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 (사 50:4~9a, 빌 2:5~11, 마 27:11~54)
2023.04.02. 종려주일, 4・3항쟁 기념주일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4・3항쟁 기념주일입니다. 제주 4・3항쟁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많은 갈등과 학살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1948년 제주 민중들이 분단을 고착화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항거를 했을 때, 당시 미 군정은 이를 이념적 갈등으로 몰아 수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주 4・3항쟁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역사에 대한 반추만이 아니라, 그 비통한 분단의 역사가 칠십여 년을 지나도록 이어지면서, 여전히 각종 전쟁연습과 국가보안법이 실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 4・3을 우리가 ‘항쟁’으로 부르며 기억하는 것은, 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의 과제를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분단국가에서 최고의 선교 목표는 통일’이라고 고백해왔습니다. 이 마음을 되새기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낸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시대의 고통과 고난도 함께 생각하며, 성서의 가르침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분단의 대결과 갈등이 길게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야 할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분열과 대립이 내면화되어서 모두가 앓고 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의 성서묵상을 거기에서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종려주일을 연상하는 여러 이미지가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메시아를 환호하던 군중들,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을 접수하려고 했던 제자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길은 달랐습니다. 예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의 선택 사이에는 거대한 간격이 있었습니다. 종려주일 성서묵상은 바로 그 틈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간 시대의 예루살렘은 식민 질서의 모순이 중첩된 곳으로서, 억압과 풍요,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향해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예수 일행과 환호하는 군중들, 그리고 이어진 배신과 심판으로 이어진 십자가의 길을 그려보면, 그 일주일이 마치 인생의 압축이자 역사의 압축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거대한 억압의 세계를 새로운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는 예수의 꿈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군중들의 환호가 이내 조롱과 배신으로 변할 때,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익숙한 좌절이 예수에게도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낙심하게 하는 원인이 도리어 구원의 계기가 되는 역설적 신비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을 되새기기 위해, 구원의 길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걷는 예수의 고단한 발걸음에 집중하게 됩니다. 인간의 길과 하나님의 길 사이에서 보여준 예수의 선택, 그 발걸음의 동선이 오늘 우리의 좌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수의 마지막 날, 다섯 장면 / 마태복음 27장 11~54]
오늘 복음서 본문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난 속의 예수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오늘은 그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는 과연 어디 즈음에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그려보려면, 몇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의 마지막 날’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구성한다면, 5막으로 구성된 배경이 필요할 것입니다. 첫 번째 막은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는 예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무대 중앙에는 총독 빌라도와 헝클어진 모습으로 그 앞에 선 예수가 있고, 그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둘러 서 있습니다.
먼저 빌라도가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이 질문은 극형으로 몰고 가려는 로마 총독의 심문일 수도 있고, 예수를 기소한 사람들의 죄증 설명을 재확인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가 대답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You say so). 이 대답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가 한 유일한 말입니다. 자신에 대한 변론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있을 자신의 침묵을 예고하는 짧은 대답으로 들립니다. 주변에 있던 대제사장과 장로가 나서서 예수를 고발하지만, 예수는 침묵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사람들이 저렇게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는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답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왜 그랬을까요,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물음을 남긴 채 2막으로 넘어갑니다. 재판정 가운데 빌라도가 앉아 있고, 그 앞에는 두 정치범, 바라바와 예수가 서 있습니다. 이들을 둘러싸고 대제사장과 장로들만이 아니라, 배심원 역할을 하게 될 군중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2막의 주제는 로마의 간교한 통치행위 속에서 벌어진 식민지 백성의 가련한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민족 최대 명절 유월절에 로마는 식민지 민중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어서 불만과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통치 방식을 선보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 제국의 기만은 험난한 세태의 질곡 속에 교묘히 감추어지게 됩니다.
빌라도는 두 죄수를 사람들 앞에 세웠습니다. 마태는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당시 남성에게 흔히 붙여진 ‘예수’로 같았다고 말합니다. 한 예수는 ‘바라바’라는 별명을, 다른 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이 이름의 의미를 안다면, 이 장면이 얼마나 잔인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라바’는 ‘바르(bar) 아바(abba)’ 즉 아바의 아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요, ‘그리스도’는 오랜 세월 기다린 구세주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는 같은 이름이요, 민중들의 염원에서도 서로 다를 수 없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의 잔인함 앞에서, ‘바라바 예수’를 부르짖은 무리(오클로스)는 기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다가 태도를 돌변한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가는 신비로운 역설을 남깁니다.
3막과 4막은 장면을 바꾸면서 보여주는 여러 군상입니다. 3막은 총독관저에서부터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이 확정된 예수를 마음 놓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로마의 군인들, 그 틈바구니에서 잠시 예수에게 쉴 틈을 제공한 구레네(Cyrene) 시몬의 의도치 않은 우연한 노동, 그렇게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역사의 시계는 흐르면서, 마침내 외로운 잿빛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4막이 올라갑니다.
정오부터 세 시까지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태양은 자신의 빛을 잃었고, 그 어둠 속에서 더욱 분주한 이들은 자기 역할을 합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십자가가 못 박고, 그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갖고, 예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신도 믿지 못할 죄패를 붙이면서, 자신의 악행으로 도리어 오래된 예언을 이루어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모욕합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이 말은 예수를 향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스스로 조롱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은 예수를 기소한 대제사장이나 율법학자가 내뱉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라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마태는 이 모욕과 조롱으로 가득 찬 골고다 언덕에 마지막 한 장면을 추가하면서 그 어둠을 짙게 그려냅니다. 두 명의 강도에 관한 마가의 기록을 바탕으로 삼은 누가는 마태와는 다르게 말하는데, 우리는 누가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는 한 강도의 입에는 절망 섞인 모독의 언어를 담고, 다른 강도에게는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믿음의 언어를 담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그런 여지를 모조리 없애고, 두 강도 모두 예수를 향해 욕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모든 일이 태양마저 빛을 잃은 대낮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제5막은 유난히도 말이 없는 ‘마태의 예수’가 입을 열어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간 인간이 쏟아놓은 절망의 심연을 보여주는 부르짖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ê·lî, ’ê·lî, lā·māh ‘ă·zaḇ·tā·nî, (히) 시 22:1 / (헬) Θεέ μου, Θεέ μου, ἵνα τί με ἐγκατέλιπες),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의 이 부르짖음은 오래전 시편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자신이 경험한 참혹한 시대의 실상과 그의 절망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식민지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관한 것이요, 참된 길을 찾던 인간이 마지막 지점에서 절망하며 외치는 탄식입니다.
예수의 이 외침을 오인한 사람은 그가 단지 엘리야의 기적을 부르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포도주를 마시고 기력을 차리게 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직 죽음으로써, 단지 죽어가는 자기 몸으로써 답을 합니다. 훗날 교회는 예수의 이 절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런 신학적 해석에 앞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죽음에 대해 온 세계가 대답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성전 휘장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며 무덤이 열리면서 잠자던 성도가 되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관한 해석을, 도저히 그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에 담아 전합니다. 제자도, 율법학자도, 무리(오클로스)도 아닌, 로마 군대 지휘관 백부장의 말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의 독백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길’을 ‘인간의 길’과 구분합니다. 그 두 길은 다르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길은 아닙니다. 인간이 참된 길을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을 물어야 하고, 두 길을 함께 걸을 때 그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같을 때는 그 길의 방향이 ‘낮은 곳을 향할 때’입니다. 그 상징이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길의 풍요와 신비에 대해서 복음서는 로마 백부장의 독백으로 담아냅니다. 대단한 역설입니다.
예수가 걷는 십자가의 길에, 적어도 오늘날 교회를 가득 채운 신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한 기적의 신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신은 예수와 무관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적의 신은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거치는 동안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와 동행하셨다면, 그분은 고난을 겪는 이들의 동반자로서 함께 수치를 당하면 당했지, 기적을 일으키며 찬양을 듣는 존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본받아 사는 삶을 찾고자 한다면, 더욱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종의 노래 3, 사 50:4~9a / 케노시스, 빌 2:5~11]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참된 인간의 길, 그 길에 관한 성서의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언서에 나오는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그 ‘하나님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 (사 42: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받으며 (사 53:3),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겪으면서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 53:5/7)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받은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하지만 (사 53:4), 하나님은 그를 ‘온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 49:6) 바로 그것이 포로기라는 시련의 용광로를 거친 예언자 제2 이사야가 말한 네 개의 ‘종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세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하나님의 종’이 될 사람에게 필요한 세 가지 자질을 말합니다. 그것은 지친 사람을 격려할 수 있는 말과 (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사람의 모욕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마음(6-7절)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성서는 오랫동안 찾아왔는데,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를 넘어 이사야가 마침내 찾은 길은, 예수의 마지막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발견한 그 길을 찾기까지 인류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 번째 ‘종의 노래’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은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주님을 경외하며, 누가 그의 종에게 순종하느냐? 너희가 모두 불을 피우고, 횃불을 들고 나섰지만, 너희가 피운 그 불에 너희가 탈 것이며, 너희가 들고 나선 그 횃불에 너희가 소멸될 것이다. 내가 직접 이 형벌을 너희에게 내리고, 너희는 이 고문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 (사 50:10-11)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담긴 신비로운 가르침에 주목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오늘 본문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빌 2:6~8) 이것은 바울의 창작문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가 고백한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사야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믿음을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그 가르침을 당시 마케도니아의 자치도시였던 빌립보에 세워진 신앙공동체에 전하면서, 예수를 따를 사람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자기를 비우는 종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런 권면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신앙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전하면서도 ‘시기하고 다투면서’ 좋은 뜻을 갉아먹는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15/17). 따라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주십시오.”
바울은 유럽의 관문 빌립보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갔던 사람들에게 온 마음으로 예수의 길을 전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길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는 삶’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도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주간을 맞으며, 우리도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갑시다. 예수의 길을 따를 사람들에게 주는 바울의 권면, 오늘 본문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읽으며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2~15)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고난주간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빛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주께서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