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 살아내기
왕상 3:5-12; 시편 119: 129-136; 롬 8:26-39; 마 13:31-33, 44-52
열왕기상에서 만나는 솔로몬의 꿈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비유는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언가를 숨기고 기제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꿈 속에서는 계시가 일어나고 그 계시는 진실을 설파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의식의 세계 혹은 현실의 불편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비유는 듣는 이가 알아 들을 수도 있고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도록,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숨기면서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설명해 주시지요. 그렇다면 이 두 이야기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와 이 두 수수께끼를 풀어나가 볼 텐데요, 풀이 과정을 위해 힌트를 우선 하나 드리고 갑니다. 이 두 수수께끼는 둘 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와 관계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꿈부터 들여다 보겠습니다. 그의 꿈 속에서 솔로몬은 지극히 겸손하고 순진무구합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존경의 눈으로 동경하여 아버지가 진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살았다고 믿고 있는 효심가득한 소년이고, 나가고 들어가는 처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겸허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겸허히 하나님께 지혜를 주십사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어여삐 여기시고 지혜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와 장수를 선사하십니다. 이 꿈은 꿈치고 지나치게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포장했을까요?
솔로몬이 기브온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후 이 꿈을 꾸기 전에 그가 한 일들을 돌아보면 그가 그리 겸손하고 순진무구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오르자 마자 그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피비린내나는 작업을 속히 진행합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노환으로 죽어갈 때 자신보다 발빠르게 왕위찬탈을 위해 움직였던 배다른 형인 아도니야와, 다윗왕의 총사령관이자 자신의 삼촌인 요압을 죽입니다. 아버지의 정적이었던 사울의 집안 사람이었지만 다윗이 살려두었던 시므이를 죽이고, 아버지 대의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을 추방합니다. 이 작업을 통해 솔로몬은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권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 위에 우뚝 섭니다.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길 때 옮기지 못한 성막이 있었던 기브온에 가서 수많은 번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권력의 꼭대기에는 왕과 그가 제사드리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피튀기는 폭력과 죽음을 지휘하고 홀로 왕국을 짊어지고 가는 젊은 왕의 마음 깊은 곳에서 꿈으로 튀어나올 욕구는 무엇이었을까요? 폭력이 낳는 혼동 속 어두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무어라도 붙잡고 싶은 욕구가 지혜라고 포장되지 않았을까요?
솔로몬 꿈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이 지혜가 어떤 식으로 그의 왕국에서 기능했는지를 보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기브온 제사 후에 꾼 꿈의 내러티브는 그가 발휘하는 지혜에 어마어마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 지혜가 하나님께로 부터왔다는 주장은 모든 권력을 통합하고 그가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왕이 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견제세력으로 있었다면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멘토와 영적 리더로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죽을 때까지 어느 선지자도 그의 궁정에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지혜로운 솔로몬은 자신이 그 동안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역할까지 감당하여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모든 결정을 내립니다. 열왕기서는 그의 타락과 몰락은 결국 하나님께서 걸어오는 말씀에 솔로몬이 대답하지 않아서 일어난다고 기록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그가 고백한 꿈의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보증을 받았다고 인정받고 이렇게 견제세력 없이 그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핑계이자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결정은 오롯이 그의 지혜를 바탕으로 내려집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등의 모든 절차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저 솔로몬이 하겠다고 결정하고 진행합니다. 성전이 지어지고는 솔로몬이 연설을 하고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왕국의 한 가운데 서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비지니스맨의 지혜이기도 했고 외교관의 지혜이기도 했습니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그는 부를 예루살렘으로 집결 시킬 수 있었고, 외교적인 관계도 탄탄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지혜로 솔로몬의 왕국은 그 위엄과 부의 규모로 보나, 성전이 웅장함으로 보나 가히 신의 축복이 가득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만든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뛰어나고, 풍요로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원천, 혹은 솔로몬의 절대 권력의 원천이 되었던 솔로몬의 꿈의 수수께끼는 이 꿈이 숨기고 있는 그의 지혜의 폭력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지혜가 하나님이 주셨다는 명분아래 절대권력이 되어갈 때, 그 지혜는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피해자를 보기 위해서는 솔로몬이 살아있을 때 들리지 않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야 소리를 내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호소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의 외교정책으로 해 온 여러 정략결혼으로 인해 끊임없이 지어야 했던 왕비들을 위한 궁궐공사와 성전 공사를 위해 백성들은 끊임없이 노역에 시달렸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의 견제세력이 되었어야 하는 선지자들의 목소리도 지혜의 권력에 눌려 들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꿈이 숨기는 수수께끼는 솔로몬이 세운 하나님의 나라가 사실은 모든 것을 홀로 결정하는 절대권력자의 폭력 위에 세워지는 과정을 숨기는 이야기가 바로 그의 극적인 꿈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밀을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부와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선으로 여기고 싶어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예수님 당시까지도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임금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비유는 모두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이 비유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의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치던 것도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고,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도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셨으니 말이지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정권교체의 피비린내를 불러 일으킵니다. 즉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습니다. 이에 마태는 헤롯 왕이 몹시 당황하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고”고 기록합니다. 동방박사라고 하는 어떤 외국인들이 와서 하는 황당한 소리에 헤롯은 지극히 예민하게 반응했지요.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을 모아 기름부음을 받을 자가 어디서 난다고 예언되었는지를 샅샅이 뒤져서 베들레헴을 찾아내고 아기 예수를 직접 찾아낼 양으로 동방박사들에게 아기의 행방에 대한 정보 공유를 요청하지요.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동방박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리는 만무하지만, 그들이 다 당황했다는 기록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분명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예루살렘 내, 즉 헤롯의 궁 안에 정치적인 소요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문은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일 만큼 정치적인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왕이라는 용어와 율법학자들이 찾아낸 미가서의 말씀에서 나오는 통치자라는 용어는 헤롯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대상이 어떤 왕국의 도래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말로 하늘 나라라고 번역되어 있는 용어는 결국 하늘 왕국이니까, 헤롯은 하늘 나라의 도래를 자신의 정권을 빼앗아갈 정적의 출현으로,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외치던 “하늘 나라가 가깝다”는 말은 아주 구체적인 현실을 선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현 정권을 위협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겠다는 외침입니다. 그 정권이 겨자씨와 누룩과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비유의 수수께끼에 좀더 가까가 다가가 볼까요? 예수님은 13장 11절에서 이 비유들이 하늘 나라의 비밀을 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왕국의 비밀이라는 것은 왕국에서 권력이 구성되는 원칙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솔로몬이 세운 하나님의 왕국과는 정반대로 힘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이지 싶습니다. 열왕기상 4장 29절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한없이 많이 주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즉 그의 지혜는, 혹은 그 지혜의 절대권력은 크고, 많고, 풍부하게 시작하여 크고 뛰어난 일들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하늘 나라에서는 작은 힘이 큰일을 이룹니다. 겨자씨가 나무처럼 커져서 새들이 와 깃들 것입니다. 누룩이 온통 부풀러 오를 것입니다. 현 체제에서 힘없는 민중이 큰 일을 이루는 곳이 하나님의 하늘 나라입니다.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의 비유가 보여주는 하늘 왕국의 비밀은 경제적인 가치에 관한 비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둘 다 상인이, 상당히 경제적인 주체이지요?,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진 물건을 알아보고 값을 치루고 사는 이야기이니 말이지요. 하늘 나라는 그 정도로 가치가 나가는 소중한 존재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잘 살펴보면 이 거래는 합리적인 거래가 아닙니다. 밭을 산 사람과 진주 상인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밭과 진주를 삽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거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밭에 보물이 있는 사람은 그 보물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가 그나마 좀 쉬운데, 진주 상인을 생각해 보면 이 거래는 정말 큰일입니다. 이 거래의 결과 그는 자기 한 몸과 진주 한 개 만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그날 밤 잘 곳도 없고 다음 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 진주를 사기 위해 다 팔았으니까요. 그러나 먹고 살자고 진주를 다시 팔면, 그가 그토록 찾던 진주는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즉 그 진주는 삶과 바꾼 샘이지요. 이렇게 탈출구가 없는 선택을 한 것이 하늘나라라는 말씀이지요.
이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저는 자주 매트릭스에 나왔던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모르피어스가 리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주면서 빨간 약을 먹고 나면 매트릭스의 진실을 알게 되고 그 진실을 모르는 상황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진주 장사가 진주를 사는 장면과 유사한 선택의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시급한 문제가 된 마약이 어찌보면 이 진주와 비슷하지 싶습니다. 마약이 주는 절정의 순간 ( High)이 주는 환각이 너무 좋아서 가족, 자식 등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이 진주 장수를 닮았습니다. 이 진주 장수처럼 하늘 나라를 쫓고 있는 이들의 예가 매트릭스의 리오와 같이 멋졌으면 좋겠건만, 제 눈에 들어오는 이들은 마약에 쩔어 있는 이들처럼 채우고 메꿀 수 없어 보이는 자신의 깊은 상처을 해결하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소위 이단이라고 부르는 종교 집단들과 자신의 삶을 거래하는 이들을 고려해 볼까 합니다. 대학 캠퍼스가 목회현장이 되고 나니, 캠퍼스에서 활동한는 이단의 문제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단에 관해 출판된 자료들을 훓다 보면 이단에 빠지기 쉬운 이들의 유형을 구분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서적은 이들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1) 정통 교회에서 상처받은 자 (2) 결혼 생활이 불행한 부부, (3) 위기에 직면한 정상인, (4) 부모와 갈등이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깊은 상처를 안고 치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이 소위 이단이라고 칭하는 단체들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일상 생활과 가족 관계가 망가지도록 어느 종교 집단에 충성스럽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이들은 어찌보면 이 진주 장수가 한 과감한 선택을 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들, 그들이 마약중독자이던 광신도이던, 이들이 찾고 있는 것이야 말로 하늘 나라가 아닐까요? 진짜로 천국이 필요한 이들은 진주 장수처럼 거래를 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얻어내는 것이 하늘 나라가 아니라 착취세력의 기만일 때가 대부분이이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그 하늘 나라는 마태복음이 이야기하는 하늘 나라와 유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오는 나라이지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겨자씨가 커서 나무만해지는 순간들이 우리의 일상에 침범하듯 들어오는 순간들이 존재하여 그 나라가 가까움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지만, 아직 도달하지 않은 나라이기에 우리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물에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린 것과 같이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물이 가득 찼을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그물 안에 섞여 있어서 좋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상태를 살아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나라가 도달했을 때 선이 가려져 그 선택들의 마지막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 마태복음 비유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이단의 문제가 천국을 절실하게 찾는 이들에게 진주 장수의 선택을 하게 하여 그들을 이용해 먹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주 장수의 선택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거래를 매우 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살을 고려하는 이들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가르친 지난 6년간 참 많은 학생들이 자살하고 싶은 심정들을 저와 나눠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그들이 죽어야겠다고 하는 이유들에 설득을 당합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상황 속에서 그들이 살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실제 상황에 대한 매우 예리하고 현명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독재와 경제성장의 시기를 겪어낸 전 세대는 생존 자체로도 인생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 자체가 모험담이 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세대의 눈에는 먹고 입고 살 곳이 있는 젊은 이들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나약하게 구는 것 같아 보일 때가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나약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현 젊은이들의 세대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라떼는 말야의 향연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고전했던 삶의 무대는 전혀 그들의 급변하는 삶의 무대를 닮지 않아서 라떼는 말야의 지혜는 현 시대에 유용하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 정치 위기, 전쟁 위기로 인한 모든 것의 종말이 자신의 가까운 미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의식과 무의식 어느 구석에 꾸역꾸역 눌러 놓고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아나갑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무의미한 쳇바퀴같은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을 깎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 살아야 하나요” 제가 여러 학생들에게 너무 자주 고백받는 말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그들은 자살을 고려합니다. 진주 대신 죽음을 거래합니다.
이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우니 착취적인 종교대신, 죽음 대신 하늘 나라랑 삶을 맞바꿔보라고 하려면 하늘 나라가 어떻다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성경을 탈탈 털어도 예수님은 오직 비유로만 설명하시고 가버리셨네요. 실제 신천지 등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종교단체들이 기가 막히게 잘 해내는 것이 이런 애매모호한 것들을 치밀하게 설명해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세의 천국을 찾는 이들에게 이러한 설명이 매혹적인 설득력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하늘 나라가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설명 가능하다면, 즉, 비유로 밖에 말씀 안 하신 예수님의 설명을 능가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 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과는 다르게 하늘 나라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외쳐온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경을 털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던히도 끈질기게 끊임없이 새로운 비유를 들어가며 설명하시고 설득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설득에는 미끼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사실이 그래서 하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냥 하늘 나라가 그래서 그렇다고 알려주시고 설득하시는 거죠. 이런 설득이야 말로 정말 신빙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 후 예수님은 로마의 정치 체제 안에서 겨자씨같이 누룩 같이 작디작은 자가 되어버리십니다. 십자가 형벌이라는 모욕적인 형벌을 공개적으로 받으며 그 정치 체제 안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설득을 경험해 본 이였던 바울은 이 설득을 사랑으로 경험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리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확신은 내 눈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지고, 내가 어떤 일을 당하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선택이니 진주 장수의 거래와 닮은 선택입니다. 무조건 사랑 안에 있음을 선택하는 삶의 패러다임 전환인 것이죠. 이 사랑 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연약함 속에서 도우시는 성령의 임재와 아직 도달하지 않은 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할 수 있었던 말이 오늘의 요절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선이 코앞에 있지 않지만 앞으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즉 바다에 던진 그물에 무엇이 걸렸던 간에 그 그물을 끓어 올리는 순간과 좋은 것들을 가려내는 순간까지의 시간 차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그물을 던진 이가 결국은 선을 가려 낼 것이기에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 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기로 함으로써 하늘 나라를 현재에 살아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솔로몬도 그가 가지고 있는 한없이 풍부했다는 지혜로 하늘 나라를 현재로 살아나가는 노력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정략적 판단과 논리로 하늘 나라를 자신의 코앞에 구현해 놓고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의 왕권으로 실천해 낸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수님의 비유의 수수께끼들을 풀다보니 예수님이 생각하신 하늘 나라는 오히려 그 나라와 생긴 것이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끊임없는 하늘 나라의 비유의 설득을 따라가다 보면 이 나라는 이 세상의 작은 이들의 나라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첫찌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찌가 되는 나라이고, 어린이 같이 작은 자가 주인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선택하는 자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절실하게 모든 것을 걸고 선택하고 싶어하는 마음 아픈 이들에게 가 있을 듯 싶습니다. 중독이든, 자살이든, 강력한 설득과 카리스마의 종교이든, 그들의 마음의 선택이 제발 하늘 나라이길 원하실 것 같습니다. 문제는 진주 장수의 선택과 닮은 선택을 하는 이들의 절박함은 그들의 아픔이 깊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그물을 끓어 올린 순간과 선한 것이 가려지는 순간 사이의 시간은, 혹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픔이 지속되는 괴로운 시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순간의 거래와 같은 빠른 대책이 매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은 하늘 나라의 주인들이 될 이들에게는 아픔과 희망 사이를 오래참고 걸어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고 괴로왔습니다. 하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를 살아내셨던 예수님이 끊임없이 설득하시니 그 설득의 사랑을 믿고 선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알아서 하십시오. 그리고 하늘 나라를 선택한 사람들이 이 아픔과 희망 사이를 같이 걸어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