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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삼위일체의 축복 | 김희헌 | 2023-06-04

by 김희헌 posted Jun 04, 2023 Views 1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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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6-04

삼위일체의 축복 (1:1~2:4a, 고후 13:11~13, 28:16~20)

230604. 성령강림절 1 (삼위일체주일), 환경주일, 6월항쟁기념주일

 

새 예배당 건축작업이 완료되고, 준공검사 절차도 마무리되어서, 다음 주에는 새 예배당에서 입당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6월 첫째 주일은 한국교회가 환경주일로 삼고, 삶과 믿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성찰하고 다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광야 생활로 인해 환경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제약이 있습니다만, 특별히 오늘은 평신도 하늘뜻펴기로 <명동 재개발2지구 세입자 대책위원회> 총무로 활동하는 강성진 교우의 증언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번 주에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광화문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여전히 명동에 남아 외로운 싸움을 진행해야 할 네 분의 교우들과 함께하는 세입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싸움은 단지 상인들의 생존권 쟁취의 의미만이 아니라, 개발과 성장으로 일관해온 우리 사회의 생존방식과 문명건설 방향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환경 주일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산업문명과 도시문화에 관한 성찰입니다. 성장과 번영을 목표로 삼은 방식의 삶은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일을 구조화합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기댄 편리함과 도시 외관의 화려함에 적응하여,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생태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으며, 성서가 말하는 평화의 교훈도 외면하곤 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생활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한 강성진 교우의 증언은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목소리가 될 것입니다.

 

[강성진 교우 증언]

안녕하세요. 저는 명동성당 맞은편에서 주방 만게츠를 운영하는 강성진입니다. <명동재개발2지구 세입자대책위>201810월경 모이기 시작했고, 1~2주에 한 번씩 정기적인 모임을 하며 각 가게의 상황과 진행 과정을 공유했습니다.

2018726일 주방만게츠와 이감헤어 건물주로부터 재개약하자는 내용증명을 받았고, 20188월 초 제가 건물주를 직접 만나 이 사실을 확인하고, 건물주가 같은 건물의 다른 가게에 대한 의견도 9월 초에 직접 듣겠다고 했습니다.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그리고 다른 가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던 건물주가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2019130, 설 연휴 바로 전날 명도소송 소장을 보냈습니다. 명동2지구 <세대위>에 처음으로 온 내용증명, 첫 명도소송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도소송 청구원인은 노후화된 건물이어서 붕괴의 위험이 상존하여 부득이하게 재건축해야 하고, 계약을 해지하려고 하였으나 계약서상에 명시한 내용을 어기고 권리금을 요구하여 부득이하게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 소장 부본의 송달로써 계약의 해지 통보에 갈음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재개발 지역에 재건축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유이고, 재개약하자고 내용증명은 왔어도, 저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제가 권리금을 요구했다는 것 역시 거짓입니다. 계약기간도 7개월이나 남은 상황이었고, 같은 건물에 있는 이감헤어는 계약기간이 11개월이나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소송을 시작한 건물주 쪽 변호사가 저에게 먼저 합의하자고 제안했고, 저는 건물주가 직접 연락하면 당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해 주겠다는 말까지 했지만, 건물주가 저와 직접 통화하는 것이 껄끄럽다는 이유로 통화를 거부했고, 소송이 진행되었습니다.

201981일 명동2지구 <세대위> 위원장이신 베로니카화원에도 명도소송 소장이 송달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건물을 시행사에 매각하고, 등기까지 넘긴 전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명도소송을 한, 명의도 없는 사람이 세입자에게 시행사와의 건물 매각조건을 이유로 소송을 진행한, 말도 안 되는 소송이었습니다. 결국 전 건물주가 보낸 명도소송은 소송의 이유가 되지 않기에 기각되었고, 그 판결문에서 건물주와 시행사가 어떤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건물주와 시행사가 체결한 계약조건에 사업에 장애가 되는 세입자 등의 명도에 대하여 사업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잔금 지급 7일 전까지 건물주의 비용과 책임으로 완전 정리 후 인도하여야 한다.” 결국 시행사가 세입자를 바라보는 입장은 사업에 방해되고 사업추진에 지장이 되는, 정리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2019116<정비계획 변경안 주민공청회>가 명동주민센터에서 개최되었지만, 구청에서는 주민이자 구민인 세입자들에게는 연락조차 줄 이유가 없다고 하였고, 이의를 제기하자 개최날짜와 시간을 알려줘서 겨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추후 중구청에 방문하여 주민공청회에 왜 주민들이 참석할 수 있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고 항의하니 다음부터는 용어에(주민공청회란 용어에) 신경 쓰겠다.”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건물들이 하나하나 시행사에 매각되어가고, 전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소송을 했다가 패소했던 베로니카화원도 시행사로부터 다시 명도소송 소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게가 아드님과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아드님에게도, 가게 위층은 주거 공간이라는 이유로 세대주인 사장님께도 가족 전원이 명도소송 소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2020년도 1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명동2지구 <세대위>에 계셨던 분들도 가게 운영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가게는 장사를 접게 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가게들은 코로나 시기에도 가게 월세를 밀리지 않기 위해 대출을 받아서라도 월세를 냈습니다.

2021925일 토요일 오후 411분경 <세대위> 가게 중 한 곳 입구 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대부분 가게가 장사하지 않았고, 재료를 쓰다 남은 것을 모아놓은 통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화재가 날 수도,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몇일 전에도 담배꽁초를 버리는 깡통 밑에 물이 조금 담겨있음에도 불길이 솟구치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2021108일 금요일 새벽 <명동2지구 <세대위>>에 첫 강제집행이 있었습니다. 강제집행 계고장을 보내고 나서 22일 만에 집행이 이뤄진 것입니다. 바로 다음 날 오전 11시 용역들이 둘러싸고 있는 사진관 건물 앞에서 명동2지구 <세대위>는 기자회견을 하였고, 그 기자회견을 방해하는 용역들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세대위>는 중구청 앞에서 출근 시간과 점심시간 매일 2차례의 피켓팅, 시행사 KCH의 사무실이 있는 무역센터 앞까지 피켓을 들고 가서 매일 피켓팅, 명동 재개발 2지구에서도 매일 한차례의 피켓팅과 일주일에 한 번 전체 피켓팅을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시, 중구청, 서울시의회, 중구의회, 지역구 국회의원, 국민신문고, 국회의사당에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부 진정을 넣고 면담요청서도 넣었지만 모든 진정서가 중구청 도심정비과 담당 주무관에게 보내져서 담당 주무관이 똑같은 내용을 복사해서 모든 민원서류의 답을 하는, 말도 안 되는 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0225월 선거철 때 중구청장 후보로 나온 민주당 서양호 후보와 국민의힘 김길성 후보의 캠프에 찾아가 면담요청서를 넣었고, 두 후보에게서 똑같이 구청장 당선 후 면담을 요청한다면 받아주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청장에 당선된 현 김길성 구청장님은 몇 차례 면담요청서를 넣었지만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20234월에 다시 중구청장과 도심정비과장 앞으로 면담요청서를 명동2지구 공대위 이름으로 넣었고, 면담은 또다시 거절되었습니다. 담당 주무관이라도 만나 지금 명동재개발2지구 상황을 알리기 위해 51<세대위><공대위>가 중구청을 방문하였고, 우리의 의견을 확실하게 전달하였습니다.

대화를 하자. 세입자들이 지금 원하는 것은 대화이다. 시행사가 세입자들에게 해 왔던 이간질과 갈라치기가 아닌 중구청이 주관하는 자리에 시행사 측에서도 책임 있는 사람이 참석하고, <세대위>가 참여하는 3자 대화를 하자. 시행사가 진심으로 <세대위>와 대화를 원한다면 소송과 강제집행 등으로 <세대위>를 협박하지 말고 대화하는 기간에 강제집행과 추가적인 소송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 주면 <세대위>도 대화에 성실하게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중구청도 우리의 뜻을 분명하게 시행사에 전달하겠다고 하였고, 중구청이 시행사에 전달한 내용과 시행사 측 답변을 공문으로 우리에게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중구청이 59일 시행사에 면담 내용과 우리의 의지를 전달하였으나, 510일 집행관과 대리인이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주방 만게츠517일까지 퇴거하지 않으면 18일부터는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계고장을 문틈에 넣고 갔습니다. 대화하자는 <세대위>의 의견을 전달받고 단 하루 만에 돌아온 답변은 강제집행 계고장이었습니다.

오전 1030분쯤 강제집행 계고장을 문틈에 넣고 갔고, 11시쯤 시행사에서 세입자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람이 저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장님 회사법무팀과 저는 다른 부서이니 좋은 마무리를 위해 전화 부탁합니다.” 시행사의 이런 이중적인 행동으로 인해 <세대위>는 시행사를 불신하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2023518일 강제집행이 가능한 날짜가 되자마자 집행관과 열쇠 수리공까지 함께 농성장 안으로 밀고 들어와 처음에는 계고장을 붙이러 왔다. 그다음에는 서류를 확인하려고 왔다. 나중에는 사실은 만게츠 사장을 만나러 왔다.’”라고 말을 계속 바꿔가며 제가 실질적으로 가게를 점유하고 있는지 확인 작업을 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강제집행을 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집행관이란 사람조차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강제로 문을 따고서라도 들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다양한 삶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장사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명동재개발2지구에서 장사하시는 분들, 그리고 저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삶이 가게에서 이루어집니다. 잠에서 깨면 출근해서 가게에 도착한 식재료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친구를 만날 때도 친구들이 가게로 찾아와 가게에서 만납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가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장사를 하는 것이, 손님을 맞이하여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시는 손님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그래서 장사하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삶이 송두리째 빼앗기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만 하던 사람들의 손이 피켓을 잡게 되고, 지금도 어색한 팔뚝질을 하고 있고, 저는 강제집행의 두려움에 20개월 넘게 철문을 걸어 잠그고 장사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결국에는 현실이 되어 계고장을 받았고,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농성장까지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던 즐거웠던 가게가 이제는 철문으로 막힌 저에게는 감옥이 되었고, 저의 모든 삶의 활동 범위도 이제는 가게와 농성장만 한정되어버렸습니다.

장사와 피켓팅, 농성장 지킴이를 병행하고 계시는 <세대위> 분들은 요즘 모두 약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계십니다. 감기·몸살에도 약을 드시고 농성장에서 철야를 하시고, 다음날 또 가게로 가서 장사를 하십니다. 그렇게 장사를 하며 농성장을 지킨 지 오늘로 19일째. 3주가 다 되어 갑니다. 강제집행을 막기위해 농성장을 차렸을 때 가졌던 굳은 마음. 명동 재개발2지구 <세대위>분들 모두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버티며,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잠시 앉아 쉬기도 하지만 옆에 함께 하는 다른 <세대위> 분들을 보며, 또 함께해 주고 계시는 연대인들을 보며 다시 기운을 얻어 일어서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그래서 지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터널의 시작인지, 중간인지조차 알 수 없는,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시작부터 함께하고 있는 <세대위> 분들과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고 느끼게 해 주시는 연대인 분들이 계시기에 제가 이렇게 서 있고, 또 내일이면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사랑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음이, 연대가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하루하루 더욱 단단해지는 요즘입니다.

 

 

[삼위일체의 축복 / 고린도후서 1311~13]

오늘 성서 본문은 교회력을 따른 삼위일체주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환경 주일의 의미와 연관하여 묵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물음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생태적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기독교 신학은 무엇일까, 가장 완벽한 생태적 관계를 표현한 기독교 상징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생태적 관계란 서로 온전한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고, 상대를 위하면서도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상대가 존재하기에 자기가 더 풍요롭고, 자신이 온전할수록 모두가 충만해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상대방이 만든 친밀감에서 감사와 기쁨이 솟아나는 생명력 있는 관계를 가리켜 생태적 관계라고 불러보겠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관계의 뿌리를 삼위일체 신앙에서 찾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성 삼위가 서로 일체가 된 관계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통해, 기독교는 믿음의 토대와 삶의 좌표를 찾습니다. 그것을 말하려면, 조금 딱딱한 신학적 내용을 말해야겠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 신학이 잘못된 철학과 결합하여 받아들이기 힘든 교리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각자의 개별적 존재 방식에 익숙한 근대인에게는 종교철학의 기초가 되는 초월(transcendence)과 내재(immanence)의 유기적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이 더불어 존재하지만, 각각의 개성을 잃어버린 하나도 아니면서, 서로 분리된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는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만일, 도심지 재개발지역 투쟁에서 세입자와 연대인의 관계, 퀴어 운동에서 성소수자와 엘라이의 관계가 그렇다면 얼마나 신나고 힘이 날까요?)

그렇기에, 기독교 역사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기 다른 개체로 여기는 삼신론(三神論)’이 등장하거나, 성부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내려와 수난당하였다는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 또는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의 실체를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삼위일체 신앙이 교리적 형식을 가질 때 신학적 결함을 갖고 나타난 주장입니다.

기독교 삼위일체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이 주목한 것은 두 가지 방향의 활동에 관한 증언입니다. 하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신비롭게 구성한 내적 친교(perichoresis)입니다(내재적 삼위일체론). 이 내적 친교는 끊을 수 없는 친밀성을 지니며, 거기에서 충만한 생명력이 솟아납니다. 이 성 삼위(三位)의 친교는 생태적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 방식에 관한 궁극적인 상징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성 삼위의 외적 활동으로 인해 이 세계가 경험하는 하늘의 축복입니다(경륜적 삼위일체론).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로, 성자 예수님을 구원자로, 성령을 보혜사로 고백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으로 인해 경험된 축복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고백이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친교로 표현됩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그 체제 안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지 보았습니다. 현실의 무게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억압당한 삶이 마지막 보루까지 빼앗기며 붕괴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세계를 살아갔던 고린도 교회도 갈라진 공동체를 보듬고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말합니다. “기뻐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해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평화를 지켜내며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바울의 이 권면과 축복은 역사의 도상을 걷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나눌 삼위일체의 신앙이요 축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이 세상의 율법을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기성 질서가 만들어놓은 율법의 게토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따라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진 이웃과 함께 살아가면, 예수의 정의(dikaiosune)가 우리를 비추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계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사랑으로 길을 내다보면, 이웃과 자연, 그리고 저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삼은 범우주적 생명 공동체를 꿈꾸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친교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에서 지친 사람은 용기와 힘을 얻고, 저마다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평화를 길러낼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 마지막에 쓴 이 이 삼위일체의 약속과 축복은, 생명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치열한 싸움 속에서 태동한 피와 땀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폐쇄적 집단의 자기만족을 표현한 관념이 아니요, 황금으로 지어진 사원 입구에 기록된 현혹의 언어도 아니었습니다. 이 축복의 인사는 억압과 약탈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거룩한 대안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분열과 실패를 반복하는 좌절의 늪에서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약속입니다.

 

[흑암과 혼돈에서 일어난 창조 / 창세기 11~ 24a]

창세기 본문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창조 설화는 신앙의 영감을 주는 여러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어둠과 혼돈에서 일어나는 평화로운 창조, 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긍정, 조화로운 창조 활동과 안식의 축복,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과 청지기 사명 등 많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 창조 설화는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여 기록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야기의 겉모습은 평화롭지만, 그 안에는 포로기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원형적인 갈망이 담겨있습니다. 그 갈망은 그들이 겪은 어둠과 혼돈에도 과연 새로운 세계가 지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이 창조설화를 해석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배경에 착안한 역사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의 표현에 관한 문학적 해석입니다. 둘 다 결론은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는 어둠과 혼돈 속에서 이루어지고, 삶의 모든 창조는 혼돈을 뚫고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포로기라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상황을 반영한 내용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심연의 표면을 덮었다.이 표현은 우주가 탄생한 빅뱅 이전의 상태에 관한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포로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반영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과 혼돈이 끝은 아닙니다. 성서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루아흐(ruah), 물 위에서 부는 그 거룩한 호흡과 바람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기원이 됩니다. 그러자, 평화의 말씀이 울립니다. “빛이 있으라!” 폭력의 기미마저도 없는 이 평화로운 외침에서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씩 지어집니다.

죽음의 시대를 통과한 포로들이 이런 창조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은 폭력과 살육으로써 자기 세계를 지어가는 제국의 방식과는 다른 질서를 꿈꾸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이 겪은 어둠과 혼돈이 도리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터전이었음을 깨닫게 된 긍지의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더 세밀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성서의 언어에 관한 문학적 해석입니다. 창세기 1장의 가르침을 마치 무()에서 유()를 지어낸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조의 시간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지만,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낱말이 혼돈’(tohu), ‘공허’(bohu), ‘어둠’(choshek), ‘깊음’(tehom)’인데, 이것은 모두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명사입니다.

땅이 혼돈과 공허상태였다는 것은, ‘황량하고 야생적인상태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의 리듬을 암시하고, ‘어둠이 깊음위에 있다는 말은 측량 불가능한 잠재성을 가진 시원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위에 거룩한 바람이 불어오자 창조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혼돈과 어둠에 잠긴 세상에 대한 성서의 묘사가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서는 혼돈의 불확실성, 그 공허한 어둠의 세계가 실상은 거대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둠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abyss)에 잠겨있더라도, 거룩한 바람이 부는 자리에 서서 빛이 있으라는 하늘의 말씀이 듣게 되면, 새로운 세계가 지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성서는 그 첫머리에 기록한 것입니다.

성서 전체를 보면, 창조의 시간에 울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타고 흘러서 역사에 세워진 구원의 좌표가 되고, 오늘 우리와 동행하는 성령의 친교 속에서 세상은 다시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이요, 기독교가 품어온 삼위일체의 신앙입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 / 28:16-20]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도 분명합니다. 민초(民草)들의 한과 꿈이 어린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보낸 예수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의 삶터 갈릴리에 다시 찾아와 말씀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이 기록한 예수의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 우리 마음에 담겨서, 우리가 맞은 어둠과 혼돈의 시대에 새 삶을 시작하는 지혜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의 시대를 더욱 영적으로 헤쳐가고자 하는 사람들, 노동자를 폭력으로 진압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민주주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현실에 맞선 사람들, 화려한 도시 문명건설을 위한 재개발 사업으로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람들, 이 모든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친교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어둠과 혼돈 속에서 창조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절망의 시간에 부활하신 예수 음성이 다시 울리면, 평화를 지키는 발걸음에 성령이 동행하시면, 세상은 하늘의 은총과 사랑으로 다시 지어집니다. 서로 격려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 되십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이 그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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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신음하는 피조물을 해방하는 생명의 잔치 ㅣ 김경호 ㅣ 2024-10-06
2024-09-15 주님 보시는 앞에서 ㅣ 김지목 ㅣ2024-09-15
2024-09-08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 ㅣ 장동원 ㅣ2024-09-08 file
2024-09-01 흠이 없는 경건 ㅣ 김지목 ㅣ2024-09-01
2024-08-25 예배를 위한 바울의 권고 ㅣ 김기수 ㅣ 2024-08-25 file
2024-08-18 그리스도인의 지혜 ㅣ 김지목 ㅣ 2024-08-18
2024-08-11 화해와 평화가 살 길이다 ㅣ 한기양 ㅣ 2024-08-11
2024-08-04 진리에 잇닿아 있는 사람들 ㅣ 김기석 ㅣ 2024-08-04
2024-07-28 속 사람 ㅣ 김지목 ㅣ2024-07-28
2024-07-21 깊어지는 신앙 ㅣ 오강남 ㅣ 2024-07-21 1
2024-07-07 어떤 만남 ㅣ 이민하 ㅣ 2024-07-07
2024-06-30 돌봄의 공동체 ㅣ 김희헌 ㅣ 2024-06-30
2024-06-23 막대기와 돌팔매질 ㅣ 이세우 ㅣ 2024-06-23
2024-06-16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ㅣ 박희규 ㅣ 2024-06-16
2024-06-09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 ㅣ 김영민 ㅣ 2024-06-09
2024-06-02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당장 행동합시다 ㅣ 정원진 ㅣ 2024-0602
2024-05-26 니고데모의 변심 ㅣ 나영훈 ㅣ 2024-05-26
2024-05-19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ㅣ 김지목 ㅣ 2024-05-19
2024-05-12 하늘을 바라보다 ㅣ 박승렬 ㅣ 2024-05-12
2024-05-05 물과 피로써 오신 분 ㅣ 김지목 ㅣ 2024-05-05
2024-04-28 네 이웃이 누구인가? ㅣ 홍성조 ㅣ 2024-04-28
2024-04-21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ㅣ 최형묵 ㅣ 2024-04-21
2024-04-14 기억의 빵, 약속의 잔 | 박재형 |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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