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창조절 13
요엘 2:21-27, 잠언 26:13-16, 마태복음서 6:25-33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마다 성서일과와 씨름할 때 저의 실수로 인한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부터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은 말씀이 오늘의 성서일과라고 확인해 놓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하늘 뜻 펴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번 주에 김지목 목사님이 보내주신 성서일과를 보고 제가 완전 다른 일과를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붙잡고 있던 말씀과 씨름하면서 너무 많은 작업을 진행한지라 제가 저지는 실수를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밀고 나가는 김에 보통 성서일과에 포함되어 있는 서신서 말씀 대신 성서일과에 절대 등장하지 않는 말씀을 하나 대치하기로 합니다. 아마 오늘 말씀을 읽으시면서 뭐 이런 말이 성경에 있었나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다시 한 번 소개해 드리면서 오늘 하늘 뜻 펴기를 열어 볼까 합니다.
잠언 26:13-16.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르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제가 K드라마에 빠지면 저 장면이 고대로 저희 집에 재현됩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침상에서 아이패드와 함께 굴러다니고, 먹는 것조차 귀찮아집니다. 그 게으름을 경험해 봤기에 저 말씀이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두가지 아주 수상한 부분이 등장하지요. 왜 밖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왜 이 자는 자신을 그렇게 지혜롭게 여기는 걸까요?
이 말씀을 계속 들여다 보다 보니 그 사자가 제게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와 연관된 게으름은 딱히 K드라마를 보는 이의 게으름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학생활 초기에 저는 사실 이 사자를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 제가 꽤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유학을 나갔었는데요, 실제로 학교를 다니며 접하게 되는 상황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냥 영어권에 나가서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집밖에 나가서 하는 모든 활동은 어마어마하게 진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밖에 나갔다 오면 두통으로 머리가 빠개질 것 같고, 그날 영어로 저지른 나 자신을 깍아 내는 어리석은 말들이 속상하고, 문화와 언어를 넘어서 연결 짓는데 실패한 관계들이 모두 저를 녹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자꾸 새로운 상황과 맞닿아 봐야 발전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집에서 나가지 않는 버릇이 생겨 버렸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 하나를 한다는 것이 어마 무시한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집 밖에 나갔다 오면 전쟁터에서 돌아온 패전병처럼 돌아오게 되니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지는 것이지요. 밖이 전쟁터 같은 바로 그 상황이 사자가 아닐까요?
재밌는 것은 그렇게 집에 계속 붙어 있다가 보면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주 잘 알게 됩니다. 요즘은 하도 집에 안 들어가서 제가 뭘 어디에 뒀는지 자꾸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그 당시에는 방 한 칸에 살았지만, 집안의 모든 것들이 모두 너무도 분명하게 제 머리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 손님이 오면, 그들이 아무리 밖에서 날고 긴다고 해도, 그들은 철저히 제게 제공하는 환대에 의존해야 합니다. 즉 제가 가지고 있는 우리집에 대한 “전문성”에 모두 기댈 수 밖에 없습니다. 숟가락이 어디에 있고, 참기름이 어디에 있는지, 저한테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집에서만은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제가 지혜로운 거지요.
이런 현상은 공동체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이를 이민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엿볼 수 있었는데요 저처럼 영어권에서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없는 이들이 한국어로 생활하는 교회에 오면 사회에서 느꼈던 좌절과 피곤함을 뒤로 하고 각자가 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길 밖에는 사자가 도사리고 있지만, 집 안에 돌아오면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지혜로운 사람들끼리 갈등을 벌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자는 우리를 집안으로 몰아넣고 집안에서만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여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우리 삶의 반경을 묶어 버립니다. 집 밖에서 어슬렁 거리는 사자는 즉, 불안함이고 두려움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불안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좀 들으시기에 힘겨우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우리 딸내미의 허락을 받고 여러분과 나눕니다. 그 녀석이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자기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저희 부부에게 선포를 하더군요. 지구의 온난화과정이 과속화 되는 것을 IPCC 리포트로 매년 확인하며 매년 올라간 지구의 평균온도를 확인하며 살고 있는 우리딸은 급박한 시간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이 30여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한 이 청소년은 대학이란 것에 등록금과 시간을 낭비하며 4년이라는 기간을 허비하는 것을 사치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또래 친구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미래가 이미 개떡같다는 것을 유치원때부터 늘 배워왔고, 별희망이 없기에 그저 부모가 하라는 데로 살 뿐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자신은 대학에 가지 않고 Greta Thunberg처럼 환경활동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에요.
제가 대학 교수인데요 지난 6년을 제 딸이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이 아이를 설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딸아이의 기가 막히게 선명한 기후위기에 대한 두려움과 마주서서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더군요. 이 아이가 생생하게 상상하고 있는 짧은 미래가 참담하기도 했고, 그 미래 안에서 마지막 몸부림처럼 활동가가 되겠다는 이 아이 앞에서 저는 부모가 뭐며, 대학 교육이 뭐며, 이 지구 상에서 살아가는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습니다. 어찌어찌 딸내미를 설득하는데 성공을 해서 고녀석은 올해 대학에 들어가 환경에 관한 정책을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잠언의 사자를 두려워 하는 자가 게으름을 선택한 것은 자신을 압도하는 두려움을 회피하는 선택이었지 않습니까? 우리 딸이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용감한 선택같지만 그 이후 많은 대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도 어쩌면 두려움을 회피하는 선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딸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엄마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저는 처음에는 이 아이가 이야기하는 타임라인에 주목했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기후위기의 시나리오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처럼 극적인데, 만약 이 아이와 우리의 미래에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결국은 굴복시킬 암담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다면, 그런 상황을 살아보지 않은 제가 감히 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얘야, 인류는 우리가 마지막을 대하고 있다고 여겼던 역사가 자주 있었어. 그 때마다 아주 멋진 인간들이 나타나 그 위기를 헤쳐 나갔었어. 우리 앞에 위기가 올 것이 자명하다면 우리가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마지막이 온다면 그 마지막을 멋지게 맞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럴라면 대학에 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엄마 같은 대학 교수들은 그런 인재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사춘기를 지내고 있는 아이와 나누자니 참담하더라고요. 그리고 엄마의 마음은 이 두려운 미래를 아이가 누군가와 함께 맞았으면 좋겠다는, 그가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향해 치닫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애가 보는 만화영화도 같이 보게 되는데, 토이스토리 3편에는 우디를 비롯한 장난감 친구들이 쓰레기로 분류되어 가지각색 쓰레기 처리과정을 거쳐 결국 용광로로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최후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Buzz가 Jess의 손을 잡고 Rex가 Slingky Dog의 손을 잡습니다. 결국 타오르는 용광로를 발 밑에 두고 그들은 모두 손을 잡고 용광로에 빠질 자신들의 최후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영화는 이 순간 다시 반전이 생기지만, 저는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이 아이의 손을 잡고 최후를 맞아 줄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얘야, 그런 친구들을 만나러 대학에 가렴.”
이 아이의 기후위기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감은 저의 학문의 방향도 바꿔 놓았습니다. “엄마가 학문은 하는 사람이니 너의 두려움과 맞서는 학문을 할거야.” 4년전 저는 국제실천신학회(International Academy of Practical Theology)를 한국에 유치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올해 6월에 연세대에서 열린 이 학회의 주제를 구성해 나가는데 제 목소리를 많이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4년간 이 학회를 준비하면서 저는 제 학문의 현장으로 아이의 위기의식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실천신학계가 기후위기에 관한 치열한 사고를 하게 하기위해 주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결과 저희가 내어 놓은 주제는 ”Practical Wisdom on the Living Web of the Anthropocene(인류세의 살아있는 연결망 속의 실천적 지혜)”이었습니다. 현재의 위기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 인해 만들어진 폐해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신학을 한다면 어떤 실천적인 지혜를 구성해 낼 수 있을까라고 저희 학계에 도전을 던져 보고 싶었습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지 않고 지구를 중심으로 놓는 관점을 가지고 사고를 하려고 지난 한 두 해 노력해 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제가 딸을 설득하려고 사용했던 모든 논리가 매우 인간 중심적인 사고들이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인류가 고생할 때 좀 괜찮은 인간이 나오던 말던 별로 상관이 없겠더라고요. 대학을 나오던 말던 그것도 별로 상관이 없고요. 사실 기후 위기도 인간에게 문제이지, 지구는 한 번 크게 여러 변동을 통해 판을 바꿔 놓으면 계속 태양계의 한 점으로 계속 존재하고 다시 지구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더라고요. 지구 중심적인 관점은 우리 더러 지구 생태계의 일부가 되라고 초대하고 있을 뿐이더군요.
우리 교회에 함께 출석하고 있는데 요즘 다른 교회에서 친구 전도사님의 육아휴직을 메꿔주느라 오늘 설교를 하고 있는 제 박사과정 학생인 최혜림씨가 국제실천신학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지구에 대한 공감의 가능성에 대해 쓴 논문은 제게 좋은 사고의 전환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지구의 목소리를 성경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노력 속에서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창세기 본문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관찰하며 그 울부짖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해석하는 작업을 하는데요 그는 그 목소리가 땅이 호소하는 목소리라고 결론짓습니다. 즉 창세기 본문은 땅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들으시고 땅의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목소리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다는 해석은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경을 넓혀 주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내 딸의 세대가 품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가슴에 품고, 요엘서의 말씀을 보니 울컥하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땅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광야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구를 향한, 지구위의 인간 이외의 생태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요엘 선지자의 선포가, 성경은 인간을 위해, 오직 인간을 위해 쓰여진 것처럼 취급해 오던 그 동안의 인간중심적인 신학관을 훌쩍 뛰어넘는 생태중심적인 말씀으로 여기 버젓이 있었던 거죠.
오늘 제가 비록 착각을 하고 찾아온 성서일과이긴 하지만, 한 성서 일과에 함께 들어가 있는 오늘의 말씀들을 눈을 씻고 들여다 보면 오늘의 시편 말씀도 우리가 얼마나 지구의 생태계와 어울러 사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복은 네게브에 형성되는 와디와 같이 자연의 섭리와 순리와 함께 움직이기에 할 수 있는 기도가 126장 4절 말씀에 엿보입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 주십시오.”
아 하나님은 땅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생태계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구나. 그들과 공감하고 계시겠구나. 하나님이 나의 눕고 서는 것을 아시듯이 그들을 알고 계시겠구나. 그렇겠구나.
이렇게 깨닫고 복음서의 마태복음 말씀을 대하니 이 안에 담긴 은혜는 생태중심적인 은혜입니다. 무병장수를 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딸이 대학에 갈지 못 갈지를 걱정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세상이 앞으로 30년도 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 딸의 걱정을 헛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걱정 많은 우리에게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은 나의 먹을 것과 나의 입을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아라…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하늘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긴 존재들이 그저 삶을 삶답게 살아나가는 것이 충분하지 않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을 비교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구의 관점으로, 생태계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중심적인 집착을 버리고 하늘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의 관점에서 보면 겸허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지구의 일부로 생태계의 일부로 우리를 보면 사실 우리의 생명의 순환은 하나님이 입혀주고 먹여주시는, 제공해 주시는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생태계의 일부로 사는 이들은 오늘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답게 살고 내일은 아궁이에 들어가더라고 괜찮습니다. 이 안에서는 무병장수와 부귀영화가 필요없는 관점이니 내일의 아궁이도 정말 괜찮습니다. 인간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위해 인간중심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의료계는 우리가 100세 시대를 살 것이라 하지만 정작 그런 의료 시대를 물려받는 제 딸의 시대는 의료계의 발전과 상관없이 30년의 미래 밖을 보지 못하지만, 이 시대에도 겸허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각이 생기기에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은혜냐고요? 이 아이들이 그들의 전세대가 파괴시켜 놓은 세상을, 그 전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 즉 인류가 번성하고 번영하여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달려가게 했던 지극히 인류중심적인 관점을 내려 놓고 보니 부모가 하라고 하는데로 아무 생각없이 따라오는 우리 다음 세대가 보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 세대가 겪는 허무에 의미를 담아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도달한 곳은 허무가 허무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지점입니다. “아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허무를 향해 내닫고 있는 순간이 아닐지도 몰라. 그러니 네가 이 세상을 구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괜찮아.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결국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백합화를 입히는 방식으로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회복시키실거야. 그러니 백합화처럼 살자, 새처럼 살자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런 사고의 전환을 할 때, 길이 열릴거야….인간만을 위한 고집을 버릴 줄 알게 되면 길이 열릴거야. 그리고 그 길이 네가 원하는데로, 엄마가 원하는데로, 우리 사회가 원하는데로 열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세상이 펼쳐질꺼야.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꺼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맘대로 펼쳐지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야 그래도 정말 괜찮아”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잠언서의 게으른 자의 두려움이었던 사자가 생각납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을 위해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사고 밖에는 미지의 두려움과 불안감이 사자처럼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로 인해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사자가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도 우리와 함께 생태계의 일원이라는 것,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깨달음이 옵니다. 우리를 인간중심적인 우리 세계로 옭아 매던 두려움이 사실은 우리와 한 배를 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함께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가 생태적 전환을 꿈꾸는 과정은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우리 딸과 이런 고민을 해 나가던 시기와 겹칩니다. 우리 교회가 매년 참가하고 있는 기후위기행진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딸이 그 행진에 참석하고 와서는 교회는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고 이야기해 줬었습니다. 창피하더라고요. 그때 담임 목사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이 엄청 당황하시더라고요. 함께 당황했던 그 순간 이후 저도 눈을 뜨고 자세히 보기 시작하니 향린 안에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생태적 전환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고 저는 그런 노력들이 가슴 아리게 고맙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구중심적, 생태중심적 사고관을 제 안에 계발하면서 바라보니 여전히 우리의 노력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위험하다는 말이야 말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고는 오히려 우리의 귀를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가 기후위기 앞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다루기에 너무 큰 위기 앞에서는 우리의 사고가 경직되고 우리가 감각을 닫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생각도 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지요. 기후위기에 대해 유치원때부터 귀가 닳게 들어온 우리 아이들이 부모가 원하는 데로 무감각하게 입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듯이 말이지요.
그러기에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고는 사자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일 것입니다. 그 전환은 어찌보면 너무 낯설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엄마와 딸이 현실을 지극히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찾아내고 있는 사고의 전환의 지점들에 공감해 주십사 오늘 이렇게 저희의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이 사고의 전환은 어찌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내 집안에 있는 것들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잠언서의 게으른 자의 지혜가 그를 집안에 가두어 놓듯 우리를 가두어 놓고 있는 우리의 기본 가정을 허물어야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투사해 온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와 생태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의일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감사한 것은 오늘 말씀에 붙은 예수님의 설명의 마지막 토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듣기 쉽지 않은 제 하늘뜻 펴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이상한 설교를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디서 해보겠습니까.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해 나아가 봅시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에 가라앉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저와 함께 인간이 중심이 아닌 생태를 중심으로 창조세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찾아보십시다. 그리하여 생태계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봅시다.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