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04 신학교육주일
이서영 목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신약학)
지켜보기: 감시인가, 관심인가?
(창세기 2:1-3 / 마가복음 3:1-6 / 로마서 14:1-12)
매년 2월 둘째 주일, 그러니까 다음 주일이 신학교육주일입니다. 신학교육주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후보생을 양성하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위하여 기도와 협력을 구하는 주일입니다. 아시고 느끼시는 것처럼, 우리는 교회, 신학, 신앙이 저평가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나 신학교와 관련된 통계, 신뢰도를 나타내는 숫자는 계속하여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와 미디어가 교회의 위기, 신학교의 위기, 신학과 신앙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있다고 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목표가 의미 없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와 신학교는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향린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교육하고, 경건의 일꾼을 양성하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위하여 지속적인 기도와 협력 부탁드립니다. 학교는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다시 살아나고, 성도들의 신앙이 회복될 수 있도록 교회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해 주시고 협조하여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는 관심, 기도, 후원을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는 창세기 2:1-3, 마가복음 3:1-6, 로마서 14:1-12 말씀과 함께 “지켜보기: 감시인가, 관심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뜻을 나누겠습니다. 작년 8월 중순 새벽 1시에 춘천의 한 택시 기사가 소양강 처녀상이 있는 곳을 가자는 50대 승객 한 명을 태웠습니다. 새벽 1시에 스카이워크가 있는 이곳을 가는 것이 이상하여 왜 가는지 물었지만, 승객은 ‘바람 쐬러 간다’라는 짧은 대답만 하였습니다. 목적지에 와서 승객이 내리자, 기사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객을 한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승객은 나쁜 마음을 먹고 높은 난간에 올라타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습니다. 곧장 기사님은 112에 신고를 하였고, 이 승객의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요, 이 기사의 제목은 ‘작은 관심으로 생명을 살린 택시 기사’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사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이런 기사에는 ‘작은 관심이 무엇 무엇을 했다’라는 타이틀이 의례 붙습니다.
여러분 관심이 무엇일까요? 간혹 ‘관심법’ 때문에 관심을 마음을 보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관’자는 ‘볼 관’(觀)이 아니라 ‘관계할 관’(關)입니다. 즉 관심은 마음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단순히 보았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 타자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당겨서, 나에게 타자의 마음이 연결될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문요한)는, 관심은 “연민, 호감, 호기심이라는 감정의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대상에 대한 판단 이전의 이끌림”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관심’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설명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의 마음에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연결’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연결되는 곳에서 항상 생명의 살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회당엔 마침 손 마른 사람이(일종의 소아마비)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은 이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시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παρατηρέω(파라테레오)인데요. 문자적으로 ‘따라가면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시와 같은 눈초리로 누군가를 주시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절부터 3장 6절은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혹은 율법학자 사이에 율법에 관하여 논쟁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마가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그 주변 사람을 지켜보는 바리새파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2장 16절에서 예수님이 죄인, 세리와 식사하는 것을, 2장 18절에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2장 23절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있고, 그리고 3장 2절에서 손 마른 사람과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하여 지켜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상대를 살펴서 생각과 언어와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잘잘못을 따져서 상과 벌을 내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지 주시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만 제국의 억압이라는 하나님의 징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유대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를 강조하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의 율법 조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갈릴리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고, 율법은 바리새파의 지배권을 유지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통제와 지배의 수단이 되어 버린 안식일 조항과 그것을 집행하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에 마땅히 확인하고 누려야 할 삶의 평안, 안식, 생명의 충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던 손 마른 사람의 치유와 삶의 회복은 바리새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법적인 경찰의 시선으로 안식일을 지켰고, 사람과 세상을 평가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시선엔 감시당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의 태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안식일, 회당 한구석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손 마른 사람의 소외를 보았습니다. 후미진 곳에서 삶의 회복을 기도하는 그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회당 한가운데로 불러 세웠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이 보게 하였고, 그가 회당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손이 마른 채 살아가는 그의 고통이 회당 안 그들의 고통이 되게 하였고, 손이 낫고자 하는 그의 소원이 회당 안 그들의 소원과 기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손 마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그의 회복을 자신의 회복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삶을 살아나게 하는 시선은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간섭하는 시선이 아니라, 삶에 동감하고 연민을 느끼고 지지하는 관심입니다. 구원과 생명은 동감하는 하나님의 마음, 지지하는 그리스도의 손길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연민, 지지, 동감으로 삶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역동성으로 살아나지만, 판단하고 평가하며 간섭하여 타자를 부리려 하는 곳에선 오직 ‘가스라이팅’만 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억압과 통제로 삶의 역동성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의 ‘지켜봄’은 살리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억압과 통제로 손 마른 자를, 회당을, 안식을, 안식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을 죽이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결국 말씀의 끝에서 바리새인들의 악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지로 귀결되고 맙니다.
지난 2년 가까이 지켜보았지만, 세상은 판단하고 평가하고 간섭하며 협박하는 검찰과 경찰의 힘으로 바르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택적 정의로 이편과 저편을 가르기만 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후퇴시켰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가치 기준만을 강요합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약자와 타자에 대한 연합, 공존, 존중, 공감의 가치에 거부권만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향한 연민, 이해, 공감’이 좋은 것이라 하십니다. 그것이 사람, 사회, 교회, 지구의 생명을 살린다고 하십니다. 신학은 생명을 살리는 하늘의 시선에 관심을 두는 학문입니다. 신앙은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는 구도의 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들어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 구원의 희망을 세워가는 곳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가치관이 살아있는 곳에서 교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와 존중의 태도로 교회가 어떻게 새로운 가치관을 세상에 세울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은 로마교회의 갈등 상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으며, 21절을 보면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특정 절기와 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는 것과 특정 절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것과 특정 절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1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로마서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유대 전통과 문화를 아직 포기하지 못한 기독 신앙인이었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강한 자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들은 로마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먹는 것과 절기에 대한 태도가 유대인보다는 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것과 절기의 갈등이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한 심한 비판과 혐오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12절 사이에 ‘비판’이라는 단어가 4번이 나오고요 ‘업신’이란 단어가 두 번이 나옵니다. 특히 ‘업신’은 헬라어로 ἐξουθενέω(엑크우떼네오)인데요. 문자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별 볼일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하여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서로의 존재를 비하하고,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의 우위를 주장하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은 바울의 선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에서 11장 19절에 보면 교회가 박해를 받아 흩어질 때, 흩어진 자들이 선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은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고요, 이방인은 이방인에게만 선교를 합니다. 이것은 초기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하였고, 이들은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많은 갈등과 논쟁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거부하여 바울에게 ‘위선자’라는 심한 모욕적인 비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유대인 출신임에도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모두의 구원과 은혜를 추구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혁명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1세기 세계관, 질서를 거부하는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1세기 사람들은 종족과 민족으로 나누어졌고, 서로 우위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3절에서 바울은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나 그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선언합니다.’ 5절에서는 민족과 전통에 따라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절기와 날에 대한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합니다. 세상은 노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지만, 4절에서 바울은 ‘노예(가정 노예)를 비판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 또한 주님이 ‘세우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6절부터 8절에서 지리적 민족적 출신 배경이 다르고, 살아왔던 삶의 역사가 다르지만, 바울은 누구라도 그의 삶은 ‘주를 위한 삶’이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 똑같이 ‘감사해야 할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그들 모두의 주님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였으며,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평등한 존재임을 바울은 긍정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를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언사를 반대합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서 3장 27절, 28절에서 이와 같은 혁명적 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언은 1세기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인종적, 계급적, 성적 차별이 엄연한 사회에서 바울은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눈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넓혀져 갔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편 가르는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적대하기 위한 공격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세계관에 갇혀서 유대교가 아닌 세계를 혐오하고 적대하였던 바울의 눈을 확장 시켜 그야말로 모든 세계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보게 하였고, 바울의 발을 그곳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저는 종종 묻습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믿음은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좁게 하는지요. 아니면 넓게 하는지요? 믿음 때문에 세상을 좁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핑계로 사람 사이에 경계와 담을 합법화하고, 믿음을 핑계로 사람과 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연합과 연대의 역사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유대 지역을 넘어 사마리아 사람들 포함하였고, 안디옥으로, 갈라디아로, 에베소로, 고린도로, 로마로 확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대적 사이였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형제가 되었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하였습니다. 노예와 주인은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었고,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협력의 관계를 확인하였습니다. 1세기에 이런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였을까요? 그러나 초기 교회는 이런 세상을 상상하는 공간이었고요. 성도는 이런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공간은 하나의 인종, 하나의 문명, 하나의 이념, 하나의 가치로 독점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모두에게 평화와 은혜가 공평한 예배이어야 합니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안식을 선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하시며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의 안식은 피조물의 생명이 완성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신학이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어린 관심과 마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길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이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과 가치관이 되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교회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세상을 세우는 길잡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