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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배를 위한 바울의 권고 ㅣ 김기수 ㅣ 2024-08-25

by 이민하 posted Aug 25, 2024 Views 4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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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8-25

하늘뜻펴기 교회교육주일(2024. 8. 25.) 

 

예배를 위한 바울의 권고 

 

롬12:1/ 왕상8:1, 6, 10-11, 22-30, 41-43/ 시34:15-22/ 엡6:10-20/ 요6:56-69 

 

안녕하세요? 어린이 여러분, 반가워요~  청소년 여러분도 반가워요~

얼떨결에 강대상에 섰습니다. 지난 17일에 김정현 전도사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오는 교회교육주일 예배 때 청소년부를 대표해서 하늘뜻펴기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교회학교 교사를 신청할 때,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뭘 주문하면 무조건 수용해야지 하는 맘이 있었어요. 직장생활도 잘 마감했고, 나이도 철 들 만큼 먹었는데, 거절하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제게 주문할 때는 본인도 많이 생각한 다음에 했을 텐데요. 

그런데 주제로 잡아야 할 성서 본문을 전달받고는 엄청 부담이 되었습니다. 제가 성서 본문을 읽어볼게요. 교우님들도 한 번 느껴보세요. 부담이 되나 안 되나?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느낌이 오나요? 안와요? 짧게 줄여보겠습니다. “네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합당한 예배다.” 이제 부담이 느껴지시나요? 

예배를 잘 드리라는 설교는 목회자들이 해야지, 아주 평범한 집사한테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예배를 몇 번 빼먹어서 죄스런 마음도 있는데 …  고민 고민 하다가 제목을 ‘예배를 위한 바울의 권고’로 했어요. 제가 말씀드리기엔 자격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바울의 권위를 빌려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예배에 대해서는 잠시 숨 좀 돌리고 이어가겠습니다. 

 

좀 전에 영상으로 보신 것처럼, 향린교회 교회학교가 지난 7월말과 8월초에 여름들살이를 다녀왔습니다. 유아/유치부는 7월 21일 교회에서 했고요. 어린이부는 7월 26부터 28일까지였는데, 향린수양관에서 진행하다가 날씨도 안 좋고 정전이 되고 해서 교회로 돌아와서 이어갔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지요. 청소년부는 8월 2일부터 4일까지 향린수양관에서 했습니다. 습기가 너무 많아서 교회로 돌아갈까 했지만, 몇 가지 응급처치를 하고, 계획한 프로그램을 예정대로 모두 진행했습니다. 

교회학교의 여름들살이의 주제는 ‘함께 예배드려요’였습니다. 영상을 보셨지만, 여름들살이 중에 찍은 사진 몇 장을 같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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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청소년부 교사기 때문에, 청소년들과 들살이를 같이 했는데요. 지금 돌이켜보니, ‘함께 예배드려요’라는 주제에서 ‘함께’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지만, ‘예배’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졌습니다. 아마도 ‘함께’는 전태일 열사, 장애인 등에 대해 깊이 있게 다뤘고, 서로 어울리는 활동도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예배’는 시작예배와 마침예배를 같이 드렸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예배드려요’란 주제에 대한 해설과 그것을 심화시키는 활동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약간 남아있습니다. 

 

이제 다시 ‘예배’를 주제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바울이 한 권고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바울을 검색해 봤어요. 저는 디지털 시대에 사는 세대라서 글은 안 읽고, 이미지만 검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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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미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나요?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을 들으면,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연상하게 만드는데요. 바울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몸을 드리라는 말은 온 몸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마 22: 37-38)라고 가르쳤지요.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6장 13절에는 몸은 주님을 위해 있고, 주님은 몸을 위해 계신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몸은 그냥 살덩어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에는 ‘여러분은 신령한 집(성전)이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과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민족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말은 생뚱맞은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전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춘천에서 대학 1학년 때 친구의 꾐에 빠져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봄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신청한 때부터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춘천을 떠날 때까지 교회학교 교사를 했으니까 대충 20년 정도 했네요. 어린이부, 중등부, 고등부를 두루 거쳤습니다. 그후 동해에서 살던 5년 반 동안에도 교회학교 교사를 했고, 서울에 와서도 향린교회에 오기 전까지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향린에 온 지는 10년이 되었는데, 너무 오래 쉬어서 교사의 재능이 다 증발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전도사님을 따라서 율동을 해 봤는데, 어렵더라고요. 교회 율동은 아주 단순하지요. K-pop 스타들의 현란한 춤과 달라서 따라 하기가 쉬운데, 막상 해 보니 몸이 고장난 로봇 같았어요.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기도 어렵고요. 이젠 노인대학에나 가야 할까 봅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실로암’이란 이름의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맹학교를 정기적으로 방문했습니다. 매우 월요일마다 맹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어울려 놀고 게임도 하고 예배도 드렸어요. 주말에는 맹학생들과 소양강변과 들판을 산책하고, 시내에 쇼핑도 가고, 어떤 때는 저랑 나이가 비슷한 애들이랑 소양강 다리 건너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조금씩 마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저랑 동갑이었는데, 그런 걸 다 눈감아주셨어요. 맹학교에는 제 고향 삼척에서 온 친구들이 세 명이 있었는데, 방학 때 세 명의 집에 다 가봤지요. 모두 가난했는데, 두 명은 평범하게 식구들과 어울려 지냈고, 한 명은 시장통에서 부모님은 장사를 하고, 그 친구는 골방에 방치되어 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마 후에 제 고향집 바로 옆 동네에 사는 얘가 맹학교에 입학해 와서,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애 아버지는 제 아버지와 친목계를 같이 했기 때문에 자주 뵈었고, 저랑 이야기도 나누어 본 사이였습니다. 

춘천에 있을 때, 교회에서든 맹학교에서든, 저는 학생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사적인 얘기도 많이 나눴고요. 교육부를 맡은 장로님이 교사들은 언제든지 즉석에서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있으니, 설교 하나씩은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설교를 구상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맡은 교사가 예고 없이 결석을 해서, 대신 설교를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행인 건 당시 설교 본문을 제 맘대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오늘의 제 경우와는 다르지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새로 부임한 전도사님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다면서, 학교를 중퇴한 청소년들을 교회에 데리고 왔을 때였습니다. 한신대 출신답지요? 전도사님은 작은 시장 골목이나 극장 주변 같이, 얘들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몇 주를 허탕 친 후에 얘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가 보니 첫눈에 겉멋이 들고 불량기가 자르르 흐르는 애들이었습니다. 어떤 애는 염색을 하고 무스를 발라서 머리카락을 성게 같이 삐죽 세웠고, 어떤 애는 바지가 흘러내려서 바닥을 쓸고 다녔는데 뒷모습을 보면 엉덩이 골이 파진 데가 조금 보이기도 하고, 어떤 애는 계속 주변을 힐끔거렸어요. 이런 애들을 주일날 교회에 데리고 와서 중고등학생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니, 권사님들이 너무 기가 차고 놀라서 가만히 있질 못했어요. 재들 때문에 우리 애들 망친다고, 당장 재들을 내보내라 했어요. 저는 전도사님의 뜻을 존중해서 애들을 잘 지키고 보살피겠다고 권사님들께 약속을 드렸지요. 그리고 저 애들이 달라지는 걸 지켜보자고 했어요. 권사님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저보다 10배나 더 열심히 지켜보셨습니다. 

그 애들은 두어 달 정도 교회에 나왔어요. 그동안 전도사님은 애들한테 돈을 빌려주고는 떼였고, 애들 싸움판에 가서 뜯어 말렸고, 소년원 갖혀 있는 애를 만나러 저랑 같이 가기도 했어요. 한 애가 소년원에 들어간 후로는 같이 다니던 애들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전도사님은 더 이상 그 애들을 찾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은 평소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맹학교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제 신분이 교사로 바뀌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학원 공부도 할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맹학교 교감선생님과 진로상담을 했습니다. 교감선생님은 맹학교에 와서 그렇게 하라고, 대환영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맹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약 8년을 맹학교에 있었습니다. 집이 맹학교 근처에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이 자주 놀러왔습니다. 전부터 저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던 애들은, 선생님이라 못 부르고, 얼버무렸습니다. 신입생들과 아주 어린 애들만 저를 선생님이라 불렀지요. 그때 저를 형, 오빠라고 부르던 애들은 지금도 서울에서 종종 만나는데, 이젠 나이가 60세 근처입니다. 

 

열왕기상 8장을 잠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아참 솔로몬의 이미지도 잠시 보고 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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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후궁과 첩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 야훼의 언약궤를 성전에 모셔왔습니다. 솔로몬은 엄청나게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주님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종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 다윗 임금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그 약속을 저에게도 지켜주십시오. 저와 이스라엘이 이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들어주십시오. 이방인도 이곳에 와서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든 들어주십시오. 

 

안병무 선생님은 다윗 왕조가 들어서면서 신의 표상이 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찾아서 예루살렘에 안치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신전을 세우면서, 예루살렘의 성역화, 다윗왕조의 이데올리기화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민중신학이야기, 141-142쪽). 안병무 선생님에 따르면, 세계의 창조자, 역사의 주재자가 한 왕조의 수호신이 되고, 한 도시, 더 좁게는 성전에 감금된 신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신의 표상이 달라졌는데, 그 신은 성전 밖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했고, 그 때문에 순례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도 신을 배알하려면 제물을 바치는 등 사제계층에 의해 부과된 많은 제의적 의무를 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을 만나는 일이 지역적으로 제한되고, 경제적 조건이 붙고, 의식(儀式)의 대상이 됐습니다. 사제들은 권력의 시녀가 되었고, 정결법에 의해 땀으로 절은 노동자와 병자는 부정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방의 신이 구속하는 신이 되고, 세계에 편만한 신이 성전의 신이 되고, 사랑의 신이 정죄의 신이 됐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이어가겠습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행해지는 자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만 그리스도가 현존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이름도 모르고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곳이라도,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에는 그리스도가 현존한다(109쪽). 그러니까 형식적인 예배, 즉 성례전이라든지 설교라든지 하는 데서 하느님을 만난다기보다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꿈틀거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안병무 선생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설교 자체, 성례전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설교가 역사 속에서 사건을 일으킬 때, 성례전도 역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듯이 역사 안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사건으로 화할 때, 거기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기도도 마찬가지다(154쪽). 

 

요한복음 6장 56절은 이렇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은 이렇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가 서로 내재(內在)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그래서 사람이 예수 안에 머물고 예수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예배를 위해 사도 바울이 권하는 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위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은,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우리와 예수가 하나가 되어서 드리는 예배는 부담이 아니라 복입니다. 모두 예수님이 주신 큰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삶이 곧 예배가 되는 인생을 삽시다.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삽시다. 부와 지혜와 권력을 누린 솔로몬보다 참된 예배와 일치를 전해준 바울과 요한의 말을 들읍시다. 삶의 굴곡마다 보혜사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예수의 말씀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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