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기와 돌팔매질
본문: 마가복음서 4:35-41
성서일과: 사무엘기상 17:32-49, 고린도후서 6:1-13, 시편 107:1-3, 23-32
성서일과에서 제시한 네 본문을 보면서 과연 공통된 주제는 무엇이고,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일까를 살피면서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1-13,
교회공동체의 고민과 갈등이 고린도교회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쓴 바울은 일치와 단결을 강조하며 지도활동을 해 왔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분열의 원인은 본인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있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고 늘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 복음전파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인해 교회가 또 시끄러웠습니다. 본인 문제로 입방아에 오르니 체면도 체면이지만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이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시편 107:1-3, 23-32
마가복음과 엇비슷한 상황입니다. 높은 파도가 일렁이는 험난한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뒤집어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 주십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힘없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무엘기상 17:32-49,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주 듣던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결국 극적으로 이기게 됩니다. 어마무시한 최정예 군사력을 몽글몽글한 조약돌 하나로 돌팔매질로 하여 적장을 무찌르는 극적인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 4:35-41,
갈릴리호숫가를 건너던 중 광풍과 파도를 만나 혼동이 일어나고 이를 잠잔 게 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네 본문의 공통된 배경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네 본문에서 공통된 주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를 보고만 있으시지 않고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구약과 시편, 복음서에서는 자연현상과 전쟁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바울서신에서는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전쟁은 어떤 모양으로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극적 감동의 장면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오늘 구약의 말씀은 전쟁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전쟁, 감동적인 전쟁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혹하고 비극적입니다. 오늘은 때마침 6.25민족화해주일이기도 합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고 지금껏 남북은 갈라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도중에 화해와 통일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언제나 대결과 적대적 관계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얼마 전 삐라와 풍선이 오가더니 며칠 전에는 소련의 푸틴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동맹관계를 복원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응해 미국과 일본, 한국은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아니 바라는 듯 연일 전쟁 시나리오를 남발하면서 국민을 오히려 불안하게 하고 긴장 국면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강대국에 휘둘리며 비명조차도 못 내는 약소국의 서러움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저는 막대기와 돌팔매질조차도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남달리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해 온 자매교회인 향린교회와 평화를 위해 늘 기도하며 행동과 실천으로 일하며 애써오신 향린 교우들로선 더 큰 아픔을 겪고 계실 것 같아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어진 성서 본문인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막4:39) 말씀이 이 땅 한반도에 임하셔서 이를 보고 향린 교우들이 기뻐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뭇매 돌 하나가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치듯 이 땅 한반도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그저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는, 우리만 알고 있는 기도의 힘, 신앙의 열정이라고 믿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일은 언제나 옳은 일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여유로움과 단조로움이 때로는 세상을 구원한다.
예수님은 오늘 매우 피곤하셨는지 잠에 곯아떨어지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에이스 침대 위에 누워 계신 것도 아닌데 광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속에서도 편안히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대부분 어부로 구성된 제자들, 배라면 모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들 있어 대처를 잘할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데 주님은 태연하게 잠만 주무시고 계십니다.
많은 복 중에 잠 잘 자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합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흉이 아니라 잠 못 이루는 요즘 시대는 부러움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도 복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하루 8시간은 자주어야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농부들은 새벽과 아침, 그리고 저물녘 논밭에 나가 일을 합니다. 지혜롭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일할 때 자고, 남들이 쉴 때 일을 하곤 합니다. 엉터리죠. 아주 엉성한 일꾼입니다. 그렇다고 농부들이 모두 부자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농촌에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농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정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소리 지르고 싶고, 울고 싶고, 절규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저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와 배, 풍랑과 광풍에 대해선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세상은 효율성과 편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현대사회는 외형지상주의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모두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은 나아지고 있고 좋아지고 있나요. 오히려 세상은 더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노력은 순간적으로 무력화되고 성과물은 어느새 무용지물로 변해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둥지둥 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엔 예수님을 깨울 수밖에 없는 것이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 인간들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인간의 인식 안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현존하지만 초월해 계시는 분이라서 그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분명히 우리의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쉴 땐 쉬고, 좀 여유롭게, 그리고 단순함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푸념 한토막/농촌의 풍경
막걸리만 드셨다 하면 나를 찾아오는 농민이 있습니다. 신세 한탄을 합니다. ‘목사님! 저만 배부르겠다고 농사짓는 사람이 어디 있당가요? 낭가 묵는 재미가 사는 재미기 하더만 그런 놈은 남에게 밥 빌어먹을 놈이 아니겠어요.’
풀 뽑다 지쳐 그늘에 앉아 막걸리를 기울이며
‘지 때만 잘 살겠다는 농민 있당가요. 자슥들 살날이 얼마나 창창한디, 내 피붙이 아니어도
농사 지으면 내 자슥이나 한가진데, 땅 물 썩게하는 머저리가 어디 있당가요.’
내가 이번에 서울가서 예배드린다고 하니
‘도시것들 저거들은 밥 안먹고 물 안마시고 산당가요. 반반한 수입 농산물만 좋아하지들 말라고 해뿌려요. 어디서 어떻게 독한 약치며 키운 것인지도 모르는 것들 맛난다고 그리 쳐먹은께
생판 모르는 속탈이 나는거여요.’
‘그걸 나라 농업 정책이라고 씨부리는 놈이야말로 한치 접시에 코 박아 죽을 놈이지요. 그렇지요. 목사님!’
‘아재 말씀이 이 나라 농업을 살리자고 말로만 떠벌리는 정치가나 교수들보다 낫소’
‘아재가 시도 때도 없이 농촌 개발한다고 멀쩡한 땅 파헤치는 지사나 군수보다 현명하요’
그라니 쓰러지지 마시고 오래오래 농사짓고 사시요!!! 이야기가 끝이 없어 일만 자꾸 늦어지니 어서 가서 쉬라고 등을 떠 말았습니다.
논일하고 있는데 또 한 명 지나가더니 그냥 가면 되는데 논가에 주저앉습니다. 나도 일정이 있는 사람이고 빨리 일을 마쳐야 하는 데 아니나 다를까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잘못 걸렸드렀구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유월 논자락은 순간마다 풍경으로 미치게 하지만
농민 사는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왜 이렇습니까로 시작해서 끝이 없습니다.
‘쌔가 빠지게 고생해도
농지 임대료 주고 농협 이자 주고 기계값 비료값 농약대까지 탈탈 털어 주고 나면 남는 건 서늘한 빈 주머니.
일 년 내내, 해마다 나아지는 게 없으니, 어차피 가진 거는 나이 든 몸뚱아리뿐이니
왠만하면 농사 때려치우고. 막일로 입에 풀칠하자고 꼬시는 사람 늘어나지.
그래도 농사는 지어야지 하며, 천명인 줄 알고. 비틀어진 손마디로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않는 아랫마을 농사꾼, 어렵게 떼어놓고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어둑해진 들녘을 뒤로 한 채 집으로 오는 초여름 날 밤, 마을 방송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를 헤매는가. 동네 이장님이 밤에 사람 찾는 방송 하네요. 아까 헤어진 농부가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하네요. ‘술 없이는 못 산다고 하더니 환장하겠네요‘ 결국엔 모기도 많은데 정자나무 아래에서 술에 떡이 되어 잠자고 있던 아재를 찾아 집으로 데려왔다고 하네요.
마음 붙잡기
다시 고린도후서로 넘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1-13,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6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13절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동체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해와 편견, 견제와 따돌림, 시기와 질투 등 온갖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모습들이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습니다.
참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와서 세상이 혼탁해서 그런지 마음이 흔들리거나 깨지는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마음 한 번 다치면 원래대로 회복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복잡하면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미칩니다. ‘머리로는 되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우리 교회 어르신들이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건 괜찮아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문제는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마음이 안 움직이는 것이 큰 문제지요‘라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마음 다스리기 등 마음수련원, 마음 학교 등이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여유롭고 쉽지요. 복잡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그때 참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도한 자들과 소인배와 오만한 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 그것이 그때는 그렇게 눈에 거슬렸는지. 하면서 속상해하시는 분들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자기 세상 만났다고 설치며 목에 힘주고 설치지만, 그것은 복 받은 삶이 아니고 결국에는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을 것이네요‘라는 대화까지 나누고 헤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공동체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씀을 명상합니다. 모두가 종이 되어 서로 도우며 산다는 것은 부와 권력, 연령과 성별로 만들어진 인간관계에서 차이는 인정하나 차별은 하지 말고 서로 종이 되어 상대를 돕는 가정, 교회, 공동체, 사회, 그리고 나라가 된다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그 정신 속에서 향린과 들녘의 자매결연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내년에 30주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손해 보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기도 합니다. 세상 이치가 그래요. 그러나 억울해하지 마시고, 손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인의 길이니, 결국에는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향린교회는 들녘교회를 품어 주셨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의 저도 있게 했고 향린과 들녘의 관계가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시편 시인은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108:29)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려놓고 마음문을 열고 선한 삶을 살아가면, 세상의 혼탁함 속에서도 오히려 맑음이 드러나며, 어두움 속에서도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을 많이 가진 자보다 마음이 넓은 자가 진짜 부자이고 행복한 사람, 행복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흔들어 깨우라!
예수님은 피곤함에 지쳐 곤히 잠드셨지만 그래도 급할 땐, 위기 상황일 때는 예수님을 깨우셔야 합니다. 혼자서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바다라면 어부 생활로 잔뼈가 굵은 자신들이 예수님보다도 더 잘 알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막4:38)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그래서 만든 것이 협동조합이고, 사회적 기업입니다. 약자보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란봉투법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먹거리와 관련해서는 물가가 다 올라갔는데 농산물 가격, 특히 쌀값은 오히려 더 떨어져 농민생존이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양곡관리법을 국회에서 만들었는데 대통령은 이를 거부합니다. 기후위기, 농업위기, 먹거리위기, 지역위기, 인구위기 등 다중 위기의 시대를 맞아 이를 해결하고자 만든 임산부에게 친환경 농산물 꾸러미를 제공하는 것도 폐지했습니다. 초등학생에게 과일 간식을 제공하던 것도 없앴습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를 극복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잘 시행되어 오던 서울시의 도농상생 공공급식도 강제로 개편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책이 바뀐 것이, 그래서 거꾸로 가는 정책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통령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세상이 흔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맞잡은 손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집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지혜를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게 되고 무력화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바라봐야 할 시간입니다. 옆사람과 손을 잡고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민중들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나라에 정의와 사랑과 평화, 생명이 다시 살아나게 도우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언제나 환난이나 고난은 닥쳐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고난과 환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환난과 고난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과 환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고난과 환란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 이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은혜의 주님께 매달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애통해하며 슬퍼하는 이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 무력하게 주저앉은 이들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주님을 깨우셔야 합니다. 갑자기 닥쳐오는 삶의 고난 앞에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며 위로받게 하시고, 저희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돌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자매결연 30주년을 바라보며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예수가 주신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인데 바로 향린교회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쉬운 것 같은데 사실은 가장 어려운 삶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고 나 속에서 나를 비우고 산다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멋찐 분들, 성인들은 자기를 버리고 그 속에 하나님 모시고 사는 분들이지요. 성인들처럼은 못 살아도 성인 흉내라고 내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역할이라고 믿어 저도 내려가서 농사 열심히 짓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막대기와 돌팔매질밖에 가진 것이 없어도 여러분들이 이 시대의 골리앗과 대항하면서 자신의 물매만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히 나아가시기를 빕니다.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친히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도 역사도 제대로 서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증언자 여러분! 한 주간 동안도, 그리고 내년 자매결연 30주년 기념예배 때 다시 만날 그날까지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우리 공동체에, 생명평화가 임하시길 빕니다. 농업농촌에 닥쳐온 풍랑을 향해 “잠잠해라!” 하시며, 해결해 주실 줄도 믿습니다. 이런 멋지고 귀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