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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평화가 있기를 | 김희헌 | 2023-05-28

by 김희헌 posted May 28, 2023 Views 13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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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5-28

평화가 있기를! (2:1~21, 고전 12:3b~13, 20:19~23)

2023.05.28. 성령강림주일

 

[평화가 있기를! / 요한복음 2019~23]

성령강림 주일 아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인사를 함께 나눕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이번 성령강림절에 우리 교회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새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겠지요.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성령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 20장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스승이 부활한 날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스승을 죽인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인사를 전합니다. ‘에이레네 휘민’(Ερήνη μν),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두 번 반복하여 전한 이 인사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걷어낼 평화의 인사입니다.

평화는 손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삶에는 좀처럼 평화가 깃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못 자국과 창 자국에 피어난 평화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렇지 않다, 고난의 삶에 도리어 깊디깊은 평화가 피어오른다’, 이런 무언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영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서로를 용납하며, 하나가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고, 하늘의 사랑 아가페를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종교나 문화와는 다른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사람은 고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이요, 부유한 사두개인이 천민이라고 조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삶은 그리스 귀족주의와도 달랐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보편적 인류애, 율법주의와는 다른 진정한 자유의 종교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은 세상의 모든 차별과 장벽을 없애고,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그리스인에게 사랑은 노예의 고통에 기초한 자유민들끼리의 사랑이요, 유대인에게 사랑은 율법을 지키는 동료 유대인들과의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율법에 저촉되면 살려야 할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교도로 조롱받던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의 대명사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영의 눈으로 세상을 달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바울도 예수의 그 정신을 따랐습니다.

그 정신이 오늘 서신서 본문, 고린도전서 1213절에 나옵니다.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그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삶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며 이 아침 이 자리에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오순절 아침에 일어난 사건 / 사도행전 21~21]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장벽으로 막힌 땅이 서로 이어져,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아침,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부활한 지 50일이 되었을 때, 한곳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이 놀랍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그다음에는 불길이 일 때 갈라지는 것과 같은 불의 혀가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유심히 살펴볼 두 단어는 불길처럼 갈라진 혀성령에 충만하여 말하기 시작한 방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다르게 번역된 이 단어는 성서 원문을 보면 같은 단어 글롯사’(γλσσα)입니다. 이 단어가 3절에서는 로 번역되고, 4절에서는 방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원문대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진 글롯사가 각 사람에게 내려앉자, 그들이 모두 글롯사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글롯사’()를 받아, 자기 입으로 글롯사’(방언)를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영과 땅의 사람이 이어진 사건이 바로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이어지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방언(글롯사)을 말하기 시작하자, 서로 다른 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지방의 말로 듣게 된 것입니다(6/8). 사도행전 본문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령강림 사건에서 놀라운 대목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8절에서 표현합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은 각기 다른 말, ‘디알렉토’(διαλέκτῳ)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글롯사를 말한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디알렉토를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주의 깊게 보지 않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주는 교훈을 오해하게 됩니다. ‘방언이라는 종교 현상에 현혹되어,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관심을 가진 형식적인 신앙이 많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그 종교적 엑스타시 속에서 환상과 방언에 치중하는 종교적 형식주의가 범람합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행위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고, 연습해서라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종교적 욕망은 영어를 잘 하려고 혀를 수술하는 세속적인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의 보편적 경험 가운데 방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말로 열띤 발언을 하는 종교적 몰입행위가 가 대부분 종교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주목하는 성령 사건은 그 현상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사건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린 글롯사를 말할 때, 사람들이 서로 각자의 말 디알렉토로 알아듣게 된 소통의 사건입니다.

성경의 전체 구도로 보면, 이 성령강림 사건은 인류가 죄를 지어 서로 흩어진 그 옛날 바벨탑 신화에 담긴 분열 사건을 치유한 이야기가 됩니다. 더 나아가, 성령강림 사건은 단지 종교적 사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언어 글롯사가 그들의 귀에 들릴 때, 그들이 들은 것은 로마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나 헬라어가 아니라, 제국의 식민지로 있던 각 나라의 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가진 놀라움은 제국의 방송에서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은 데 있습니다. 7절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식민지 변방 수탈의 땅 갈릴리, 그 보잘것없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국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고, 각자의 말로 선명하게 들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도행전은 성령 사건의 참된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민족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들리지 않던 고통의 목소리를 들리고,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언어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놀라움을 보고 말하길, 그들이 술에 취하였다라고 하며 조롱합니다. 그런데, 정작 누가 조롱받아야 할 사람인가요?

이점에 대해서, 베드로가 예언서의 말씀을 토대로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를 해설합니다. 그것은 요엘이 전한 말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영이 부어질 때, 아들만이 아니라 딸도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자유민들만이 아니라 노예도 남종 여종 차별 없이 부어질 것이라는 위대한 평등 세상에 관한 하늘의 약속입니다.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의 말로 하면, 떠돌이 난민도, 외국인 노동자도, 성 소수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사건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로마가 심어놓은 차별과 공포, 그 세계를 움직이는 욕망과 지배의 질서와는 다른 세계를 꿈꾼 믿음의 공동체, 그 예언과 환상과 꿈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성령강림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 성령강림의 사건이 역사의 화산맥을 타고 흐르며 계속 분출되면서 하나님의 역사창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역사가 새롭게 되는 것은 거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늘의 약속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그 진리가 진실할수록 혹독합니다. 황량한 광야 길로 나선 출애굽 백성들이 스스로 의심하면서,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하고 말하면서 시험당한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광야를 살아가며 절망과 유혹에 시달리는 삶이 반복됩니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움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요엘의 예언처럼, ‘해가 변해서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해서 피가 되는세계가 반복됩니다. 강대국에 머리를 조아리고, 동족을 향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세계에서는 낮의 진리가 조롱당하고, 밤의 진리가 살육당합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들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공동체 / 고린도전서 123b~13]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3) 이 말씀은 갈라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준 교훈입니다. 세계가 갈라지는 이유는, 저마다의 능력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 재능과 은사에 매몰되어 자아도취에 빠진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준 교훈은 이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4/7) 이것은 기계적 평등주의가 아니요, 공동체라는 미명으로 이루어지는 착취도 아닙니다. 하늘의 영을 입고 거룩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그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이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다.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한 성령을 마신다는 믿음이야말로 거룩한 영을 입은 사람, 성령의 공동체에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교회에서 한국민중신학회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발표자는 스리랑카 출신으로 현재 영국 더블린 트리니티 신학교의 주드 L. 페르난도 교수였습니다. 그가 발표한 것은 스리랑카 출신 두 신학자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었는데, 해방신학을 섬김의 신비주의로 재해석하였습니다.

그가 소개한 두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은 저에게도 깊은 영향을 준 가톨릭 신부 알로이스 피어리스 선생님입니다. 피어리스 신부는 스리랑카의 복잡한 갈등 상황 속에서 예수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가 살아간 현실은 이중적인 갈등구조 속에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엘리트로 구성된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가난한 불교도 중심의 민족 싱할라족이 당하는 고통의 현실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인구의 다수파인 싱할라족 중심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타밀족의 고통의 현실이 있습니다. 이 타밀족은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도가 중심입니다.

피어리스 신부는 이런 사회적 억압과 종교적 차별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예수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면서 아시아의 해방신학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처럼, 기독교회는 아시아 종교를 요단강으로 삼고 그 지혜를 배워야 하며, 예수께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졌듯이, 기독교회는 아시아인의 가난한 삶의 현장을 갈보리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 가르침은 성령의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삶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교회가 새 예배당에서 펼쳐갈 선교도, 그렇게 포용적이며 근원적인 방식으로 예수의 길을 찾아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때로는 혼돈과 고통이 우리를 덮치겠지만, 그때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안에 평화를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전한 평화는,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거룩한 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이 거룩한 영으로 동행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약속을 안고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3:17)

신앙인이 구할 참된 평화는 성공이나 성취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삶도 단지 인내의 기간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 빛이 비치듯, 거룩한 생명의 영이 우리 삶에, 이 역사에 임하는 것을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성령강림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붙든 진리가 진실할수록 삶은 더 가혹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룩한 영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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