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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진리에 잇닿아 있는 사람들 ㅣ 김기석 ㅣ 2024-08-04

by 김지목 posted Aug 06, 2024 Views 16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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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8-04

진리에 잇닿아 있는 사람들

삼하 11:26-12:13a, 엡 4:1-16, 요 6:24-35

김기석 목사

 

∎ 부드러운 듯 그러나 날카롭게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은퇴자가 된 기쁨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좋은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새로운 이들과 만날 기회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정과에 따라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성도들이 통과해온 성서의 금맥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나쁜 점은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한계를 품고 오늘 메시지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다윗은 충직한 장군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시름을 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밧세바의 남편이 사라졌으니 자기에게 다가올 사람들의 도덕적 비난을 권력을 통해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서의 이야기꾼은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을 보시는 분이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피의 외침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 곁에 머물면서 늘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나단을 보내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다윗 가문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중개하는 역할을 감당하던 선지자로서 다윗이 가장 크게 의지하였던 사람입니다.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왕의 호감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사명을 저버릴 만큼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환관적 신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제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언젠가 만난 문장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현실과 불화하고 현실에 대항한다. 진리에 잇닿아 있는 자는 어찌할 수 없는 저항자로 산다"(바츨라프 하벨, <불가능의 예술>, 이택광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6년 6월 1일, p.296; 박영신 교수의 '해제' 중에서). 

 

나단은 다윗에게 가서 마치 한담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아주 많은 거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겨우 암양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에 불과했기에 그는 양을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아이들에게 그 양은 식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오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인색했던 부자는 자기 짐승을 잡아 대접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강탈해다가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12:5-6)

 

'마땅히'라는 말이 거듭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 당연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배하는 땅에서 그런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을 살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눈은 바깥은 잘 살피지만 자기 속은 잘 살피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들추어내면서도 자기의 허물은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겠다고 덤비는 것이지요.

 

나단은 다윗을 향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엄하게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12:7). 나단은 좋은 말을 고르기 위해 우물쭈물 하지 않습니다. 비수처럼 예리하게 다윗의 허위의식을 찌릅니다. 부드럽게 번역되긴 했지만 실은 더 직정적이었을 겁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섰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정말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4:12).

 

하나님이 예언자를 왕에게 보내신 것은 왕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회개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사색이 된 왕을 보며 나단은 폭포처럼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죄',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한 죄', '하나님을 무시한 죄'. 죄에는 벌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의 집안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이런 것입니다. 감싸 안을 땐 감싸 안아야 하지만 꾸짖을 땐 매섭게 꾸짖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꾸짖지 못하는 종교, 짖지 못하는 개처럼 변한 종교, 권력자의 눈치나 살피는 종교는 하나님께 역겨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이런 데 있습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자각하는 순간 돌이킬 용기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 공동체의 도움 없이는

세상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결국 사람입니다. 우리의 못된 버릇 가운데 하나는 늘 자기를 모든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도덕적 존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편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판단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당시의 감정에 따라, 사람들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자기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격의 성숙함이란 자기 한계를 돌아볼 줄 아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고, 함부로 말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확신은 소중하지만 성찰 없는 확신은 독단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이들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 권합니다. 겸손함, 온유함으로 서로를 깍듯이 대하고,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덕목입니다. 온유함이란 호메로스 이후의 헬라어에서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 반대는 제어되지 않는 격분, 까칠한 태도, 잔혹함, 자만에 찬 말과 행동입니다. 고전 헬라어에서 ‘온유함’은 길들여진 말을 가리킬 때도 사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온유함이란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당장 떠오르는 대로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지연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조급증에 빠지는 까닭은 자기 뜻을 속히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설 자리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평화의 밑절미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를 갈라놓고 있던 차별의 담, 증오의 담, 혐오의 담이 무너지고 서로를 귀한 존재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일어나는 일은 조각난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계신 곳마다 식탁 공동체가 열렸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려는 섬세한 마음이 탄생했습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조각난 마음을 이어주는 강력한 끈이고, 사람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세상을 이길 힘입니다. 유대교 랍비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써, 남들을 보살핌으로써, 성숙한다. 그는 ‘이웃 사람의 짐을 함께 짐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전개시켜 나간다”(<누가 사람이냐>(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p.47)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입니다. 각자에게 품부된 일들을 아름답게 수행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동참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숙을 향해 나아갑니다. 

 

∎ 존재의 핵심 붙들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의 말씀을 잠시 숙고해보겠습니다. 바다 건너편에 있던 무리는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신 것을 보지 못했던 그들은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부질없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핵심으로 뛰어드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지, 뭔가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 이르십니다. 노동을 폄훼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을 무시하는 말도 아닙니다. 말(末)에 집착하느라 본(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비주의의 환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들이 욕망의 안개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시급한 일에 몰두하느라 사람다운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들은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리송하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런 저런 봉사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존재의 핵심을 붙드는 것이 근본입니다. 논어에 ‘本立而道生’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본이 바로 서야 도가 생성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은 많은데 예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 6:39)라고 말씀하십니다.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말 속에 내포된 뜻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아픔, 설움, 번민, 절망감, 죄책까지도 당신의 것인 양 떠안으셨다는 말이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온 몸으로 앓으셨기에 우리를 깊이 아시는 분입니다. 앓음이 없다면 앎도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세상에서 등 돌림을 당하는 것은 예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뻔뻔하고, 무례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지도자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깊이 절망합니다.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삶의 더 깊은 층위를 바라보지 못하기에 점점 피상적으로 변해갑니다.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삶의 더 깊은 층위를 가리키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나는 의롭다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혐오와 차별의 생산 공장이라는 비아냥이 들려옵니다. 말(末)을 붙드느라 본(本)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 셈입니다. 세상이 나단이 되어 우리를 꾸짖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이 인간이 인간다움입니다. 향린교회도 이 멋진 신앙적 도약에 동참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파송사)

그리스도의 빛을 품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십시오. 냉랭한 세상을 사랑으로 녹이고, 불의한 이들에게 하늘의 심판을 일깨우십시오. 땅 끝에 선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의 설 땅이 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조각난 세상을 치유하는 화해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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