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에서 던지는 질문 (욜 2:23~32, 딤후 4:6~8,16~18, 눅 18:9~14)
2022.10.23. 창조절 여덟째 주일
[소성리 현장기도소 지킴이가 되기까지] / 강형구 장로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로 넘어가고 소성리가 사드저지투쟁의 최전선이 된 때가 2017년 3월이었습니다. 사드저지 범국민 평화행동이 시작되었고, 그 첫날 소성리에 5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살기를 비롯한 기독교 활동가들도 함께했지요. 소성리를 성지로 삼고 있는 원불교는 물론이고 가톨릭도 상황실 천막을 세우고 함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독교도 기도소를 세우고 사드저지투쟁에 함께해야 하지 않겠냐, 그날 기독교 활동가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천막기도소를 누가 지키냐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때 예수살기 사무국장으로 있었는데, 잦은 허리통증과 비문증, 광시증 등으로 우선 몇 달 몸부터 돌보라는 충고를 듣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에서 한 달을 쉬고 예수살기 총회 때문에 돌아왔다가 다시 피정할 곳을 찾고 있었지요. 누군가 농담하듯 제게 던졌습니다. “피정 가서 하는 일이 기도와 산책인데, 장로님이 소성리로 피정 가서 기도하고 산책하시지요.” 모두 농담으로 생각했고, 저도 농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투쟁현장에 가서 피정을 하라니... 그런데 그 농담이 귓가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농담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소성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살기, 촛불교회, 생명평화마당, 기독인연대, 향린교회 사회선교부 등이 힘을 모아 [사드저지 기독교 현장기도소]를 세웠습니다. 재정 분담, 현장예배, 지킴이 릴레이 등을 함께 결의했는데, 싸움이 길어지면서 결의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3개월 정도 예상했는데, 제가 “사드가 나갈 때까지 못 나간다.”라며 계속 버텨 지금까지 왔습니다.
[사드를 반대하는 이유]
기도소를 세운 주체 중 하나가 향린교회 사회선교부니 만큼 향린의 교우 여러분들도 사드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반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겠지요. 사드를 반대하는 이유는 사드 레이더의 전자파로 인한 위험, 사드라는 무기의 효용성 등이 초기에 많이 거론되어왔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사드가 전쟁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증폭시키는 무기라는 점이고, 더더욱 중요한 문제는 전시작전권을 돌려주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이 나라의 군사주권을 실질적으로 미국이 장악하는, 식민지 완성 도구가 사드라는 것입니다.
사드 레이더 전자파가 위험하다는 것은 미군의 사드운용교범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사드기지에 가장 가까운 마을 노곡리 주민들의 10%가 암으로 투병 중이거나 돌아가셨습니다.
사드의 효용성은 이명박 정부까지 사드배치를 거부했던 이유로도 알 수 있습니다. 남북한이 전쟁에 휩싸여도 북한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는 사드가 중국을 감시하는 무기, 미국 일본을 지켜주기 위한 무기라는 걸 증명해 줍니다. 사드가 전쟁 불안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무기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의 공격목표에 사드기지가 포함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제보복에 시달렸습니다.
사드의 효용성이 문제가 되자 사드 성능을 업그레이드한답니다. 패트리어트와 연동 통합운용체제를 만들어서, 고고도 방어용인 사드와 저고도 방어용인 패트리어트가 하나가 된답니다. 그래서 완벽한 미사일 방어체제를 만들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체제의 완성은 한국군의 전략자산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어 미국의 작전 지휘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함정을 숨기고 있습니다.
사드의 본질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하며 한국에 배치한 무기입니다. 사드는 한국을 미국의 전쟁무기 실험장, 전쟁연습장, 대리전쟁터로 만들어가는 지렛대입니다. 한국군을 최전방 총알받이로 내모는 채찍입니다. 이제 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이 벌이는 다른 전쟁에 미군의 하위부대로서 한국군을 동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드를 반대하는 투쟁이 21세기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소성리 현장 상황]
지난 20일 목요일 아침 페북 라이브로 중계되는 소성리 상황을 지켜보다가 미군 유조차가 들어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극한투쟁을 하라는 신호같아 보였습니다. 우리가 결사적으로 막으려 하는 것이 세 가진데 미군병력과 사드장비, 그리고 사드장비를 가동하는데 사용될 유류였습니다.
정부는 헬기로 수송할 수 없는 장비의 이동을 위해서는 가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소성리 일대를 계엄 상태를 방불케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민과 연대자들은 자신의 몸을 바리케이드 삼아 길을 막았습니다.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주기적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병력과 유류를 위해서 전쟁 같은 작전을 일상적으로 펼칠 수는 없었지요. 미군 병력과 유류의 수송은 헬기를 이용해 왔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군의 육로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미군기지가 소성리였습니다. 미군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2021년 3월 미국 국무장관 국방장관이 함께 다녀가면서 우리 정부에게 성주 사드기지를 방치하고 있다고 동맹으로서 용납 못 할 일이라고 강하게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사실을 따지자면 정부가 사드기지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정부는 국회동의도 없이 부지를 미군에 넘겨주면서 전략환경영향평가를 피하기 위해 부지를 쪼개 넘겨주었습니다. 환경영향평가도 마치기 전에 기지공사를 시작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미군기지를 우리 군대가 지켜주는 것도 우리의 법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주둔군지위협정 어디에도 없는 규정에 없는 일입니다. 오직 사드기지만 현재 한국군이 경계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미국의 불만을 대변하는 보수언론들은 사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묵인 방조하고 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사드를 반대하는 우리를 묵인 방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같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으니 웬만하면 우리가 막을 수 없는 하늘길로 다니지만,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엔 언제나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우리의 손발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오죽하면 코로나도 무시하고 몰려들어 주민을 짓밟았겠습니까? 미국의 요구는 우리의 합법적인 집회 시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2021년 5월부터 ‘병참선 확보’라는 이름으로 매주 2회 경찰병력이 동원되어 기지로 들어가는 차들의 통행로를 확보한다고 주민들이 마을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기지로 들어가는 차들은 대부분 이전에도 막아서지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 쓰레기 수거차량, 급수차량, 부식 운반차량, 용역업체 출퇴근 차량... 경찰병력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막았을 차량들이 있다면 미군 번호판을 부착한 차량들이었을 겁니다. 미군 식수 운반 차량과 기지 내 공사와 관련된 군무원이라며 미군 번호판을 단 한국인 탑승 차량이 드나들었습니다.
우리는 결사 저지 대상 세 가지를 다시 확인하며, 경찰병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굳이 새벽부터 집회할 이유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들려 나오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2월 말부터 주 2회에서 주 3회로 늘었습니다. 5월부터는 ‘기지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주 5회로 작전 횟수를 늘렸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여전히 결사 저지 대상의 통행은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월부터 언제든 필요하면 주말 주중 가리지 않고 심야나 새벽을 따지지 않고 작전을 하겠다며, 유류 수송과 미군 병력의 이동도 육로를 이용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9월 3일 제13차 범국민평화행동을 마치자마자 9월 4일 새벽 1시 반 유조차를 통행시키기 위한 경찰 작전이 기습적으로 펼쳐졌습니다. 9월 14일에는 오전에 1차, 저녁에 또 한 번 하루에 두 번이나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며 유조차를 막아서야 했습니다. 10월 6일엔 업그레이드를 위한 사드장비를 들여보내며 야간 작전을 펼치면서 물병조차 던질 수 없도록 중앙선을 따라 그물막을 펼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20일 목요일 아침, 미군 유조차가 기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매일같이 격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건강과 농사일이 걱정되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늘 고민해 왔습니다. 사드철회평화회의는 마을회관 앞에서의 아침평화행동은 새벽 6시 화요일 목요일만 진행하고, 월수금에는 6시 반에 진밭교에서 연대자 중심으로 피켓팅과 샤우팅으로 대응하기로 하였습니다. 주말과 공휴일엔 소수의 지킴이들이 아침 8시 기지정문 앞 약식집회로 불굴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기지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드러내는 저들의 속내는 우리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격렬한 전투를 일상화하도록 만들면서 조금이라도 저항의 몸부림이 심해지면 공무집행방해, 해산명령불응 등의 죄목을 걸어 형사처벌을 진행합니다. 지난해 5월 이후 입건된 주민과 연대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성리에서 깨어나는 영성]
피정하러 왔던 소성리였습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기도하고 산책하며 과연 건강해졌을까요? 이제는 광시증, 비문증도 사라지고 지팡이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소성리에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점점 중압감이 커지면서 약해져 가는 때도 있지만, 대체로 소성리에 들어오던 당시와 비교하면 매우 건강한 편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에 생긴 깨우침들은 개인 블로그나 예수살기의 인터넷 매체 [새마갈노]에 올려두었기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새마갈노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보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일정상 오늘 올 수밖에 없었는데 목사님께 초대받기는 다음 주 종교개혁주일 프로그램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종교개혁과 관련한 생각을 안 할 수 없더라구요.
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달라져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이 맹신도, 광신도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문, 질문, 변론을 금기시하는 풍토가 교인들을 맹신도 광신도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변론하기를 즐기시는 분입니다. 묻고 따지는 가운데 우리가 성숙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내게 물어봐! 내게 물어보라고!” 소리치는 분 아닐까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 같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역시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지만 저는 왕성한 질문을 손꼽습니다. 나름대로 이해가 될 때까지 묻고 또 묻는 아이들입니다. 어린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질문을 봉쇄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출애굽기 12장 유월절의 규례를 대대손손 지켜나갈 것을 명령하는 장면에서 26절 “당신들의 자녀들이 이것이 무슨 예식이냐고 묻거든.” 이 구절이 가슴에 꽂힌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물음표가 생기고 그 물음표가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이끌어가는 것인데,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생기는 물음표들을 묵살하며 오직 관습에 복종할 것을 요구해 오지 않았나 반성했었습니다. 어린이처럼 묻고 따지는 일이 금기가 되어 버린 곳에서는 오직 관습만 남기 마련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시작한 종교개혁도 부조리한 종교권력에 대항하며 묻고 따지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성전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깨우는 질문이요 변론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들에게 “너희는 예수의 이름을 도용한 사탄의 무리가 아닌가?” 묻고 또 묻습니다. 소성리에서 지내다 보니 사드가 아니면 북핵은 어찌 막나 걱정하는 분들을 가끔 마주칩니다. 주한미군 철수하면 북의 공격을 어찌 막냐는 얘깁니다. 그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질문을 소개하며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누가 일으킨 전쟁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일어날 전쟁으로 가장 득을 보는 건 누구겠습니까?”
[성서묵상 1. 두 모습, 두 관점 / 누가복음 18장 9~14절] / 김희헌 목사
‘소성리에서 던지는 질문’을 생각하며 말씀을 이어갈까 합니다. 그 질문은 세상을 보는 눈에 관한 질문인데, 사회과학적인 대답은 분명하고 또 앞에서 말을 했으니까, 저는 성서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지요.
바리새인은 유대 사회에서 스승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들은 자신의 기도대로 살았고, 그런 의로운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기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면, 세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식민지에서 제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손가락질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가 드릴 기도는, 자비를 구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두 사람의 기도 중에 세리의 기도가 옳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높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문제인 것은 단지 ‘자기를 높이는 기도’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 사회체제가 만들어놓은 구도와 질서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다른 눈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봅니다. 예수의 관심은 그 사회 질서 속에서 ‘누가 의롭게 사느냐?’ 하는 것에 있기보다는 ‘누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끌어 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로는 질곡으로 가득 찬 땅에 하나님 나라의 새 기운을 이끌어 올 수 없습니다. 대신, 예수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죄인을 끌어들여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죄의 질서에 묶인 삶에 자비와 은총의 세계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길은 단지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는 대체로 시대의 질곡을 강화하는 규범에 가깝기 때문이어서일까요? 억압과 모순,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은 도덕적 가르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기독교가 예수를 ‘윤리교사’처럼 묘사하며 도덕적 종교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외부를 향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맞서 싸우지도 않았고, 내부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무력했듯이, 종교는 윤리만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모순이 중첩된 세계에 하나님 나라의 기운을 끌고 올 종교는 그것보다는 더 깊어야 합니다.
[성서묵상 2. 예언과 꿈 / 요엘 2장 23~32절]
요엘서의 본문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주실 때, “자녀들이 예언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꿈과 환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이 아닙니다. 고통의 세계를 외면하는 무관심의 환상이 아니라,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예언의 눈입니다.
요엘의 예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반전 평화운동가 그레이스 페일리(Grace Paley)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평화를 구상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현실을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현실이 실제로는 진실을 감추는 환상 즉, ‘헤게모니의 판타지’로 채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김나미, “현실을 상상하기”, 22년 7월 27일 <평화와신학> 4차 포럼)
우리 사회에는 미국의 패권적 헤게모니를 위해 만들어놓은 판타지가 겹겹이 쌓여 있지요. 한미동맹에 기반한 국가안보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단국가의 오래된 판타지, 싸드 배치와 무기 구매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만의 판타지, 미군을 위해서라면 자국의 국민을 제압해도 좋다고 여기는 폭력의 판타지, 이 모든 것이 우리 현실을 덮고 있는 ‘헤게모니의 판타지’라 하겠습니다.
요엘은 현실을 다시 상상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입고 거듭난 눈으로 보면, 폭력의 세계를 감추는 거짓의 환상이 걷힙니다. 군사동맹과 전쟁무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요엘이 31절에서 말하듯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처럼 붉어지는 끔찍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실상이 밝혀진 곳이 바로 성주 소성리입니다.
따라서, 소성리에서 던지는 질문은 ‘현실을 새롭게 상상’하고,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라는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분단체제의 폭력적 구조가 이 땅에 심어놓은 ‘증오와 무관심’의 마음을 풀어내고 거듭나서, 하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믿음의 싸움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성서묵상 3. 바울의 고백 / 디모데후서 4장 6~8, 16~18절]
바울은 생명의 길을 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많은 위험과 고난을 감내했고, 수천수만 리 길을 여행하며 많은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섬겼습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끝에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7절) “나를 변론해야 했을 때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주님께서 내 곁에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16~17절)
바울은 로마제국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환상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삶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사회적 명망이나 ‘육체의 겉모양’에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예수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갈 1:14)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욕망의 번민을 물리치는 하늘의 길이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혜의 길이었습니다.
모순이 이중삼중으로 중첩된 세상에서 ‘고난을 극복’한 삶이란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우회할 수 없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긴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환란과 박해, 굶주림과 헐벗음과 위협을 경험하면서도 (롬 8:35), 자신의 달려갈 길을 십자가에서 찾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통해 얻는 열매는 여러 모양입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긴밀한 연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듣는 생명의 외침,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 현재의 고난 속에 임한 구원, 이 모든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동안 맛보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삶에서 계속되지는 않습니다만, 이 기쁨을 한 번 맛본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됩니다. 욕망과 폭력이 만들어놓은 환상에 갇히지 않고, 고난의 세상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평화를 향해 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고백이요, 소성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시대의 지혜입니다.
소성리는 평화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장소입니다. 거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평화의 길을 알게 되고, 거기서 던지는 질문을 풀면 평화의 세계를 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5년간 소성리를 지켜온 분들의 활동에 감사드리고, 그 활동에 연대의 마음을 보내면서, 우리도 평화의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하는 이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하나님, 우리에게 시대를 보는 믿음의 눈을 주시어, 예언의 꿈과 환상으로 현실을 새롭게 상상하게 하소서.
진리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사람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자연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하소서. 탐욕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불의에 대해서는 용기 있게, 저항에 대해서는 지혜롭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