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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김희헌 | 2023-02-05

by 김희헌 posted Feb 05, 2023 Views 26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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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2-0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58:1-9a, 고전 2:1-12, 5:13-20)

2023.02.05. 주현절 다섯째 주일

 

[납작해진 사회 속의 삶]

어제 갑자기 들려온 임보라 목사님 부고 소식에 많이 놀라셨을 줄로 압니다. 뜻밖의 일이라 가족들도, 섬돌향린교회를 비롯한 향린공동체 교우들도, 교단과 사회의 여러 동역자도 큰 슬픔을 느끼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지난 20년간, 우리 교회 부목사로 10, 섬돌향린교회로 분가하여 10, 긴 시간을 향린 공동체와 함께 해오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물줄기를 이루어가고 있었고, 소수자와 약자의 든든한 벗으로서 목회해 왔는데, 이렇게 급히 떠나서 모두 황망한 마음을 가누기 힘듭니다. 그간 홀로 얼마나 큰 짐을 지고 괴로워했을지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또 한편, 사회적 아픔도 큽니다. 어제는 지난 1029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 백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9년 전 세월호 참사와 유사하게 국민의 재난 상황에 국가가 없는 상황이 재발했지만, 정부는 책임 회피에 몰두하고 있고, 우리 사회는 지친 삶 탓인지 충분한 애도의 분위기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유족들과 종교인들이 영정사진을 들고, 시민들과 함께 이태원에서 시청까지 행진하고,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이웃의 아픔은 그들만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교우들께서도 마음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풍경을 가리켜 납작해졌다라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사회든 개인이든 정신의 높이와 마음의 깊이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숭고한 이상을 꿈꾸고, 이웃과 동행하며 마음 깊은 연대를 하는 등 삶에 꼭 필요한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정신세계는 인간 삶이 자본의 문화에 눌려버린 사회의 구조적 비극을 반영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일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지요. 그래서 현실주의자는 비관주의자가 되곤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여러 모양으로 심화하였고, 이런 체제를 개혁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비탄의 언어로 일컬어지는 신분 자본주의의 모습이 너무도 당당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절망하곤 합니다.

납작해진 사회에서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실패한 사람처럼 취급받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욕망과 충족 사이에 놓인 간격을 견디지 못하는 실존적 강박감이 강요되곤 합니다. 비교와 경쟁 속에 지친 사람들의 상대적 실존은 초라해지다가 자본의 그물에 걸려 버립니다. 다시 생명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맞고 있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의 길에 관한 예수의 말씀 / 마태복음 513~20]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이 말씀을 화두로 삼고 서성이다, 지난 월요일 속초에서 가진 서울노회 목회자들의 신년목회 세미나 참석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바다 위로 오르는 아침 해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평소에는 새벽 미명에 수평선 너머로 동터오는 붉은 빛을 보며, 시간의 경계선에서 신비함을 맛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해가 뜬 후에 벌어지는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해가 오르면 어두운 바다 위로 점차 밝은 길이 생겨나죠. 자신에게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치 격려하듯이, 태양은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들을 향해 바다 위로 길을 내어줍니다. 위태로운 파도를 모두 빛의 알갱이로 만들어 길을 낸 다음, 태양은 떠오르는 만큼 그 길을 달려서 모두에게 다가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빠르게 수면 위의 길을 달려옵니다. 그렇게 자기 앞에 거의 다다라 가슴에 안길 즈음에는, 그 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빛이 나지요. 그 길만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빛납니다.

그런데, ‘이제 아침이 되어 온 세계가 빛이구나하는 생각으로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태양 빛에 젖은 눈에는 세계가 캄캄해 보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면, 세계가 온전히 보이고,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빛이란 모두에게 얼마나 절대적 믿음이 되는지, 그리고 그 빛이 때로는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과장된 칭찬도 아니요, 허황한 약속도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큰 위기를 겪고 있던 당시 사람들, 좌표를 잃고 삶이 납작해져 버린 그들이 품고 일어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라.”(16) 예수에게서 빛을 경험한 제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착한 행실로 빛 된 삶을 살아야 할 과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은 위험한 것입니다. 스스로 착한 행위라고 여기는 것에서 인간이 실패하며, 모든 위선과 탈선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정의를 외면하는 것이 위선이라면, 정의를 세운다면서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것은 탈선이라고 말입니다. 삶이 납작해진 세계에서는 인간의 도리도, 정의로운 관계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그 세계에서 인간의 길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때 들리는 예수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라는 말씀은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좌표가 됩니다. 먼저 자기 마음에 길을 내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말씀을 품은 그 길이 맘에 먼저 나지 않으면, 힘들여 걷는 일도 부질없는 수고가 되기 쉽습니다.

 

[예언자의 믿음 / 이사야서 581~9]

인간의 길이 하늘에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차축 시대에 일찍 등장한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긍지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함석헌의 말로 풀어본다면, “사는 길이 발끝에 있지 않고 저 먼 앞에 있다.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지금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장차 올 것에 있다. 뵈는 것에 있지 않고 이치에 있다. 힘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생각은 매력을 잃은 듯합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악인들도 영웅이 되는 시대에는 시절의 격랑에 정의가 쓰러지고 평화가 잠식당해도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사야가 오늘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신 앞에서 자기를 비우는 금식을 하면서도 비운에 잠긴 태도를 보입니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합니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자기만의 삶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결국, 어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인간의 길인지를 놓치게 됩니다.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는 위태로웠고, 사람들은 일상적인 불안에 젖어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는 오랜 원한과 증오로 물들었고, 각자가 외세와 군사동맹을 맺고 형제를 침공하는 자멸의 길을 걸으면서 정의를 말했습니다. 시대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서도 잘못된 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고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규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되찾아야 할 인간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란, 의로운 길을 겸손히 걷는 것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이사야가 본 인간의 길입니다. 위태로운 파도와 시련의 언덕을 오를 때에도, 절대적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할 운명적 과제를 외면하지 말자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에게 기초를 둔 태산과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바울의 깨달음 / 고린도전서 21~12]

고린도 교회에 쓴 바울의 편지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가 고린도 교회에 전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의 증거’(μαρτύριον τοΘεοῦ, the testimony of God)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찾았지만, 혼탁한 문화에서 그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가, 그 도시를 둘러싸고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 영웅을 통해서 나타난 것도 아니요, 에게해로 이어진 항구도시를 장악한 거상(巨商)들의 풍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혼탁한 도시 고린도를 가리켜, 그 시대 사람들은 난봉꾼의 도시라고 불렀는데, 그런 곳에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는 냉혹한 현실을 증언합니다. 악에 맞아 죽은 현실의 참혹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의 삶, 다른 방향을 향한 인간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낮아짐으로써 세상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자기 십자가를 메고 가는 삶에 평화를 이루는 길이 있다고 십자가는 말해줍니다.

난삽한 시대에는 참된 인간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알려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드러나지 않으면 위대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꾸미는 일에 능한 광대가 무성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삶이란 고요한 곳에서 빚어집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계절을 따라 꽃이 피듯이,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 세상이 지탱됩니다.

바울은 이 삶의 진실을 어떻게 전해야 했을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은 지혜에서 나온 그럴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바울의 이 말은 그 옛날 이사야가 가진 꿈을 잇고 있으며, 참된 길을 가르쳐준 예수에게 믿음을 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현실은 중첩된 위기를 보여줍니다. 앞으로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신 예수의 말씀은 우리를 이끌 수 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전해준 말씀을 읽으며, 오늘의 묵상을 마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가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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