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거듭난 삶 (행 2:14a,36-41, 벧전 1:17-23, 눅 24:13-35)
2023.04.23. 부활절 셋째 주일
[부활의 공동체 / 사도행전 2장 14a, 36-41절]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거듭나서 새 삶을 펼쳐가는 과정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마칩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외친 첫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이어서 펼쳐간 삶의 양식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귀고 빵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서로 경외감을 품고 살았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일도 이어졌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소유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이상사회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알려진 이 공동체의 삶은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는데, 사실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욕망과 권력으로 비뚤어진 세계가 늘 위협하였고, 새로운 공동체를 지어갈 때는 난관과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긴 역사를 흘러오며, 경제공동체로서의 모습은 거의 잃었고 신앙공동체로서의 명맥만 이어왔는데, 이 신앙이 관념적인 데 그치면 관계의 파탄을 겪기도 했지만, 그 믿음이 진실할 때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공동체로서 위대한 역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늘 우리 삶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 맥을 이어가는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날 세계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이어가는 삶을 가리켜 ‘생명, 평화, 정의’라고 말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에게 안겨준 과제는 샬롬(평화)이다. 샬롬은 생명 사랑 운동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는 정의가 기둥이 되어 있는 평화의 나라이다. 정의란 폭발하는 사랑, 사랑의 사회적 표현이다.” (문익환 전집 3:149)
이것은 성서의 기본 정신을 풀어준 것인데요.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생명이 성서가 살아온 삶의 터전이라면, 평화는 성서가 지향하는 목표요, 정의는 성서의 정신을 움직이는 맥박이다.’
이 가운데, 오늘날 교회에서 약해진 것이 정의, 성서의 맥박입니다. 맥박이란 심장 박동으로 뻗어가는 피가 동맥의 벽에 닿아 생기는 파동으로서, 그 강도나 속도로 건강상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정의라는 ‘성서의 맥박’이 약해지면, 성서의 정신이 희미해지지요. 그래서 진취적인 교회는 ‘정의’에 관한 감각을 유지하는데 민감합니다.
제1 성서에서 600번가량 반복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미슈파트(מִשְׁפָט)와 체다카(צְדָקָה)라는 단어입니다. 정의 또는 공의로 번역되는 이 두 개의 단어가 맺는 관계가 ‘정의의 감각’을 알려줍니다.
‘미슈파트’는 남성명사입니다. 그것은 재판관이 내리는 판결(judgement)을 의미합니다. 각 사람에게 정당한 몫을 주기 위한 엄격한 ‘행동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미슈파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슈파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체다카’입니다. 체다카는 여성명사로서, 정의로운 행동을 가능케 하는 ‘인격의 바탕’을 의미합니다. 규범과 법령의 엄격함을 넘어서, 약자를 향한 ‘친절과 박애와 관용’을 포괄하는 것이 체다카입니다.
성서가 정의를 말할 때는 남성명사 미슈파트와 여성명사 체타카는 함께 움직이는데,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정의의 리듬, 정의의 감각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미슈파트)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체다카)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4)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 신앙공동체의 질서는 이 정의의 감각에 달려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엄격한 판단을 위한 남성적 미슈파트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의를 자비롭게 이루는 여성적 체다카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엇갈리는 비극을 자주 경험하지요. 미슈파트에 관한 눈이 가려져서 징벌이 필요한 때에 용서를 말하고, 체다카의 눈이 가려져서 치유가 필요한 곳에 보복을 실행하는 비극이 역사에서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 둘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따라 인격의 자질과 공동체의 품격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이 고단한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 누가복음 24장 13-35절]
복음서 본문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작자인 마가는 시골로 간 두 사람과 제자들의 불신에 관한 짧은 이야기로 전달했는데, 누가는 그것을 길게 늘여서 제자들의 부활체험에 관한 이야기로 바꿉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 즉, ‘따뜻한 샘’으로 가는 길을 걸으며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려진 눈을 뜨게 되었다는 부활의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부활체험이 가진 비일상적 특이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먼저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며 걷고 있었는데, 정작 동행하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눈이 가려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은 예수와 함께 길을 걸고 대화하면서, 예수에게 ‘예루살렘에서 오면서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며 그들이 겪은 일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벌어진 사건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좌절된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우리는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다”라고 표현하면서도(21절), 정작 자신들이 소망을 건 예수가 옆에 걷고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이 가려졌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경험과 이해’의 간격, ‘인식과 담론’의 분열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본다 하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며 걷는다는 것 자체가 부활한 예수의 명료한 증거인데, 그 동행의 사실성 자체가 부활의 진리체험과는 다르다는 성서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진리체험은 경험의 사실성에 있지 않고, 눈이 열려야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들의 눈이 열린 것은 성찬을 나누고 나서입니다. 예수께서 빵을 축복하고 떼어서 나누어 주자, 그들은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 예수를 깨닫게 된 것은 순간이자 찰나(刹那)요, 깨닫게 된 순간 예수는 사라졌다고 본문은 표현합니다. 진리는 소유할 수 없다는 깊은 진리를 말하려는 것인가요? 그들은 더는 부활의 증거인 예수를 곁에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진정한 부활이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도상에서 나누었던 뜨거웠던 대화, 집 안에서 이루어진 친교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서, 자신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자신들만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 모두 부활체험을 하고 함께 모여있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의 신비를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 이야기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눈이 열리는 체험’입니다. 눈이 열리면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삶은 새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부활이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부활을 경험하셨나요? 신앙인의 부활체험은 여러 모습을 갖고 있고,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도 그러합니다. 부활체험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믿는 부활>(대화문화아카데미, 2012년)이라는 책을 보면, 11명의 기독교 지성이 자신의 부활 신앙을 말하는데, 자기가 ‘가르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가슴으로 믿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꾸밈없이 들려줍니다.
기장 김경재 목사님은 부활 못지않게 현재 생명현상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그 생명현상을 마감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물리적인 사체의 소생’은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영적인 몸’으로의 변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게 될 삶의 가능성은 믿는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영적인 몸)
예장 유경재 목사님과 감리교 이계준 목사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부활 신앙이란 저 세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새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양모 신부님은 여기에 더해 우리 인격이 영글어가야 하나님이 수확해 가신다고 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보장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적 삶/깨달음의 중요성)
심상태 신부님은 부활을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하고, 김승혜 수녀님은 그것을 생태학적으로 발전시켜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몸의 부활, 즉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주적 차원의 부활)
박상증 목사님은 부활 신앙의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악을 자행한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부활이란 세상 권력을 넘어서는 정치혁명의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서광선 목사님도 부활의 언어는 저항의 언어요, 변화의 언어요, 혁명의 언어라고 말씀합니다. (부활 신앙의 정치적 차원)
이상의 의견을 종합하면, 부활 신앙의 4가지 성격이 정리됩니다. (1) 부활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희망으로서, 그것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의 토대라는 점, (2) 그렇다 하더라도, 부활 신앙이 주목하는 지점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있다는 사실, 단순히 현실 자체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과 깨달음의 정진이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는 점, (3) 부활이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우주적 차원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점, (4) 부활 신앙의 알맹이에는 변혁적 성격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가 기독교 부활 신앙의 대체적인 내용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신앙생활에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의 삶 / 베드로전서 1장 17-23절]
서신서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권면을 합니다. 첫째는 17절 말씀,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두 번째는 22절 말씀,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두려운 마음’을 지키며 ‘뜨거운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거듭난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표현은 신앙인의 자기 인식,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이라는 표현입니다. 원문으로 읽으면 ‘순례(παροικίας, sojourning)하는 당신의 시간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Πατέρα)로 부르는 신앙인은 왜 정착민이 아니라 나그네, 순례자일까요?
본문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어(18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조상들이 물려준 삶이 아무리 풍요롭다 하더라도, 더없이 안전하다 하더라도, 한없이 영광스럽고 명예롭다 하더라도, 거기에 초막을 짓고 들어가지 말고 ‘산 밑으로, 성문 밖으로’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사는 다른 방식의 삶, 믿음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본문은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사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성된 삶의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은과 금’은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것 역시 ‘썩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그네의 삶은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향해 열린 믿음과 소망’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삶, 새로운 삶을 여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나그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정의와 자비의 길로 이끄시는 분을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깨치고, 진정한 인생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거듭나는 삶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질곡은 이 믿음이 희미해진 데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중심으로 삼고 세계를 구성하는 정착민의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집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문명입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환경이 자기를 위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기에,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에 빠집니다. 거기에서 공평의 미슈파트는 이기주의에 묶이고, 정의의 체다카를 말하지만 도리어 세계는 파편화됩니다.
우리 세계의 주류 철학은 여전히 유물론적 무신론입니다. 이 철학은 정신의 가치를 물질이 만든 부수 현상으로 보며,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이해하는 철학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만이 물질의 진화를 이끌며, 변화하는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하버드대 철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입니다.
그는 인간은 퇴락할 수도 있고 향상될 수 있으며, 종교가 선(善)일 수도 있고 악(惡)일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더 나아지고, 종교가 선일 수 있는 것은 ‘의로움에 관한 기준’ 즉, ‘정의의 감각’이 변화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자기/집단을 보존’하는 것을 의롭다고 여기는 수준에서, ‘새로운 미덕’을 추구하는 것을 의롭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아갈 때, 인간도 종교도 향상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정의로 여기는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삶을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도약하는 것이 인간의 향상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축복을 얻기 위해 신의 의지를 살피는 단계의 신앙에서, 신의 자비를 닮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진보’요, 거듭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린 믿음으로 거듭나는 삶,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의 얼굴이 비칠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본문이 주는 마지막 말씀을 읽으며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벧전 1:23)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어두운 마음으로 엠마오를 향한 두 사람이 따뜻한 샘 예수의 말씀과 성찬을 받고 눈이 열려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에도 부활의 주님 찾아오셔서, 심령을 밝혀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열린 믿음으로 자유롭게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