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회 주일
“희망으로 부르는 생명과 평화의 새노래”
(겔 47:1-9, 롬 8:18-25, 요 4:39-42)
황현주 목사
(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총무)
1월 세 번째 주인 오늘은 예배력에 따라 주현절 둘째 주일이면서, 우리 교단이 약 90년 전 1937년 총회에서 지정한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올해 여신도회의 주제는 교단과 동일하게 “교회여, 다시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자”입니다. 기장 여신도회는 생명과 평화의 선교를 위해 특별히 1979년도부터 시작된 ‘생명 문화 창조 운동’을 시작으로 생명 운동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와 교육을 통한 저변화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후 위기 속 우리의 현실을 보며 기도와 헌신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제에서는 “다시”에 방점을 찍어, 다시 한번 더 생명과 평화를 위한 우리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는 에스겔, 로마서, 요한복음 3개의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성서와 함께 여신도회주일을 맞아 제가 경험한 여신도회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비상 시국, 탄핵 시국으로 어제도 현장에 나가시거나 혹은 뉴스 보시느라 잠을 제대로 못 이루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새벽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이후 서부지법에서 판사 집무실 출입문을 부수고 침입하여 난동을 벌이는 일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침이면 매일매일의 뉴스를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그것도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을 나열하지 않아도 요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평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오히려 절망적이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생명을 말하고 평화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보면, 평화가 위협당하고 생명이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지금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믿음이 빛나는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절박한 순간마다, 오히려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구원의 희망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질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비를 빌며 ‘만약 의인 50명이 있으면’, ‘혹 의인 40명이 있으면….’하며 하나님께 희망을 걸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도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아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의인 10명은 찾지 못했고, 한 명의 의인이 없어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알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성서 속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비록 10명, 1명이라도….’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얼마 전 창세기를 읽으면서 새롭게 보인 구절이 있습니다. 노아가 40일간 비의 심판이 지난 후 언제 땅에 내려갈 것인가 고민하며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하루 앞이 안 보이는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노아 속 방주 속 세 번째 날아가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처럼,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며 저녁이 되도록 노력한 수고 끝에 비로소 올리브 잎사귀를 찾아 물고 온 그 비둘기처럼 결국은 희망을 찾아내는 것, 어떻게든 이 땅에서 생명과 평화의 새 노래를 불러서 기어이 희망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역할이자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 중 로마서 8장에서는 ‘피조물까지 신음하는 고통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온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다는 로마서의 고백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 생태 위기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고통 속에 있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간절히 “기다린다”라고 합니다. 이번 여신도회 주일 설교문을 작성한 이영미 교수는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동안 성장과 발전을 최우선의 가치이자 핑계로 삼아 낭떠러지 끝에는 결국 떠밀려 다 함께 죽는 줄도 모르고 앞으로만 달려 나갔던 죽음과 죽임의 문화,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자연을 대상화하고,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동물을 학대하며 참혹한 환경 속에서 대량 축산을 서슴지 않고 있는, 인간의 욕망으로 야기된 이런 절체절명 피조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따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상 우리가 사용하는 ‘기후 위기’라는 표현은 가만히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 땅 창조 세계가 아니라 기독교인인 우리가 신앙대로 살지 못해 자초한 ‘신앙의 위기’라고 스스로 죄책 고백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신앙인’이다, ‘기독교인이다’ 말하면서, 어쩌면 세상과 같이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겨우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덜 소비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코로나의 경고 이후 우리의 생활과 예배와 모임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로마서 말씀처럼,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지 솔직히 우리의 삶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 거울을 닦는 심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중 로마서 25절에서 바울은 피조물들이 ‘바라면서 기다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가만히 서서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라고 표현될 만큼 ‘탄식’하고 ‘울부짖으면서’, 피조물들도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출산하는 여인처럼 비록 고통을 겪지만,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림”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믿음 그 자체의 행위입니다.
그 한 가지 좋은 예로 우리가 지금 여신도회 주일을 총회 제정 예배로 드리는 것도 기다림과 희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여성 장로를 선출하는 것도, 여성 안수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맛, 희망을 맛본 여성들은 희망하면서 기다리면 그 믿음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냥 단순히 숨죽이는 기다림이 아니라 깨우치고 성장하고, 다시 시작하고, 깨우치고 성장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는 능동적인 기다림을 하였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수가성의 여인이라 불리는 한 여인은 스스로를 영생의 생수라고 알려주시는 분, ‘신령’과 ‘진정’이라는 진리로 계시 된 예수를 만나면서 깨우치고 성장하며 변화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처음에는 예수를 선생으로, 그다음은 선지자로(19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메시아(30절)이심을 이해하고 고백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신앙의 안목이 성숙해지며 능동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녀처럼 성서 속 능동적인 기다림을 통해 구원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노래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되어 각자 모습으로 피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에스겔 말씀에서는 성전으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이 더러운 것을 씻기고 세상을 치유하여 회복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나무가 무성해지고, 풀이 돋아나고 열매가 맺히고 물고기들이 살아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각지 생명들이 자기 모습과 하나님 만드신 결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치유와 생명 살림의 물도 처음부터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문지방 틈으로부터 흘러 나와 발목을 채울 만큼 흐르고, 또 모여서 무릎만큼 모이고 결국에야 허리를 넘어 사람의 힘으로 헤엄치지 못할 만큼 커지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단 한 번에 쓸어 내려가고 거대한 양으로 승부를 보는 그런 방법은 성서에 없습니다. 그저 단단해 보이지만 그 경계가 되는 곳, 문지방 그 틈을 비집고 흘러나온 그 물이 시작이 됩니다. 그렇게 모이고 모여 생명의 물이 되고 결국 죽은 물을 살리고,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합니다. 이 물은 사해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하고,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함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바로 그런 문지방과 같은 곳입니다. 크고 거대한 방법이 아니라 각자 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의 작은 틈을 만들어 내는 곳, 그 귀한 고민과 노력이 모여 들녘교회와 30년을 이어가고, 화장실에 작은 손수건을 두는 되가져오는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아픔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물줄기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그 속도를 멈추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하는 인간들과 고통당하는 피조물에게 생명의 물줄기가 되어 아픈 이들을 치유하고 생물이 번성하고 결국 모든 것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신도회 주일 예배도 이런 의미와 맞닿아 있습니다. 혹독한 가부장적인 교단 정치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여성들이 1935년부터 3년간 매년 총회에 청원을 올려 만들어 낸 의미 있는 날입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축제 같은 예배였습니다. 저는 이 예배가 문지방과 같은 틈을 만들어 낸 상징 같은 예배이자 당시 여성들에게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문지방 그 틈을 벌려,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는 이 창조 세계와 어디선가 고통당하고 있는 약자들에게 생수를 다시 한번 흘려내어 주는 우리, 그래서 결국에는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희망의 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