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이 없는 경건 (아 2:8-13, 야 1:17-27, 막 7;1-8, 14-15, 21-23)
[창조절의 신앙]
창조절 첫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이 오기 전까지 석 달 동안의 창조절을 보낼 것입니다. 창조절의 시기에 생각해 볼 신앙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우선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에서 잘못 알려진 불행한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창조과학이라고 불리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실상은 과학과의 대화에서 실패한 보수 신앙이 자신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이비 과학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 불필요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성서의 본래 의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절 첫째 주일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창조절의 영성은 어떤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먼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질문이 너무 거창해서, 핵심을 뚫어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지어가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제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내린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창조절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그 사랑/은총이 세계를 지어간다는 것이 성서의 믿음입니다.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동력을 두려움에서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분노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타인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분노는 존재를 구성하기보다는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새로 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세상/존재를 짓는 것은 무엇인가, 아가 2장 8-13절]
아가서는 사랑에 대한 노래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랑의 노래가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 논란을 더 세분화해 보면, 아가서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또 이 사랑의 노래가 신앙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임’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노래합니다. 8절부터 11절까지 매 절마다 ‘나의 사랑하는 임’(dowdi, my beloved)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시인은 언덕을 넘어 달려오는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은 신을 향한 것일 수도, 연인을 향한 것일 수도, 동지를 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설렘을 안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합니다. 설렘이나 그리움은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 무언가를 동경하는 마음입니다. 현재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니까, 현재에는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향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도록 우리를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규칙에 묶인 세계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아가서를 읽으면, 그 해답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도록 이끄는 것은 사랑이요, 믿음이란 것도 바로 존재를 변화시킨 그 사랑에 대한 경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10차 총회의 주제를 우리 교회의 표어로 삼고 강단 앞에 붙여놓았습니다. 9차 총회의 주제는 “하나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였습니다.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하나님의 은총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기독교인으로서 가진 신앙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향린교회의 교우들은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다른 대답을 할 것입니다. 여의도를 오가는 많은 종교인들은 ‘삼박자로 구원을 받는 삶’을 자기 믿음이라 하고, 천호동을 오가는 장로교인들은 ‘교회가 세습을 하든 말든 축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계를 변혁한다.’는 말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적 세계관이요, 창조절에 분명히 해야 할 우리 믿음의 좌표라 하겠습니다.
아가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본문 10-13절은 우리를 사랑의 세계, 은총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그대 어서 나오오.”
[창조세계를 살아갈 참된 종교, 야고보서 1장 17-27절]
‘사랑하는 임’을 향한 마음이 야고보서 본문에 이어집니다. 야고보는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는 아가서가 부르는 ‘나의 사랑’과 같은 의미를 가진 헬라어(mou agapētoi, my beloved)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자기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입니다. 세파의 무게를 함께 느끼고, 믿음의 전통을 함께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 가운데, 오늘 본문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세계를 헤쳐 갈 참된 종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본문 17절은 당시 그리스 철학의 창조론으로 시작합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리스 철학의 창조론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어떤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근원은 여러 이름을 가졌습니다. 빛(light), 생명(life), 선(good), 진리(truth), 이데아(idea)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서 각자의 모습과 위치와 지위를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야고보서의 기자는 당시의 세계관을 인용하여 출발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세계관을 펼쳐갑니다. 그리스 세계관은 각각의 사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위계질서(hierarchy)를 이루고, 그 질서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언뜻 보면 모든 뜻을 신에서 찾는 경건한 정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차별적인 세계를 용인하는 지배철학이었습니다. 명철한 논리 사이에 불결한 사유가 끼어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various) 존재가 있다. 어떤 존재는 빛나는 지위를 누리지만, 어떤 존재는 그늘진 곳에서 살아간다. 어떤 존재는 자유인으로, 어떤 존재는 노예로 살아간다. 이런 계층적 질서를 이룬 세계가 창조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신의 뜻이다.’
주인과 노예의 차별을 신이 만들어놓았다는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그런 신은 없느니만 못하고, 그런 세계는 안 만들어진 것 만 못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그런 주장이 기만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 16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차별적인 세계관과는 달리,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이 번역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사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곳에는 변용(variation)이나 변화로 인한 그늘(shadow)이 없습니다.’
이 말을 기독교 신학이 자주 오해했는데, 야고보서 기자가 하고자 한 말은 ‘신이란 변화가 없는 불변의 존재’라는 신학적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야고보서 기자의 생각이 아니라, 신을 불변의 존재로 이해했던 신학자들의 가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칼빈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오늘 본문에 의거해서 신은 ‘변화가 없는 불변(immutable)의 존재’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기자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이 당시의 세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의 뿌리를 신에게서 찾음으로써, 지배체제를 다지려고 했던 그 사상적 악덕에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위계질서로 인해 뒤틀리고 변형된 인간관계와 그런 변화로 인해 생겨난 삶의 그늘진 어둠의 이유를 신에게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은 이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차별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귀족으로 어떤 이는 노예로 태어나서 각자의 신분을 따라 살아가는 그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까? 18절은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진리의 말씀을 따라 태어난 존재요, 하나님께서는 서열을 따라 살아가도록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어 살아가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는 말도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의 으뜸이 되어 온 세상을 지배하도록 했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오던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그렇게 개발독재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제2성서에는 ‘첫 열매’(aparché)라는 표현이 여덟 곳에 나오는데, 그 말은 어떤 특권을 부여하는 말이 아니라 분투를 촉구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23절을 보면, ‘첫 열매’는 ‘피조물과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새로 태어난’ 존재(롬 8:23)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런 분투의 좌표로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가리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라고 고백했고 (고전 15:20), 요한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가리켜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계 14:4)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첫 열매’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 기자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는 온유한 마음으로 자신 안에 심겨진(inborn, implanted) 말씀을 받아들여서, 먼저 참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더러움과 악을 따르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존재 자체가 설득력을 가진 진실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19-21절)
둘째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주는 율법’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22-25절)
셋째는 종교(threskeia, religion)의 길을 분별하여, 헛된 종교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헛된 종교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을 속이는 말을 함부로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종교’는 무엇인가? 본문은 말하길, 흠이 없는 종교란 “고난을 겪는 약자들을 돌보아주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변해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적으로 변화해가며 자기 몸으로 신을 증거합니다.
신의 창조를 신뢰하는 종교는 믿기지도 않는 사이비 교리를 숭배하도록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흠결이 있다 할지라도 이 역사를 끝없이 긍정하면서, 그 역사의 표층을 뚫고 새롭게 태어나는 ‘첫 열매’를 만들어내기 위해 힘쓰는 종교입니다.
창조적인 종교는 완벽한 종교가 아니라, 흠을 씻어가며 새롭게 지어져가는 종교입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고, 역사의 ‘첫 열매’를 길러내어 하늘에 바치는 종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첫 열매’를 태동시키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이런 첫 열매가 탄생함으로써 역사의 고난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단지 영원으로 되돌아갈 뿐이라고 주장하는 환원주의적인 철학이나, 우리가 사는 세계를 천국 가는 대합실 정도로 폄하하는 관념 신학과는 다릅니다.
야고보서는 역사의 열매로 맺혀서 영글고 익어가는 존재를 그리워하고 긍정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는 바로 그 열매를 맺는 것에 뜻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절의 영성, 마가복음 7장 1-7, 14-15, 21-23절]
마가복음 본문은 무엇이 진실한 경건이며, 참된 종교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으로 비화된 이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위생에 관한 여러 사항들을 종교적인 규례로 만들어서 오랫동안 지켜왔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5절)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 질문은 무엇이 진정으로 더러운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 어두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생에 필요한 ‘규칙’과 진리를 수호할 ‘율법’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어두운 분별심을 갖고서 경건을 논하는 그들의 모습이 위선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8절)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해서 더러워지지 않는다.’이 생각은 위생이나 율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직관적인 파악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안고 세상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규칙이나 율법에 의해서 그 존재 의미가 규정될 만큼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첫 열매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이 세계 속에서 새롭게 열매를 맺어 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에서 찾습니다.
본문 21-22절은 인간을 더럽히는 목록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단지 회피해야 할 12가지 조항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은 그 조항들의 공통점입니다. 그걸 살펴보면, 음행이든, 도둑질이든, 살인이든, 간음이든, 혼자서 벌이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전제된’ 악행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더럽히거나, 사람을 살리는 것에 관한 종교적 감각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부른다면, 진정한 영성이란 혼자만을 들여다보는 거룩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활동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영성은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무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창조절의 영성 : ‘사회적’ 영성에서 ‘사회의’ 영성으로 확장]
그런 점에서 한 세대 전 한국교회를 달궜던 신학논쟁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논쟁의 주제는 기독교의 믿음이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처럼 보였지만, 실제 쟁점은 그 둘을 별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서로 연결된 것으로 봐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둘을 별개로 보고 교회는 사회구원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구원을 위한 곳이라고 주장했고, 진보적인 교회는 서로 연결된 것이니 개인적 믿음의 진실은 사회구원을 향한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비춰본다면, 보수적인 교회의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바리새인의 주장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 그런 구분이 무색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경건에 실패한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이 사회를 구원한다면서, 수구 정치세력의 대변자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예수의 정신을 따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일을 터부시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교회에 깊은 실망을 느끼게 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교회가 보여준 무관심과 무지는 그 종교영성의 의미와 가치를 묻게 만들었습니다.
‘개인적 영성’에 치우친 기독교를 보면서, 신학자들은 ‘사회적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갖자는 취지의 그 제안은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영성’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창조절의 영성을 위해서는 ‘교회의 영성’을 넘어서 ‘사회의 영성’을 기르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영성’만이 아니라, ‘사회의 영성’이 있음을 깨닫고 체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저의 말이 기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동안 교회 밖의 사회를 세속적인 공간으로서 영성이 없는 곳이라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생각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깊은 영성전통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이니, 거기에 하나님의 흔적과 그것을 담은 영성이 깃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영성’에 대한 추구는 오래된 기독교 신학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보다도 더 오래된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은총을 머금은 성례전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창조절의 신앙은 높아진 창공만큼 푸르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출발의 자리를 야고보서의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우리를 지어가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럼 사랑하기에 힘쓰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모두 창조절의 은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