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다림
(이사야 61:1-4, 8-11, 시편 126:1-6, 데살로니가전서 5:16-24, 요한복음 1:6-8, 19-28)
그리스도의 평화가 향린 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새해의 세 번째 주를 지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하나는 세상의 시간이고, 하나는 교회의 시간입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고난과 부활이라는 구속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평이하고 지속적인 시간의 축에, 매 순간 의미있는 시간들로 새로이 채워 가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의미있는 시간 중 하나는 바로 예배드리는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이 공간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우리의 영혼과 몸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달 전 <제주평화신학포럼>이 있었습니다. 강정개신교대책위, 제주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제주사랑선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 정의평화생명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첫 번 째 포럼이었습니다. 일찍이 주최 측에 강연 제안을 받고,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제주도와 제주4.3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페이퍼로 말하는 신학적 성찰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신앙적 감흥이 얼마나 피상적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제주평화’라는 말이 갖는 역사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저보다 여기 계신 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11월 초 낭만 가득한 가을 제주를 생각한다면 열심히 글 작업하고 강연하면 되겠지만, 이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강연에 거리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해보았습니다. ‘제주 4.3, 국가폭력, 평화가 전공 분야가 아니어서, 내용이 어렵고 공부할 게 많아서, 현장 실무자와 목회자들이 청중으로 앉아있어서, 개신교회와 제주민의 해묵은 갈등에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아니기도 했습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고, 지금 학기 중인데 나중에 시간을 더 할애해서...’라는 좋은 구실도 있었지만, 책상에 앉아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제주4.3] ‘진상보고서’ 파일을 다운 받아보고, 현재 진행 중인 제2국제공항 건설에 대한 보도자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참여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당시 강연 연락이 온 때가 9월이었습니다. 올 여름, 서울 신림동, 분당 서현역에서는 잊지 못할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묻지마 범죄, 즉 이상동기범죄가 이어졌고, 연속하여 온라인 상에는 살인 예고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강력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경찰은 서울 한복판에 장갑차와 무장 군인을 투입했습니다. 세상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범죄보다 더 큰 폭력이 우리 일상에 가시화되는 중이었고, 지금 여기가 2023년 서울인가 되물어야 했습니다. 우리 삶이 이렇게 안전하지 않은데 과연 평화가 무엇인가?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고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보니 나와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최소한 기독교인으로 평화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함께하며 지지한다는 태도, 곁이 되어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자세로 제주에 갔습니다.
2박 3일 동안 4.3 항쟁을 비롯하여 강정해군기지에서 제2국제공항 건설에 드러난 국가폭력, 그리고 네오파시즘의 재등장에 대해 강연하고 듣고 토론했습니다. 토론 사이사이에는 강정해군기지 앞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스무 명이 춤추고 노래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누군가가 15년 넘게 무상의 노력으로 제공하는 밥상에서 점심도 먹고 감귤도 까먹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전참기지화가 되었던 알뜨르 비행장과 한국전쟁 때 양민 학살이 일어난 섯앗오름에도 방문했습니다. 섯앗오름은 일제 시대에 사용된 폭탄 창고로, 한국 전쟁 때 예비검속(豫備檢束)이라는 명목으로 잡힌 사람들을 학살한 장소였습니다. 예비검속이란 범죄 가능성 있는 사람을 미리 잡아 가두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기에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제주 경찰은 4.3과 관련된 이들이 범죄자가 될까 두려워 미리 구금하고 일시에 이들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참혹한 역사의 아픔과 탄식이 곳곳에 스며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제주가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의 제주였습니다.
제주의 가을 해변이나 비자림 숲길을 밟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대신 주중에는 귤 농사, 콩농사 짓고, 제주에 사람들이 오면 역사 투어를 구수하고 맛깔나게 가이드 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현장 이야기를 밤새 들었습니다. 그리고 평화 운동에 자신의 청춘을 떼 내어 삶의 가치와 방향을 새롭게 모델링하고 있는 젊은 평화 운동가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력한 운동이지만, 지치지 않고 이러한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고,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갈등 사이에 켜켜이 쌓인 두려움과 분노를 넘나들며 일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매우 유쾌하고 건강하게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있는 그대로 신앙과 신학이 응답하고 실천되는 자리였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강연을 하러 간 저는 말을 하기보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솔직하게는 깨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책상 위의 신학이나 도시 중심의 세련되고 배려하는 이성적인 신앙이 갖는 한계와 동시에 그것이 갖는 역할도 보았습니다. 감사하게도 평화신학 참가자들 역시 경청하는 이들의 존재를 기뻐하며 다음의 만남과 연대를 기대했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원시 종교처럼 하나님은 강력하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기독교는 신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사야 61장의 말씀처럼 주님의 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해방을 선언합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 경계밖에 있는 사람들, 자리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선포하고 내어주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볼 때, 하나는 신성함을 내세우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유토피아 정신을 품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신성함(The sacred)은 종교의 본질이자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신성이 자신을 드러냈다’라는 성스러움의 현현은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말하는 것처럼 ‘세속의 공간에 성스러움이 침투한 사건’, 이것이 종교라고 정의합니다. 이때 성스러움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카오스 속에 코스모스를 이루는 것으로 하나의 장소를 신성하게 함으로써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특정한 곳에 사람이 안착하고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그리하여 태초의 우주의 발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신성함은 하나의 지배 질서를 형성합니다. 신성함은 세상에 질서를 재창조하고 유지하고 갱신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구원 역사를 시작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사건이라는 성스러운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재생함으로써 언약 백성이자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과 질서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함을 드러내고 지배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종교에 두 가지 형태 중 다른 하나가 유토피아의 정신을 담은 것입니다. 전자가 신성함으로 표현된다면, 후자는 거룩함(The holy)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분리하여 구별하다. 온전하게 되다’라는 의미로 적극적인 성화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어원에 의하면 ‘이 세상에 없는 곳(nowhere), 이상향’이라는 의미지만, 그것이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거나 잠시 잊기 위한 허무맹랑한 비공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지금의 상황과 질서를 넘어서는 것, 한발 나아가서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식으로까지 이해됩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정신은 주어진 현실을 바꾸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포함합니다. 이때 새로운 세상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리라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토피아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확신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믿음, 그리하여 현실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단단하게 지지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세상에 대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고 여유있는 생활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 비판하는 데서 자라는 것, 이것이 희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을 분별하는 데서 오는 것이 희망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어두운 때, 주변 강대국들의 연속적인 침탈로 나라가 빼앗기고 성전이 무너지며,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끝도 모를 낙망 속에 이스라엘을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희망을 말했습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뼈를 깎는 인고와 겸허로 다져진 적극적인 기다림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부르짖었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기대했습니다.
다시 돌아와,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군림하기 위해 오시는 신성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탄생 자리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에 자리 없는 이들, 이름 없는 이들, 폭력에 스러지고 가난으로 떠도는 이들에게 찾아가 그저 듣고, 같이 아파하고, 삶을 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그러한 예수를 신실하고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으로, 삶의 깊숙한 데 스며들어 생명을 불어 넣으신 이를 그리스도, 세상의 구세주라 고백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한 사회의 건강함은 주변을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회 주변이 무시되고 경시되는 것, 가장 약한 고리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두는 사회는 불안정하고 경직되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반대로 한 사회의 건강함과 역동성은 주변부의 활력과 사람들의 열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의 열린 마음에 찾아가 말을 거는 분입니다.
또한 대림절은 아기 예수가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보여준 사랑과 자비로 인하여 나의 삶과 우리 공동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 오는 기다림입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분별하며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주시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 본문은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먼저 죽은 자들의 문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로 흔들리는 교회를 설득하기 위해 보내는 편지입니다. 일상의 감사와 평화를 말하기 어려운 때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기도와 감사와 기쁨을 통해 삶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갈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기다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수동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거룩함을 이루며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찾아와 말을 건내고, 같이 아파하고 함께 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거룩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대림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세상에 속한 우리는 당장 오늘 저녁 식사 메뉴에 대한 고민에서터 집을 사고파는 문제, 노후 준비, 자녀의 학업과 취업, 가족의 건강, 취직과 승진, 결혼 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니 삶에 치인 나에게 성탄절은 부디 ‘쉼과 즐거움으로 남아다오’라고 외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는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전합니다. 너희는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천사들과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2:14) 우리는 수백 번 들어 익숙한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팔레스타인 휑한 광야 벌판에서 오로지 달과 별이 쏟아내는 빛에 의지하는 깜깜한 밤, 천사들에게 이 가난한 아기의 탄생 소식을 들고 목자들에게 다가갑니다. 목자들은 뜻밖의 소식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예수의 탄생은 목자들의 삶을 전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신비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경험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고 세례요한이 그러하듯이 겸손한 예수의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대림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의 기다림에는 신비와 간절함이 살아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이 내 삶을 충만하게 하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자리가 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신비가 떨리는 경험으로 마음 깊숙이 자리하여 무용해 보이는 생의 수고들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하여 예배와 신앙의 자리가 나의 안위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연대의 자리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이대 대학교회에서는 해마다 대림절 묵상집을 공유합니다. 올해는 ‘본회퍼와 함께 기다리는 성탄’으로 2017년 묵상집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본회퍼의 말씀이 워낙 좋기도 하고 2017년 12월과 2023년의 12월의 요일이 같기도 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묵상집 안에 1933년 본회퍼가 12월 17일 세 번째 대림절 주일에 한 설교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본회퍼는 영국 런던에 독일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90년 전 오늘 본회퍼가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세상의 힘 있고 위대한 자들이 용기를 잃고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두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말구유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누구든지 말구유에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곳에서는 옥좌가 무너지고 강자가 떨어지며 권력자들이 곤두박질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낮고 낮은 자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933년 12월 17일 본회퍼 대림절 설교)
말 구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어두운 곳에 그분이 먼저 가십니다.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을 세우며 권력의 틈을 내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라고 선포합니다. 본회퍼는 인간의 존엄을 이 유린당하고 폭력으로 무너지는 세계를 목도하면서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말할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우리 역시 한국 사회의 오랜 갈등과 분열 속에서 두려움과 증오를 넘어 대림절의 희망을 전할 수 있을까 묻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잊어버린 구원의 신비를 회복하고, 아기 예수의 오심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갈지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파송의 선언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두운 곳에 가장 작은 자로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깨어진 삶을 회복하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며, 용서와 화평을 이뤄가는 희망의 빛이 되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