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는 신앙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인사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런 훌륭한 교회에서 ‘하늘 뜻 펴기’를 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2001년도 예수는 없다라고 하는 책을 펴냈는데, 그 당시 홍근수 담임 목사님께서 그 책을 좋게 보셔서 어느 잡지에 서평을 좋게 써 주실 뿐 아니라 저를 예배에서 설교까지 하도록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징 소리로 시작하고 징 소리로 끝나는 예배, 일반 성가대와 국악 성가대가 번갈아 특송을 부르고 교인들도 일반 찬송가와 국악 찬송가를 번갈아 부르는 예배 순서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후 조헌정 목사님 계실 때 제가 이끌던 영어강독을 명동 향린교회 한 방에서 한 학기 했던 것도 좋은 추억입니다. 그 후 예배에도 몇 번 참석하고 홍근수 목사님 장례식 때도 참석했는데, 오늘 오랜만에 다시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캐나다에 살고 있어서 서울 향린교회에 올 기회는 적었지만 서울 향린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미국으로 가셔서 LA 향린교회를 이끌고 계신 곽건용 목사님 교회에는 제가 캐나다에서 LA 내려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교하라고 해서 여러 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탈종교화 현상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신앙이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최근 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괄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탈종교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럽, 특히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3국은 ‘신 없는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고 알려진 미국에서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어느 보수 교회 목사가 쓴 저서의 제목이 The Last Christian Generation이라고 하고 고등학교 졸업생의 절대다수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교회도 졸업한다고 합니다. 미국 성공회 주고 존 쉘비 스퐁 신부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Church Alumni Association)이라고 까지합니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갤럽 조사에 의하면 2021년 한국 인구 60%가 무종교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후 계속 증가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탈종교화 현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종교를 떠나는 비율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젊은이들 중 78%가 종교를 떠났다고 합니다. 특히 몇 종교 단체에서는 성직자 지망자가 급감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는 더이상 설득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종류의 종교는 이제 그 효용가치가 다했다고 할까 혹은 유효기간이 지나가고 있다고 할까 할 정도입니다. 이런 종류의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힘들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우 불화와 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습적 종교와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
그러면 이제 종교는 아주 없어지는 것일까 물어보게 됩니다. 저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종교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사랑받는 신학자 마커스 보그 교수는 기독교의 경우 사라져 가는 기독교는 옛 패러다임에 입각한 ‘conventional Christianity(인습적 재래 기독교)’라고 하고 이를 대체할 기독교를 그는 ‘newly emerging Christianity(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라고 합니다. 인습적 기독교는 천당/지옥을 핵심으로 하기에 ‘Heaven/Hell Christianity’라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에서는 변혁 혹은 개벽을 강조하기에 Transformation Christianity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제 나름대로 기독교 뿐 아니라 세계 주요 종교들을 두루 살펴보게 되는데, 각 종교에는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입니다. 불교에도 표층 불교와 심층 불교가 있고, 기독교에도 표층 기독교와 심층 기독교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표층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종교 자체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표층 종교가 사라지더라도 지금까지 표층 종교의 기세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던 심층 종교가 전면에 나타나 제 기능을 다 하면 이런 종교에 의해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고 우리의 삶과 사회와 세계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면 표층 종교란 무엇이고 심층 종교란 무엇입니까? 그 중요한 차이 몇 가지를 제 나름대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표층 종교는 지금의 내가 잘되기 위한 나 중심의 종교라 할 수 있고, 심층 종교는 참 나, 큰 나를 찾으려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표층은 ‘제나’를 위한 종교, 심층은 ‘얼나’로 솟남을 위해 노력하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하셨을 때 우리를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참 나, 참 생명을 찾는 심층 신앙으로 초청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표층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심증 종교는 깨달음과 이해를 중요시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했을 때 ‘회개’는 ‘메타노이아(metanoia)’로 ‘의식의 변화’, ‘깨달음’, ‘정신 차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불교에서의 ‘불(佛)’이 깨달음이라는 말이므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깨달음의 가르침,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교도 성학(聖學)이라 하여 성(聖) 자에 귀 이(耳)가 들어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의 소리를 ‘들을 귀’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격물궁리(格物窮理), 활연대오(豁然大悟), 활연관통(豁然貫通) 등은 모두 깨달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셋째, 표층은 경전의 문자에 집착하고, 심층은 경전의 깊은 속내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3:6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을 사람을 살립니다”고 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해서 문자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 표층은 절대자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심층은 절대자와 나, 그리고 우주가 모두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에 의하면 예수님도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8)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 등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존 쉘비 스퐁 주교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하나 됨을 강조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것이지요.
참고로 정주학의 정호(程顥, 1032~1085)도 만유일체(萬有一體)를 강조하고, “사람이 만물과 혼연동체(渾然同體)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Einstein, 1869~1955)도 우리가 우주라고 하는 하나의 일부인데 이 전체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각적 망상’으로서 이런 망상에서 벗어나도록 애쓰는 것이 참된 종교에서 다루어야 할 화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동학에서도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하여 사람과 하늘이 하나라고 가르칩니다.
다섯째, 표층은 이웃 종교에 대해 독선적,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 심층은 수용주의적, 다원주의적 입장을 견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섯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입니다. 코끼리 코를 만진 사람이 코끼리는 구렁이처럼 생겼다고 확신하고, 코끼리의 다른 면을 만진 사람들이 코끼리가 기둥처럼, 혹은 바람벽처럼 생겼다고 하는 말을 모두 부인한다면 코를 만진 사람은 평생 코끼리는 구렁이처럼 생겼다는 생각으로 살면서 다른 말 하는 사람을 거부 내지 정죄합니다. 그러나 심층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여러 사람들이 다 함께 앉아 각자 자기들의 코끼리 경험을 토대로 대화를 하여 모두가 코끼리의 실상에 가까운 코끼리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여섯째, 표층은 내세 중심주의라면 심층은 ‘지금 여기(here and now, hic et nunc)’를 강조합니다. 표층은 이 세상의 종말을 강조하기 때문에 환경문제, 인권문제, 소수자 권리문제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율법을 잘 지키고 그 보상으로 천국이나 극락에 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믿기에 매사에 우리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느냐 저촉되지 않느냐를 따지며 전전긍긍, 노심초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른바 율법주의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심층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의 변화(transformation), 풍성한 삶(abundant life)을 위해 현실에 참여합니다. 한국에 가톨릭이 처음 들어와서 천국과 지옥을 말할 때 유학자들은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위협하는 것을 가장 큰 혐오대상으로 보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주장했습니다. 유교에서는 옳은 일이면 보상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행하는 의(義)의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고, 자기의 이해득실을 따져서 행하는 이(利)의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제가 몇 달 전 창비의 창설자 백낙청 교수와 tv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백 교수님은 우리나라 종교인 동학과 원불교에서 말하는 ‘개벽(開闢)’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개벽이라고 하면 천지개벽 같이 세상의 종말 같은 우주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두 종교에서 말하는 개벽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의 정치제도를 비롯하여 세상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개벽 사상가, 개벽 운동가’가 아니셨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면서 하신 최초의 선언이며 동시에 일관되게 강조하신 중심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이른바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하는 복음. 그런데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로서 ‘의식을 바꾸어라’, ‘정신 차리라’는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근본 가르침은 지금 유대민족이 Pax Romana라는 로마의 잔인한 식민지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이 식민지 통치를 끝내고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사랑과 공의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정신 차리고 이 나라가 이르도록 힘쓰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내 피를 믿고 그 덕택으로 천국 가라는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주 관심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 사실 향린교회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개벽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데 앞장 서 온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잘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욕심을 낸다면 천도교나 원불교에서 강조하는 개벽 운동과 힘을 합해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한국 사회와 세계에 빨리 오도록 협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입니다.
더욱 깊어지는 신앙
지금까지 표층 신앙과 심층 신앙의 대략을 말씀드렸는데, 저는 여기에 더해서 우리의 일상에서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체험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간단히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은 질서 정연한 천체의 운행에서부터 봄에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작은 새 싻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연어의 모천회귀(母川回歸)나 철새의 귀환 같은 현상,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이하의 세계 등등 우주에 편만한 신비에 대해 놀라워하고 고마워하고 경외하는 마음, 그래서 거기서 환희와 자유는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에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이런 신묘막측(神妙莫測)한 신비의 세계에 ‘아하!’ 하고 놀란다는 뜻에서 저는 이런 태도를 ‘Ahaism’이라고 불러 봅니다.
도덕경제1장에도 “도는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우주에 충만한 신비의 일부분이라도 보고 놀라워할 줄 아는 감수성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종교”라고 하며 자기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종교적(profoundly religious) 인간’이라 고백했습니다. 미국의 작가 헨리 밀러(Henry Miller)라는 분은 “아무것이나, 심지어 풀잎 하나라도, 가까이서 주목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고, 엄청나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세계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21세기 새로운 종교는 어쩌면 재래 종교, 표층적인 종교에서 벗어나 심층의 종교로 심화 됨과 동시에 이런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배양하는 ‘종교 넘어의 종교’, 혹은 ‘종교 아닌 종교’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가면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 중 한 분인 Karl Rhaner는 21세기는 심층이 아니면 기독교는 의미 없다고 했습니다.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독일 신학자 Dorthee Sölle는 신비와 저항 (Silent Cry)이라는 책에서 ‘신비주의의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신비주의적 체험은 특수한 몇몇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지금 서양에서는 젊은이들이 “나는 종교적이 아니라라 영성적이다”(I'm not religious, but spiritual,)” 혹은 짧게 줄여서 “No Religion, But Spirituality,”(NRBS)라는 말을 합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도 환골탈태하는 경험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향린교회가 이런 일에 계속 선도적 역할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여러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오 선생님 글중에서 .. "종교는 아주 없어지는 것일까 물어보게 됩니다. 저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종교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시카고 대학교의 종교학자였던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 가 처음 사용한
호모렐리기오수스'..
▪︎신앙과 사상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호모-사피엔스 .. 라는 논리보다는,
▪︎"인간자체가 미신(superstition)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다" 라는 사실때문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