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40331 부활주일
“증인"
사25:6-9 시118:12,14-24 행10:34-43 막16:1-8
태양력의 24절기 중 춘분 후, 첫 보름달이 뜨고 난 후 첫번째 일요일을, 그리스도교는 부활주일로 제정했습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오늘,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신앙을 되새깁니다. 2천년의 시간 동안,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은 매우 특화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산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 이것을 초월하는 영생에 대한 관심은 많은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주제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종교는 죽음과 영생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인생의 바른 길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면서 진선미의 세상을 이루는 것, 이것이 생명을 주신 신의 뜻이며 죽음 너머 영생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종교는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 또한 이러한 취지 안에 있습니다.
다만 부활을 특화시킨 그리스도교는, 죽음현상에 대한 정적인 성찰이나 죽음 후 영혼의 행방을 좇는 관심보다는, “죽임의 세력" 즉 “사망권세"를 극복하는 것에 강한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다가 죽어간 생명을 하나님이 부활시키시어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신다는 영생의 비밀을,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사상은 제1성서의 사상적 줄기인 히브리사상과 주후 1,2세기 당대 거대한 도전이었던 그리스 헬라철학의 상관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히브리의 율법과 예언으로 전승된 야훼사상과 헬라철학의 형이상학 사이에서, 유대국수주의와 영지주의사상을 공히 극복한 새로운 사조의 결실을 우리는 제2성서의 부활사상으로 전수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너희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선언하면서 유대주의를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으로 드러난 야훼사상을 계승했습니다. 더불어 헬라철학의 고차원적인 지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성속이원론으로 노예와 자유인의 이분법적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헬라사상의 지배구조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강조된 것이 “몸의 부활"입니다.
순수이념의 초월계와 그것의 그림자인 현실계를 분리하는 세계관을 가진 헬라철학은 인간의 삶은 영혼의 감옥으로, 죽음은 영혼이 현실계로부터의 해방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고상하게 순수한 이념만을 추종했습니다. 영혼의 이념이 고상해질수록 인간의 삶과 생명은 가벼워지고 사회의 하부구조는 천대받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층민의 공동체였던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강조하면서, 지배체제를 조장하는 헬라철학의 이원론적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몸의 부활"은 곧 “헬라철학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는 초대교회의 선언이었습니다. 이러한 “몸의 부활"의 의미를 오늘날 한국교회가 단지 “주검의 소생”으로 치부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신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히브리사상은 구체적인 삶의 간절함을 기반으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구원의 의미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후 이상세계에 입적하여 성취하는 사후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구호로 살 길을 터주는 것이 구원의 의미였습니다. 율법은 약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사회보장법으로 제정된 것이었고, 예언은 사회정의로 공동체 삶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히브리 전통에서 평화란, 자기의 포도나무 아래에서 만족하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후에 초대교회는 이같은 야훼사상이 불멸하는 영생의 울렁거림을 경험했습니다. 부활사건이었습니다. 혁명을 체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제자들은, 민중들이 곳곳에서 봉기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하나님나라 운동이 예루살렘과 유대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다시 희망과 저항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제2성서에서 부활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는 “에게이로"와 “아나스타시스"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각각 “봉기하다, 일어나다" 그리고 “대항하다, 맞서다"는 뜻을 가집니다. 헬라철학이 잉태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유대주의자들의 기득권에 의해, 하나님나라 운동의 기수였던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지만, 오히려 민중의 봉기와 저항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이 되살아난 사건. 이 사건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종교적인 선언으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13절)고 증언합니다. 민중의 부활을 예수의 부활 앞에 두고 있습니다. 민중의 다시 일어섬/봉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유리되지 않으며, 민중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쳐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절망하던 민중에 의해 하나님나라가 다시 일어나는 사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성서 속 인물들만이 아닙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길어 올려서, 이 시대 민중을 죽게 하는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사람, 절망을 딛고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복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러 갈릴리로, 엠마오로 가라고 증언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세포리스, 막달라, 가버나움는 로마의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가 농민들이 대규모로 학살되던 곳입니다. 엠마오는 마카비가 로마에 저항하던 때 중요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고, 후대 지명이 불확실할 정도로 폐허가 되었던 곳입니다. 오늘날 고난과 저항이 있는 곳이 갈릴리이고 엠마오입니다. 그곳에 계신 그리스도를 찾아나서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민중들과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영생하는 길임을! 오늘 부활절이 우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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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
갈릴리로 가십시오. 엠마오로 가십시오. 부활의 증인으로 사십시오. 그곳으로 우리보다 먼저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절망의 늪에서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영생의 삶을 사십시오.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