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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체현의 영성 ㅣ 김지목 ㅣ 2024-02-11

by 김지목 posted Feb 11, 2024 Views 9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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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2-11

하늘뜻펴기 20240211 주현절6

 

체현의 영성"

왕하2:1-12 50:1-6 고후4:3-6 9:2-9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산상변모주일로 기념합니다. 오늘 마가복음서 본문의 장면대로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던 일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이 일은 예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특별한 마음가짐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산을 올라 제자들이 목도한 사건, 곧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모습이 새하얗게 변하셨던, 이 사건이 가진 신앙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교회는 오늘을 산상변모주일로 지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세 차례 언급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통치자에 사로잡혀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제자들에게 세 차례 말씀하셨는데, 이번 산행은 첫번째 수난예고 후에 결행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때를 예감하시고 가장 처음 행하신 비장한 산행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산상변모주일은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전환되는 중요한 기점이 됩니다.

 

민중들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나라를 경험했습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고 천국잔치를 맛보며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주현절은 그렇게 신명난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이제 수난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깊은 절망과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이 길을 회피하지 않고 수난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산행은 비장하고도 외로운 등반이었을 것입니다.

 

산상변모주일은 사순절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를 결단하면서 비장하고 외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산을 오르는 날입니다. 오늘 제1성서 열왕기하의 본문에서 스승 엘리야와 이별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운 엘리사의 심정이 오늘 산행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예언자의 시조로 상징되는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아합왕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제사장들과 대결한 예언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것은 맘몬의 바알종교와 투쟁한 야훼사상의 흔적입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로 유입한 용병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남북교역로를 연결하여 북이스라엘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는 가진 자들의 풍요였고 아합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권력에 가진 것을 빼앗기며 양극화가 심해졌을 때 예언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강력한 왕권 하에 아합은 북쪽의 페니키아와 결혼동맹을 맺고 이세벨을 맞이합니다. 무역과 자본이 발달한 페니키아는 알파벳의 고장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세벨과 함께 맘몬의 신 아세라 여신도 이스라엘에 들어왔습니다.

 

아합이 자기 권력을 위하여 섬겼던 바알과 이세벨의 아세라 여신이 북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야훼종교가 위협당했고 그만큼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입니다. 아합왕이 자기의 정원을 가꾸고 싶어서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고 그 밭을 사고자 했으나 나봇은 야훼사상의 규례에 따라 땅을 사고 팔 수 없다면서 왕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이 기가막혀 하면서 이내 나봇을 죽이고 포도밭을 갈취했습니다. 풍요의 신 바알과 맘몬의 신 아세라가 북이스라엘의 야훼사상을 어떻게 잠식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 사건이 촉발되어 엘리야는 갈멜산으로 소환됩니다. 건기가 극심하던 때에 바알과 야훼 중 어떤 신이 비를 내리게 할른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이 바알과 아세라의 성적 결합을 상징하는 집단성교와 몸을 자해하는 제의를 벌였지만 결국에 엘리야를 이기지 못했다는 전승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자의 시조가 됩니다.

 

오늘 열왕기하의 본문은 엘리야가 예언활동을 종료하고 승천하기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제자 엘리사는 스승의 마지막 길을 지키고자 비장한 마음으로 엘리야를 따르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따라오지 말고 이곳에 남으라고 권하지만 엘리사는 결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반복하면서 길갈에서 베델,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 맞은쪽으로 장소가 이동됩니다. 이것은 높은 지역에서 점점 낮은 지역으로, 그리고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서진(西進)했던 것의 반대로 동진(東進)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엘리야의 권위를 엘리사에게 물려주어서, 엘리사가 적법하게 예언자의 지도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엘리사가 스승님의 능력의 갑절을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갑절이란 두 몫을 뜻합니다. 이는 가문의 재산을 삼분할 하고 3분의 2가 장자의 몫이었다는 당시의 상속문화를 반영하여, 이 역시 엘리사가 엘리야를 잇는 적자임을 뜻하는 문학장치입니다.

 

마지막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할 때, 오늘 본문에는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만, 12절 하반절에 엘리사가 슬퍼하며 옷을 찢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옷을 찢는 행위는 비통함을 뜻하는 풍습입니다. 스승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엘리사는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엘리사였습니다. 그의 비통함과 슬픔이, 오늘 산상변모주일을 지키며 등반하는 우리의 심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과 산을 올랐던 세 제자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주 산에 오르신 예수님이었으니 여느 때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새하얗게 밝게 빛났고 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는 너무 놀라서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스승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살겠다고 말합니다. 올라온 산 위 그곳이 마치 천국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오른 그 큰산은 시내산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기 전에 잠깐 머물렀던 산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이집트 노예들의 편이 되어주신 하나님, 백성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율법으로 평등세상을 가꾸시는 하나님 등의 야훼사상이 정립되고 시작된 장소는 시내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으로 와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 대결을 벌인 후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서 피신한 곳도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서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중에 임재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야훼께서 남겨두신 7천명을 찾아서 다시 용기내어 이스라엘로 들어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서 이스라엘이 새 힘과 용기를 얻게 된 곳은 시내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새 힘과 용기로 이끈 지도자는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예언자의 상징 엘리야가 밝디밝은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았으니 제자들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함께 산위에서 살고 싶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산 위는 다시 시작하는 곳입니다. 시내산처럼 힘과 용기를 얻어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시 출발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머물 수 없는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랐을 때 산 아래에서 백성들은 야훼를 잊어버리고 이집트의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불신앙을 정화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시내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천둥소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깊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성찰하고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이상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산 위, 그곳에서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 위로 올라올 때의 무거운 마음, 인간적인 두려움을 떨치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모산의 사건입니다.

 

새로운 출발은 산을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산 아래에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예수님의 발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릅니다. 내려가면 예수님이 수난당하실 것을 감지하지 못했더라도 산 아래의 일상이 고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엘리야와 모세를 만난 산 위 그곳에서 내려오자니 아쉬움이 그지없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본문의 표현대로 산 아래에는 세상의 신"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신입니다. 세상의 신"이 모세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했고, 세상의 신"이 아합과 이세벨에게 권력을 쥐게 했습니다.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상, 풍요라는 덫을 놓아 약육강식으로 지배하는 강자들의 세상. 산 아래에는 탄식과 고통이 언제나 상존합니다. “세상의 신"은 강자를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언제나 소외된 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합니다.

 

오늘 산상변모주일은, 그럼에도 우리를 산 아래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뭇거림 없는 발걸음을 내딛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오늘입니다. 그 길에 하나님나라, 우리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우리의 발걸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신"을 넘어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 종교의 목표입니다. 약육강식 야만의 질서를, 생명 정의 평화 하늘의 질서로 변화시키는 것,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것, 우리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야훼사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 이루어 나갈 꿈입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의 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산을 올라 변모하고 또 산 밑으로 내려오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향린공동체 이곳이 우리의 변모산입니다.

 

무겁고 비통한 마음으로 왔을지라도, 두려움과 외로움을 떨치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여, 세상으로 머뭇거림 없이 나아가갈 수 있는 우리 향린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두건을 써야 할 만큼 빛나는 존재가 되었듯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서 위로를 받고 확신으로 용기를 내었던 엘리야와 같이, 변모산의 사건이 우리 공동체에서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현현하셔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현현을 우리의 삶으로, 우리 공동체의 몸으로 체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체현의 가능성을 이미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미 지식의 빛을 주셨고,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빛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이 되도록 힘쓰고 빛을 잘 만들어서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빛을 받았으니 그대로 세상에서 빛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경건함으로 내 안에 신실하게 비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빛을 찾는 수행과, 말씀과 묵상 가운데 내 안에서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두려움과 불신을 떨쳐내는 일이, 이곳 향린 변모산에서 이루어지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 산 아래로 발걸음을 내딛을 있기를 소망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

 

(파송사)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향린 변모산에서 새 힘과 용기를 얻으십시오.

우리는 저마다 작은 빛일지라도

 

우리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면 밝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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