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40901 창조절1
“흠이 없는 경건"
아2:8-13, 시15:1-5, 약1:17-27, 막7:1-8,14-15,21-23
경건한 삶은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진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존재하심을 인정하고 지극한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장례예식의 시간에 고인 앞에, 그리고 슬픔에 잠긴 유가족 앞에 무거운 심정으로 몸가짐과 언행을 삼가는 것처럼,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 옷매무새를 단정히 예를 갖추는 경건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경건한 몸과 마음을 갖추기 위해, 그리고 경건한 삶을 결단하는 훈련을 늘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예배의 시간은 우리의 체질을 경건함으로 변화시키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경건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간은 우리가 함께 경건한 공동체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예배를 함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서로 경건한 관계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지금 이 순간의 예배를 완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배 이후의 예배, 곧 “산 제사"를 강조합니다. 주일에 정해진 예배보다 주중에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더욱 중요하다고 성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고 하나님나라의 하늘잔치를 미리 경험합니다. 이 의례를 통해 세속의 세파에 흔들렸던 신앙을 다시금 가다듬고 확신 가운데 새로운 결단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힘으로 살아갈 “산 제사"입니다.
예배와, 예배 이후의 예배인 “산 제사"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경건한 삶 또한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 됩니다. 예배를 통해 경건한 존재가 되고, 또 경건한 공동체를 형성했다면, 우리는 “산 제사" 가운데 이루어질 경건한 삶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의 시편과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본자세가 되어야 할 경건한 사람의 모습을 다시금 읽어보겠습니다.
시편에서, “주님의 장막에서, 주님의 거룩한 산에서 살 수 있는” 경건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2절에,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마음에서부터 삶의 모습까지,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불순한 마음으로 정의를 왜곡시키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 그대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 하나님을 품은 마음이 삶에 그대로 드러나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의 존재성에 대한 묘사입니다.
3절에,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의 관계성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선하게 사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은 선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타자를 환대하고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사람입니다.
4절에,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힘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질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타협하지 않고 진리에 정박해 있습니다.
5절에, 경건한 사람은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에 저항하며 자신과 세상을 지키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짧은 시편구절이지만 경건한 사람에 대한 다각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진실한 사람, 관계론적으로는 이웃과 더불어 선하게 사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살아가며 악에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난에 처한 약자 돌보기를 실천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고, 혀를 다스려서 말하기와 노하기를 더디하는 품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야고보서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실천"에 있습니다. 실천하는 자가 진정한, 흠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신 말씀을 그저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헛된 신앙이라고 단정합니다. 자신을 속이고 있으므로 혀를 바삐 놀리며 핑계대기 일쑤입니다. 이런 거짓된,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된 우리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인데,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신 분인데,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겉과 속을 다르게 왜곡시키는 것은 헛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알고 있는 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계명, 그것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자라야 흠이 없는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계절 중 창조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계절은, 크게 성부의 계절, 성자의 계절, 성령의 계절로 구분하여 신앙인의 1년살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며 살도록 구분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구분과 절기의 설정은, “산 제사" 곧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부의 계절인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깊이 묵상하는 계절이 되게 한 기획인 것입니다. 올해는 오늘부터 11월 30일까지 창조절입니다. 창조절을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할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며 경건한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파괴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먼저 이 세상을, 이 생태계 자연을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셨다는 고백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묘사된 창조설화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질서인 생명과 정의와 평화로 섭리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다른 창조신화와 다르게 피조물이 평화롭게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을 섬기듯 피조세계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명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의 창조신앙의 고백은, 이 세상이 완전하게 될 하나님나라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창조해 가신다는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창조사역에 우리가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이러한 창조신앙의 고백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돌보는 청지기 사명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창조 신앙고백에 곤고하고 무기력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당장에 올 여름도 기후재앙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이후의 화석연료로 인한 탄소배출로 지구온난화가 초래되었고,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기후 현상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으며, 지구 평균온도 1.5도 상승은 임박하여 돌이키기 어려운 실정이 눈앞에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창조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 지구적으로 닥친 기후위기 앞에,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몸으로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파국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편리와 풍요를 좇고 소비를 부추기는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경건한 신앙을 결단하는 창조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후재앙이라는 거대한 위협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심리현상 중에 “정상성 편향(normalcy bias)"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위기를 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기면서 현실을 회피하려는 심리적 패턴을 의미합니다. 진화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정상성 편향"의 심리는 인간의 뇌속에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것인데, 천적을 만났을 때 가만히 숨죽여서, 얼어붙어 있어서 생존률을 높이는 그 최후의 전략이 생존본능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이송희일, <기후위기시대에 춤을 추어라>) 실제로 이러한 심리로 인해 재난이 닥쳤을 때 유순하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은 결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진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마음에 “정상성 편향" 같은 심리가 작용하여 무기력하게 파멸의 순간을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회개는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발걸음을 천도하는 것입니다. 이 창조절에 경건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구 생태계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불어 공존하는 선한 일들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선한 일들이 쌓여서 희망이 솟아남을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활하셨고 또 다시오심을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우리의 희망을 더욱 힘차게 만들어 갈 믿음이 있습니다. 신비 속에 있는 신앙의 진리를 품으며 우리는 이 창조절에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창조절에 악에 저항하는 경건한 삶을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돈과 권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순수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편리에 안주하려는 이기적인 마음과, 더 많은 소비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저항해야 합니다. 자본을 독식하는 대기업들이 탄소배출에 지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세계 10%의 부자가 배출하는 탄소량은 전체 50% 차지하는 반면, 지구촌의 가난한 사람 35억명이 배출하는 탄소량은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후재앙의 피해는 온전히 저개발 빈국민이 감당해야 합니다.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세계 100대 기업이 배출하는 탄소량은 전체 71%에 달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히려 “탄소발자국"을 홍보 운운하면서 탄소소비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송희일, <기후위기시대에 춤을 추어라>) 환경비용을 소비자에게 청구함으로써 그 절대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본의 파렴치한과 이를 용납하는 체제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른바 기후정의의 실천이 우리의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18절에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첫 열매로서 우리에게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윤리가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가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지위입니다. 창조절에 우리는 녹색교회들과 함께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비로 발생하는 탄소는 나무와 습지 등으로 포집됩니다. 탄소중립은 나무를 심어서 발생되는 탄소를 포집하여 탄소발생량을 0으로 맞추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발생되는 탄소량과, 각자 집에서 개인적으로 발생하는 탄소량을 조사해보고 탄소량을 줄이는 노력, 그리고 탄소를 포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실천함으로써 탄소중립을 실천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기후정의 실현의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은 우리 서로에게 희망이 되기에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올해 창조절을 맞이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발행한 <기후정의주일 예배자료집> 주제는 “함께 희망, 함께 행동"입니다. 녹색교회들의 작은 실천들을 확인하고 격려하면서 희망의 힘을 나누고, 탄소중립을 위해 함께 행동하자는 구호입니다. “함께 희망, 함께 행동"함으로써 경건한 창조의 계절을 만들어가는 우리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봉독한 제1성서의 아가는 “솔로몬의 노래”라는 제목을 두고 있지만, 수세기동안 이스라엘 근동에서 읊어진 노래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노래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지에 많았는데, 신화적인 것으로 신들의 결혼을 노래하면서 제의적 노래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라비아 반도 농부들의 혼인식 때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 노래가 가나안 팔레스타인에 들어와서는 바알 풍요제 때 제의적으로 특히 봄축제 노래가 되었습니다. 춤을 추며 풍요를 기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래를 제1성서로 편집해서 들여오면서 “솔로몬의 노래”라고 제목이 붙여진 것입니다.
제1성서의 많은 부분은 당대 유행하던 설화나 신화 등을 야훼 관점으로 각색해서 경전화 된 것이 많습니다. 아가 역시 그중에 하나로 이해됩니다. 오늘 본문은 주인공인 신부가 신랑이 오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신랑이 신부를 부르며 함께 즐거움을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꽃이 피는 봄이 왔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열매와 향기가 가득한 행복한 상황에서 신부를 부르고 맞이하려 합니다. 봄의 경치를 함께 만끽하고자 신랑은 신부를 재촉하며 부릅니다. 광야에 핀 꽃은 생명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봄기운으로 생명이 승리하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소생시켰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각색하여 편집한 아가는 신들의 결혼을 줄거리로 하면서, 신랑은 야훼 하나님으로, 신부는 이스라엘로 묘사했습니다. 신부를 부르는 신랑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선택하신 야훼 하나님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 때 이 노래가 집단적으로 불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나무가 열매맺는 모티브는 풍요에 관한 것인데, 가나안 땅에서 벌어진 바알의 풍요제와는 다르게 이스라엘에 내린 풍요는 야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소비에 소비를 촉구하는 자본주의 풍요는 하나님의 선물일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소비의 구조 속에서 이윤과 편리를 추구는 욕망입니다. 이같은 욕망과 자본주의적 풍요가 기후재앙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삶과 소비의 사고방식이 바알과 자본주의의 풍요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선물로서 풍요는, 그것이 선물이기에 감사로 이어집니다. 감사의 고백에는 또한 나눔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풍요로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고백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받은 하나님의 선물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예배 때마다 꼽아서 세어봅니다. 우리 공동체가 누리는 풍요로움을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풍요는 나눔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창조의 계절,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선물에 감사와 나눔으로 응답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우리 향린 공동체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신 여러분,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경건한 삶으로 기후위기 시대 “함께 희망, 함께 행동"하는 창조절기를 지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