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책임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윤리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랑의 책임감이 생겨났습니다. 그 사랑의 책임감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 사랑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그 무한한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있습니다.
생태선교에 관한 우리의 책임감은, 지구생태계가 파괴되고 기후재앙이 발발한 데에 기독교가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비판 차원에서도 져야합니다. 근현대 기술문명의 발전에 잇댄, 인류의 제동 걸리지 않는 전차와 같은 욕망 추구에 기독교가 부추겼다는 비판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창세기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지구생태계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일종의 허가증을 발급했던 과거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또한 중요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서사(narrative, storytelling)입니다. 중세시대 교회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마녀사냥을 해도 된다는 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권력자의 헤게모니를 충족시키는 기능으로 서사의 정당성은 획득되는 것입니다.
마녀사냥과 같은 악한 헤게모니가 권력이 되는 데에는 문화의 영향이 큽니다. 선한 문화는 그릇된 헤게모니를 제어하지만 미성숙한 문화는 악한 권력에 지배되기에 용이하므로, 우리의 문화를 선한 서사로 탄탄하게 지켜내는 일도 놓쳐서는 안 될 우리의 과제입니다. 풍요를 향한 인류의 욕망이 산업기술의 발전에 올라탈 때 기독교의 문화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번영신학이 발흥하고 공격적인 개종선교에 급급했습니다. 신학은 시대사조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변증에 목을 매었습니다. 급급하며 목을 매면서 세속적인 자리를 지키려, 산업기술의 발전과 생태계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서사의 허가증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일면 당대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할지라도, 그 결과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자리에서는 재고하고 ‘돌이킴’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욕망의 무한질주에 제동을 거는 ‘돌이킴’의 서사가 교회에서 노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한 과거를 돌이키는 책임이며, 사랑의 책임윤리입니다.
신앙에서 비롯된 생태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둘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타협적인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가족,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자기 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가족과 사회를 다 팽개치고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고 읽는 것은 오염된 해석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33)는 이 말씀은, 자기 욕심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뜻으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28절에, 망대를 지으려면 먼저 그 비용을 셈해봐야 하는 것처럼, 31절에, 전쟁을 나갈 것이면 피아 전력을 따져보면서 전략을 세우는 것처럼 당연히, 27절,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한 제동으로, 본문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말씀처럼 십자가는 비타협적입니다. 비타협적이어서 절벽의 끄트머리까지 내몰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너머에 부활의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기대어 십자가는 비타협적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구경제 차원에서, 이쪽 지역에서 상품의 공급이 중단되어 물가가 오르면 다른 쪽에서도 덩달아 물가가 오르기 마련입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화물선박 정체,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현재 우리 교회 건축 중에 콘크리트 등 자재비용의 상승을 실감하면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커플링(coupling)’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한쪽이 올라감에 따라 그와 덩달아 같이 이쪽도 올라간다는, 커플처럼 똑같은 양상이 나타난다는 용어입니다. 이것의 반대 의미를 갖는 것이 ‘디커플링(decoupling)’입니다. 한쪽이 올라가지만 이쪽은 오히려 내려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산업과 기후위기의 관계를 ‘디커플링’으로 설정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구상을 하는 것인데, 생태학자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산업성장과 함께 기후재앙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며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탄소와 메탄 등 6개의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는 온난기체를 제어하여 지구온도 상승폭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비타협성입니다. 풍요를 향한 욕망과 창조세계 온전성 회복은 디커플링으로 양립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풍요를 추구할수록 생물종은 멸종해 갈 것이며 매년 심각해지는 기후재앙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지구는 이른바 ‘닫힌계(close system)’입니다. 우주공간에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장으로 태양풍 방사능도 막아내는, 닫혀진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인류는 과도하게 화석연료를 남용하면서 지구 안에 환기시킬 수 없는 온난기체를 내뿜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도달하는 온도 상승률 때문에 환경학자들의 눈에서 절망이 비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태양광과 같은 재생에너지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우리가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탄소와 같은 온난기체를 점차 줄여가는 일, 또한 공기 중 탄소를 잡아줄 나무와 논, 습지, 갯벌과 같은 탄소흡수원들을 확대해 나가는 일이 매우 시급합니다. 급박한 작금의 상황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시급한 것은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신앙인의 책임윤리, 그리고 십자가의 비타협성으로 발을 움직여야 할 탄소중립. 이것이 오늘 우리가 행할 신앙의 과제 ‘돌이킴’입니다. 창조세계 온전성을 회복하는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서 전달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 마음마음마다, 한국교회 세계교회와 함께, 우리 사회와 지구촌 안에서, 우리 창조절의 기도를 성령께서 운반하시고 소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침묵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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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모든 창조세계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땅과 나무와 동물과 지구의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극물과 벌목으로 숲을 파괴하고 있으며, 새들과 벌레들 숲의 거주자들의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당신께서는 바다와 물고기, 조개, 암초, 고래, 파도, 산호의 경이로움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뜨거워지고 플라스틱에 익사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는 잠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과 회개로 당신께 돌아섭니다.
우리가 바다와 땅과 숲을 돌보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당신의 축복임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날씨를 제압하고 환경을 파괴한 인간의 활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멜라네시아 성공회 수녀회 공동체’의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