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와 이웃(더 7:1-6, 9-10, 약 5:13-20, 막 9:38-50)
2018.09.30. 창조절 다섯째 주일
[디아스포라의 한]
오늘 제1성서인 에스더는 부림절의 유래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시절, 헬라어로는 영화 300에 등장하는 크세르 크세스 왕 시절, 그 치하에 살던 유대 디아스포라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실제로 존재했던 페르시아 왕의 이름을 빌어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그 시절 있을 법한 이야기를 창작해 만든 문학작품입니다. 강대국의 등살에 못 이겨 혹은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유민들의 이야기입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라아에게, 또 남유다가 바빌론에게 정복당한 뒤,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거나 추방당하면서 형성된 유대인 유민들을 흩어 뿌리다는 뜻이 담긴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강대국들의 정책이나 전쟁으로 인해 생존하기 위해서 고향을 등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유래는 이렇지만 이제 디아스포라는 단지 그 시절 유대인 유민들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난민’과 같은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신학, 디아스포라 선교, 심지어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열릴 만큼 보편적인 영역이 된것이죠. 지금 제주에 있는 예멘 난민들을 비롯해 전 세계로 흩어진 시리아 난민,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낮선 이국땅에서 차별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등 이 땅에는 수백, 수천만의 디아스포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난민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남은 일본으로 이북은 중국으로 떠난 수백만의 난민들이 존재했고 조선족으로 자이니치로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난민의 후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제 친가쪽이 중국 텐진에서 십 수 년간 난민의 삶을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저도 난민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해방직후 조선으로 넘어오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조선족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난민들의 삶이란 비참한 것이어서 차별과 억압은 기본이고 자칫하면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간토대지진 당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이나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에스더 본문도 그러한 학살의 위협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이겨낸 이야기 아닙니까. 학살을 당할 위기에 내몰린 유대인들을 두고 모르드개는 사촌동생인 에스더 왕후에게 막아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비록 지금까지는 내가 유대인인 사실을 숨기며 그렇게 처신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모든 사실을 왕에게 말하고 우리 동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겠다.’ 그래서 ‘죽게 되면 죽으리라’는 말을 남긴 것이죠. 결국 에스더의 목숨을 내건 간청이 통했고 유대인들은 비극을 면하게 됩니다. 외려 유대인들을 학살하려 했던 하만은 죽게 됩니다. 이방의 왕을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하는 원수를 제거한 것이죠. 이이제이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스더라는 이름이 요즘 오염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와 난민혐오를 부추기는 극우 기독교운동단체 이름으로 ‘에스더’가 쓰이고 있다니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갖 혐오로 가득 찬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는 집단이 ‘에스더 기도운동본부’라는 것 아닙니까. 에스더에 녹아 있는 떠돌이들의 한, 민중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매우 공격적인 기도자세에만 매몰된 게 문제죠. ‘안되면 되게 하라.’ 뭐 이런 기도의 자세에 천착한 결과 맹목적인 신앙이 탄생된 것이고, 결국 그들의 기도는 사람을 살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병들게 하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기도인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오늘 제2성서 본문인 야고보서는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기도가 생활화 되어 있는 분들도 계시시라 생각합니다만, 기존의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신 분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신앙과 신학을 접하게 되면 보통 기도하는 게 상대적으로 소원해 집니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외치는 기도, 생활이 기도, 호흡이 기도, 이런 말들이 있죠. 성서에서 말하는 기도라는 말속에 원하다, 바라다, 고대하다, 이런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의 확장성이라고 할까요. 예수는 매우 뚜렷한 당파성을 지닌 분이라 믿고 있기 때문에 양비, 양지론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습니다만 기도의 본질을 찾다보면 정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구호는 구호이고, 투쟁은 투쟁이고 일상은 일상이죠. 그리고 기도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모든 게 믿음이고 기도이죠. 모든 기도가 일상이고 투쟁이고 모든 게 구호이고 기도이고 모두 다 신앙이고 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본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구하고 기도하는가’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에 그 기도의 효력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인격, 기도하는 사람의 자기진실, 이런 것이 담보될 때 기도는 힘을 갖습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이 있다. 엘리야를 보라, 그는 본디 사람이나 의인 이였기에 그가 기도하면 삼년 넘게 비가 안 오다, 비를 구하니 비가 왔다.” 이 구절을 잘 살펴보면, 야고보서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기도를 하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게 먼저라는 이야기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에스더 기도운동본부’와 같이 거짓과 혐오를 일삼는 기도를 하는 이들을 보면, 기도보다는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더욱 무게가 실립니다.
알다시피 야고보서는 믿음보다는 행함에 방점을 찍은 서신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는 이렇게 행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행함과 의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의 기도, 의인의 기도만이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도울 수 있고, 죄에 빠진 이들을 그 죄에서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동지와 이웃]
그런데 그러한 행함으로 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하는 죄짓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예수는 매우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그들을 구원의 영역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목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정말 무시무시하죠.
예수는 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적과 동지를 식별하는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당시에 세례요한 같은 광야를 넘나들며 기적과 세례를 베풀거나 말씀을 전하는 방랑하는 카리스마들이 대략 3천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 운동의 처음은 유대교 소종파 운동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운동이 본격과 되면서 비로소 예수의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가 유대를 뛰어넘게 되었고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예수의 복음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운동의 초창기에 크고 작은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이들이 3천명이면 그 숫자만큼의 각자의 색깔과 노선이 분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제자였던 요한은 예수의 이름을 팔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배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지만 그는 우리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요한을 막습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나를 욕하겠느냐” 이런 말씀이죠.
학창시절 이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캠퍼스에서 활동하던, 그러나 소위 노선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어떠했습니까? 지금이라도 길거리에서 우연찮게 보게 되면 반갑기는커녕 서먹할 것 같고 오히려 과거 남았던 앙금이 스멀스멀 살아나는, 그야말로 남보다도 못한 관계들이죠.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진보정당의 이합집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정서가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동지는 누구이며, 적은 누구입니까? 차라리 이웃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백번 낫지 않은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웃은 성서에 엄연히 나오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동지는 다르죠. 한때 뜨겁게 사랑하다가도 어느새 원수가 되기도 하는 참 알다가도 모를 관계입니다.
이런 물음에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요한은 그들과 우리의 수많은 다른 점을 봤지만 예수는 그들과 우리의 단 하나의 공통점을 본 것이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같은 노정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으로도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으로 매우 역설적인 말씀을 이어갑니다. 단 하나의 오점으로 인해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오점이 무엇입니까? 죄짓게 만든 죄입니다. 죄짓게 만드는 자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는 확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죄짓게 하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실족케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괴롭히다. 함정에 빠뜨리다. 등으로 해석이 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덫, 함정, 죄의 원인, 범죄라는 뜻이 있는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이라는 명사입니다. 영어 스캔들의 어원이기도한 이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죄, 예수는 이것을 도려내는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가는 게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강조합니다.
예수가 왜 그렇게 ‘죄짓게 하는 자’를 적대시 하는지 죄와 밀접한 고난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난 혹은 고통은 단순히 자기의 실수나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사회적, 구조적 모순 속에서 잉태됩니다.
여러분,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우주가 만들어지고 난 후 부터 작은 세포하나가 지금 우리 같은 사람이 되기까지 작동했던 건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고통은 도덕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믿습니까? 둘 다 틀렸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언제나 그리고 엄연한 원인이 존재합니다. 구조악, 또는 모순이라고도 하는 그것입니다. 원인이 명확한 이상,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 하며 망연자실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합니다. 대부분 고통의 근원을 쫓다보면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백이면 백, 사람의 욕망에 맞닿아 있습니다.
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의 근원을 찾다 보면, 바로 ‘죄짓게 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때로는 사람일 수 있지만 대부분 자본이나 권력으로 대표되는 구조악과 모순으로 발현됩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죄의 근원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제거하고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와 내가 같으냐, 다르냐,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틀리냐, 동지인가 이웃인가, 적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단 하나의 동질성을 붙들고 함께 가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동지 식별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짓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죄를 생산해 내는 악의 시스템은 그 무엇이라도 단호히 배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는 첩경임을 예수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수많은 다른 점보다 단하나의 같은 점을 찾아 해방을 향한 우리의 행진의 대오를 넓히는 것이 예수운동의 핵심입니다. 또한 의를 행함으로서 넘어진 이들을 기도로 보듬는 것이 예수운동의 동지를 대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이든 단호히 끊어내는 것이 죄를 극복하고 하늘나라를 맞이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끝내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맛보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의 손가락을 보지 마십시오.
예수가 가리키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안에 존재 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씨름하십시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