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주일 향린교회
어둠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 2,1-20 갈라디아서 4,4-7 이사야서 9,1-7
홍주민 목사
우리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습니다. 기독교 이천년은 예수에게 영향받은 이들의 영향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도 그러합니다. 보통 종교개혁을 독일의 마르틴 루터와 함께 500년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100년 전 체코의 얀후스에게 시작된 종교개혁을 주시해야 합니다. ‘얀 후스’는 체코에서 개혁운동을 하다가 로마 가톨릭에 의해 1415년에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그는 “아무리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아무리 막아도 거스를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결국 100년 후 독일 자그마한 시골도시 비텐베르크에서 후스가 백조라 칭했던 마르틴 루터는 후스의 영향을 받아 개혁운동에 뛰어듭니다. 루터는 1520년 로마 가톨릭과의 문서전쟁을 마감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쓰파다.” 결국 개신교는 600년 개신교 운동의 영향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도 마찬가지로 이 땅에 140년 전에 들어온 개신교의 영향사입니다. 저는 구한말 개신교를 받아들이신 조부모님을 통해,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부모님을 통해 영향을 받고 교회에서 성장하다가 일반대를 마치고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들어와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향린교회를 생각하면 내게 영향을 주신 두 분이 떠오릅니다. 안병무 박사님과 홍근수 목사님이십니다.
공동체를 희구하며 예수의 얼굴을 한 교회를 평생동안 추구하신 안박사님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온 생애를 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차라리 역사적 예수같이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십니다. 1987년 신학대학원 첫해 강의실과 채플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설교단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는 그 분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와 오버랩되곤 했습니다.
안박사님의 성서학 세미나 시간에는 많은 학생들이 수강을 하였는데 학문의 엄정성을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안박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10년간 성서신학을 하셨는데 저도 동문으로 그 곳에서 10년간 디아코니아학을 공부했습니다. 안박사님이 앉아서 공부하시던 그 대학 신학도서관에서 안병무 선셍님의 박사논문을 읽으면서 생생한 그 분의 학문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분은 전두환의 폭정시절 신대원 채플 때 설교자로 단에 서신 홍근수 목사님이십니다. 홍목사님은 예배 마지막 파송사에서 신학생들을 향해 “가서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하였듯이 전두환에게 저항하라”고 거침이 없고 단호하게 일갈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목사님의 눈은 바로 불이 떨어질 듯한 불덩어리였습니다.
이런 선생님들의 삶은 내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때문에 여태껏 살아오면서 비굴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그 분들의 뒤를 잇겠다는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서서 다시금 불을 지펴가는 삶을 저는 한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이 자랑스러워했지요.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어린 양 예수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저는 해마다 대림절 절기엔 언제나 헤른후트별을 책상옆에 두고 지냅니다. 헤른후트별은 헤른후트 형제단에서 연합의 고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별은 신약성서에서 말한 베들레헴에 출현했던 별을 대림절기와 성탄절 시즌에 만드는 전통으로 이어져 왔는데, 19세기 초 독일의 헤른후트 형제단 학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독일엔 대림절기 내내 전국에 이 별이 달려 있습니다.
지난 여름, 덴마크의 헤른후트 헹제단 도시인 크리스천펠트에 초대를 받아서 갔었는데 그곳은 일년 내내 이 별을 켜놓는 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과 덴마크 그리고 체코를 방문하며 저는 헤른후트 형제단의 역사적 흔적과 영향사를 더듬어 볼 수 있었습니다. 개신교의 웅혼한 전통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600년 전 얀 후스의 정신에 영향을 받은 헤른후트 형제단에서 우리 한국 개신교가 전통을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지 전통의 타다 남은 재를 기리고 과거의 이야기를 되뇌이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전통의 의미는 오늘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 전통의 불을 다시 지피고 불을 지르는고 빛을 발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저는 디아코니아를 실천하는 디아코니아 목사입니다. 지금은 수원에서 난민 디아코니아와 노숙인 디아코니아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케밥하우스도 운영하는데 항상 이 헤른후트 별을 그곳에 밝힙니다. 올해는 집과 난민센터에 헤른후트별을 달고 그 별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달간 대림절기에 유심히 그 별을 보면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중해서 그 별을 보고 있는데 세 개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맨 가운데를 주시하는데 예수님이 오신 베들레헴의 말구유, 즉 말의 여물통이 보입니다. 통나무를 잘라 투박하게 구멍을 판 말밥통 말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더 집중해서 보니 구유가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더 집중해서 보니 나중엔 영광에 둘러싸인 밝은 빛이 내게 다가옵니다. 대림절기 내내 그 별을 보면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헤른후트별과 함께 형제단의 중요한 보물은 헤른후트 로중입니다. 294년 전부터 매년 묵상집으로 출간되어 70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100개의 나라에서 200만 여명이 동시에 읽는 이 묵상집은 한국어로 제가 2009년판부터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서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이들이 보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얀 후스의 후예들이 1457년 시작한 형제단은 1722년 독일에서 친첸도르프라는 개신교 개혁가가 후스파들과 만나면서 다시 재생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 묵상집을 시작한 동기는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는가”에 관련된 물음이었습니다. 친첸도르프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라는 명제아래 매일 두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슴에 부딪히는 말씀을 그 날의 영적 무기로 삼고 살 것을 권했고 오늘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묵상집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교수형당한 마지막 아침까지 가슴에 품은 영적 무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 헤른후트 묵상집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 주신 복음서의 말씀을 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요즘 분쟁으로 대형 참사속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는 시리아, 갈릴리 나사렛, 베들레헴이라는 지역이름이 나오는데, 현재는 마음대로 여행도 할 수 없는 세계의 분쟁지역입니다.
지난 두 달반 동안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가자지구 전체 인구의 80%가 넘는 190만 여명이 생사의 기로에 서서 난민길에 올랐습니다. 지난 두달 반동안 팔레스타인인은 2만 여명, 이스라엘인은 1천 2백여명이 생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현재 기준 가자지구의 병원 36곳은 파괴되어 폐업상태이고 남은 8개 병원만 가동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도주의적 참사이자 하나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는 가자지구의 현실입니다.
먼저 누가가 전한 말씀에 따르면, 두 개의 장면이 나옵니다. 2000년 전네 바로 그 지역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한 몸으로 로마 황제의 칙령으로 북쪽지역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인 남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제국의 정책상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시행한 명령에 의해 호적등록을 하러 간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출산합니다. 그런데 들어갈 여관방이 없었던 고로 아기를 낳아 포대기에 감싸 말을 키우는 헛간의 구유에 누이게 됩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들판의 목자들이 천사와의 만남을 통해 들은 예수 탄생의 전언입니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베들레헴에 한 아이가 구유에 탄생하는데 하나의 표징이 되는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구유에 누인 자체가 표징이라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들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이 알려주신 것처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한 부류는 목자들의 말을 이상히 여깁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말을 고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며 표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표징은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드러내 보이는 뚜렷한 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대의 징표로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징표에 대해 무관심하고 둔감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반응을 합니다.뚜렷한
2000년 전 예수의 탄생 자리는 구유이자 하나의 표징이었습니다. 구유는 말밥통입니다. 통나무에 구멍을 파고 여물을 주는 그런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고 검고 칙칙한 자리입니다. 구유는 누추하고 멍든 자리입니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자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낮고 천하고 멍든 자리에 오셨습니다. 헤른후트 별을 보며 가장 먼저 제 마음속에 그려지는 상은 바로 말구유였습니다.
그런데 별을 계속보고 있으니 구유가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예수가 서른 세해동안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가슴에 멍든 이들을 친구로, 아니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여기며 사랑하다가 그들과 하나된 이유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는 멍든 처형대였습니다. 가슴은 창으로 찢기고 머리엔 가시로 찔린, 손과 발엔 못으로 박힌 끔찍한 멍으로 가득한 자리였습니다. 금관을 쓴 예수, 시멘트에 갖힌 예수가 아니라 철저히 버림받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배반당한 자리요 저주의 장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처음 자리는 구유라는 멍든 자리였습니다. 살아가는 내내 변두리 갈릴래아, 멍든 민중들의 멍든 자리에서 민중들과 친구되어 하나되어 살다가, 결국엔 중심부 예루살렘에서 가슴에 멍을 안고 하늘을 향해 자신의 버림받음을 항변하며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의 별, 그 빛은 구유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별을 계속 주시하다 보면 결국은 영광의 불길로 둘러싸인 찬란한 빛으로 다가온다. 영원한 생명속에 이르는 그 빛, 어둠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그 빛으로 예수는 둘러싸인 채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 내내 별을 보면서 이 세 개의 신비한 경험, 즉 구유와 십자가 그리고 영광의 빛의 경험을 하면서 오늘의 구유가 어디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의 구유는 어디인가요.
저는 지금 수원에서 난민과 노숙인 디아코니아를 하고 있습니다. 6년 전 예멘에서 난민으로 온 친구들을 돕다보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사회적기업으로 케밥하우스 겸 난민센터를 세워 난민들의 기댈 언덕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4년 전부터 헐벗고 굶주리는 노숙인들을 향한 디아코니아를 하고 있습니다.
두 부류의 약자 이웃들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만난 후부터 그들과 함께 디아코니아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2000년 전의 처음자리인 구유, 말밥통에 현존하는 아기 예수와의 만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후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축제가 아닌가 생각듭니다.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서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던 터를 떠나야 하는 난민들이 지금 세상에 일억 이천 만명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지난 두 달 반동안 20,000여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아이들은 온몸이 찢긴 채 건물더미에 묻혔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만명이상이 난민이 되어 자기 터를 떠났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닙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일전 케밥하우스에 러시아 청년이 왔습니다. 케밥을 먹으러 왔다가 대화를 통해 그가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물 세 살의 모스크바 출신의 전자공학 전공자입니다. 스물 갖 넘은 젊은이가 고향과 친지를 떠나 건축현장에서 고된 일을 하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은 가슴에 멍든 난민이나 노숙인들을 만날 때 갖게 되는 아픈 경험입니다. 우린 어디에서 오실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어둠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는 세상의 멍든 자리에 오십니다.
누가복음 22.27에서 예수는 이 땅에 시중드는 이로 왔노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런데 예수는 여기에서 누구에게 시중든다고 말한 것일까요. 가슴이 멍든 약자 이웃에게 시중든다는 말이지요. 예수에게 있어 시중든다는 건 몸으로 멍든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머릿속으로 가 아니라 몸으로 함께 그들과 아파하고 손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오늘 바울 서신을 통해 주신 말씀은 구유에 나신 사람의 아들 예수가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 즉 몸값을 내고 풀려나게 하시고 이제는 우리가 당당하게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문서에서 개신교 신학의 핵심을 말합니다: 아들의 영을 가슴에 모신 그리스도인은 자신안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아들의 영에 의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종속당하지 않고 자유한 존재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웃에게 사랑의 종으로 자신을 유보하지 않고 사랑 행동을 한다. 이렇게 분명히 정리를 합니다.
신앙안에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사랑으로 약한 이웃에게 종이 된 역설적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결과 예수가 그랬듯, 얀 후스가 그랬듯, 본회퍼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인은 고난당하는 이 곁에 항상 서있습니다. 구유에 나신 예수를 계속 주시해보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이는 고난의 강을 건넙니다. 그 후 우리에게는 부활의 영광의 불길속에 그 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러한 구유와 십자가 고난의 길 위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을 통해 어둠속에서 고통받는 날이 지나간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전쟁은 그치고 어둠속에서 큰 빛이 비춰질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빛으로 밝아질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복된 현실이 도래할 것이다. 주님께서 압제자들의 멍에를 부수시고 압제자의 몽둥이를 꺽어 버릴 것”이라는 희망의 빛을 던져주십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반, 이제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검찰독재 파시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의 오물을 뒤집어쓰고 고난의 행군을 거친지 얼마 안되었는데, 검찰독재라는 신종 구정물이 온 나라에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특히 이 괴기스러운 광기는 교회를 농락하면서 버젓이 성전침탈도 하고 교인들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100년 전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이용해 독재를 강행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를 향해 적그리스도라 명명하며 투쟁했습니다. 이제 이 땅에도 이리같은 검찰독재가 양의 탈을 쓰고 교회를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은 적그리스도 파시스트 정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독재자의 멍에와 몽둥이를 부수시고 꺽어 버릴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안산에서 열린 세월호 10주기 성탄예배에 참여를 했습니다. 2014년 성탄예배 때부터 열번째 헤른후트 로중을 유가족분들께 전해드렸습니다.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해 드렸습니다. 유가족들을 뵈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을 드려야할지 먹먹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 서두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해 성탄예배 때는 설교가 없었는데 이유가 성경어디서도 말씀을 찾을 수가 없어서였다고 하십니다. 지난 십년간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이루어진 게 없습니다. 희생된 아이들을 위한 추모안전공원도 진척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누울 자리가 없단 말입니다. 말을 잃고 말씀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이태원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현 정권이 법을 월권해서 시행령통치를 한 결과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길을 가다가 서울 한복판에서 서서 죽임을 당한지 일년이 넘었습니다. 세월호 10주기 성탄 예배에 이태원참사 유가족분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한 사태를 막을 수 없이 이성이 마비된 사회, 미개한 사회입니다. 어둠이 덮친 후 멍든 가슴들이 더해 갑니다. 진산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재발방지를 위한 법의 제정도 진척이 전혀 없습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대림절기 마지막 주일, 주님의 전에 모인 교우 여러분,
정말 안팍으로 힘든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기도, 이스라엘 왕이 나셨도다 라는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도 힘든 해입니다. 이번 성탄엔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가 축하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가자지역의 학살에 대한 저항의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교회엔 돌더미에 쓰러져있는 아기 예수를 성탄 조형물로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 여러분! 우리 멍든 가슴에 어둠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의 빛, 그 빛되신 주님을 참회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 안에 모십시다.
그 분은 평화의 왕이시며 공평과 정의로 굳게 세우시는 주님이십니다. 구유와 십자가 그 너머로 보이는 영광의 빛 찬란한 빛을 바라봅시다. 지금은 혼돈의 영 사탄의 영이 마치 우리를 삼키려 광란을 일으키지만 구유에 오셔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이번 성탄에 조용히 섬기며 사랑하며 예수의 혁명, 하나님의 혁명의 현장에 나서기로 합시다. 그 현장에서 구유에 오신 그리스도를 만납시다. 어린양 예수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 분을 따라갑시다!
우리의 지각을 넘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번 성탄에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침묵속에서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그분께 귀를 기울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