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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당신은 무엇이 거슬리는가 ㅣ 한문덕 ㅣ 2025-02-23

by phobbi posted Feb 23, 2025 Views 1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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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2-23

당신은 무엇이 거슬리는가?”

(4:1-8, 6:1-5, 20:1-16)

 

한문덕 목사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다음 주 화요일이 되면 지난해 1227일부터 시작된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변론이 60일 만에 종결됩니다. 최종 변론 이후에 재판관들의 평의를 거쳐 최종 판결문 작성에 이르기까지 통상 열흘에서 2주간 정도 걸리기에 3월 둘째 주 이전에는 최종 선고가 이뤄질 것입니다. 다수의 시민이 기대하는 대로 99% 탄핵이 인용되고, 윤석열은 대통령직을 파면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란으로 심려하고 괴로웠던 국민은 다소 안정감을 회복하리라 봅니다.

   내란 사태가 진행되고, 재판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믿기지 않는 소식들과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변론들, 어거지와 폭력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극우 세력들을 보면서 불안하고 속 터지는 나날들을 보냈는데, 앞으로는 이런 모든 혼란을 넘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이끈다는 이들이 반동이 되어 역사를 후퇴시킬 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게으름입니다.

   못난 정부가 들어서면, 많은 시민은 정부 욕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성찰과 성숙을 위한 배움과 노력에 소홀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두운 세력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때는 언제나 깨어 있지 못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오늘 제1성서의 가인은 주님께서 죄가 너의 문 앞에서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리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도 돈과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반공 이념으로 빨갱이 몰이를 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극한의 혐오를 보이며,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행동에 다수의 교회가 동조하고 있고, 또 나머지는 방관하며 침묵합니다. 이에 맞서 저항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너무 미약하고 소수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힘을 기를 필요가 있는데, 그 힘은 돈과 사회적 지위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과 정의감, 생명을 살리려는 굳은 의지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늘뜻펴기는 내란을 완전히 종식하고, 새로운 사회 대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와 지향을 지녀야 하는지,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지기 쉽고, 또 잘못된 행동들을 하게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일꾼인가, 주인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2성서의 말씀은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잃은 아들을 되찾고, 큰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 비유와 더불어, 저는 마태복음서의 이 비유가 예수가 전적으로 신뢰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주인공인 포도원 주인을 주목해야 하고, 바로 이 사람이 하는 일이 하늘나라 사역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이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아주 치열한 논쟁과 갈등 유발점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하루 내내 일한 일꾼과 모두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을 준 주인 사이의 갈등입니다. 제가 우리 향린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당시 청소년들에게 이 본문을 읽히고 누구 편을 들 것인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청소년은 100% 일꾼 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제가 20232학기와 20241학기에 연세대학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교양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필수교양과목이어서 억지로 수강해야 하고, 50명에서 70명이 듣는 대형강의인 데다가, 10% 정도만이 그리스도인이기에 재미와 의미를 주지 못하면 정말 강의하기 힘든 수업입니다. 그럼에도 20세 싱그러운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참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저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수업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때 오늘 마태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과제를 내고, 조별로 토론하게 하고 발표도 시켰습니다. 과제는 이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 본문에 나오는 갈등 상황을 요약 분석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A4용지 1페이지 이상 2페이지 미만으로 쓰시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다소 집중하지 못해도, 성적은 잘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과제 제출은 아주 잘합니다. 또 제출한 과제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발제하게 하면 더 잘하고 매우 흥미로워합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의 내용들을 소개하면서 저는 오늘 하늘뜻펴기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누가 공정한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까?]

 

   오늘의 갈등 상황은 아주 분명합니다. 한 학생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같은 강도의 노동을 서로 다른 시간 동안 했는데, 받은 품삯은 동일하기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12시간 일한 사람이 있고, 1시간만 일한 사람이 있는데,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으니, 12시간 일한 사람의 입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12시간 일한 사람이 포도원 주인과 합의한 금액이 한 데나리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은 불평을 하지만,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인은 타당한 이유 두 가지를 더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주인은 분명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그 사람에게 약속대로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포도원 주인의 뜻은 이 두 사람에게 모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포도원 주인의 뜻을 누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무슨 권리로 남의 자유로운 권리행사를 침해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주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12시간 일한 사람의 불평에 대해 한마디 보탭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그렇습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12시간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다면,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는 12분의 1데나리온을 주어야 하는데, 12분의 11데나리온을 더 제공한 것이지요. 즉 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 후한 인심을 베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꼼꼼히 읽으면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해 보면 부당하다고 불평하는 일꾼과 부당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포도원 주인 사이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주인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기웁니다. 아마 우리라도 불평했을 것입니다.

   한 학생은 주인의 이런 처사를 두고 이 주인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이 포도원에는 아침 일찍부터 일하러 나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이 포도원 주인은 아침에는 일꾼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침에 온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돈을 주면, 사람들이 다 저녁에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장기적으로 주인은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여기에서 벌어진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 학생의 예측이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정말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부당하다는 일꾼과 정당하다는 주인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가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여러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상당수의 학생은 일단 두 당사자가 대화하면서 서로 타협해 보라고 조언합니다. 둘이 만나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다 보면 거기에서 뭔가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어떤 학생은 주인과 노동자가 정확한 계약서를 썼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구두 계약으로만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학생은 계약할 때 시급으로 임금을 정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학생은 일꾼들이 일하는 영역을 달리해서 일찍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을 줄 때도 모두가 보지 않는 곳에서 따로따로 하라는 제안도 하고요. 이 모두가 참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시급으로 계약서를 쓰라는 말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아마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맨 먼저 온 사람부터 일당을 주고 돌려보냈더라면, 학생의 말대로 서로서로 보지 않는 곳에서 일당을 지급했더라면 오늘의 갈등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성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일당을 주고, 그렇게 해서 일부러 맨 먼저 온 사람으로 하여금 불평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이 이야기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갈등의 원인은 마음에 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에 대해서 많은 학생이 말한 것은 남과의 비교가 갈등의 핵심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일꾼들은 일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입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일정한 기간 고용된 사람이 아닙니다. 당일 일을 얻지 못하면 근심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야 하지요.

   게다가 당시 일용직 노동자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 품목으로 간주되었기에, 역설적으로 주인은 노예를 아끼고 소중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일용직 노동자는 하루 이상 고용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로,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마치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과 같았습니다. 로마의 농장주들은 일용 노동자들의 상황을 일부러 불리하게 만들고 임금을 낮추기 위한 온갖 전략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성경은 주인이 9, 12, 3, 그리고 5시에도 일꾼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라고 묻는 포도원 주인의 질문에 뒤늦게 일자리를 얻게 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이 대화는 1세기 갈릴리가 극심한 실업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자리를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현실과 애환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상적이었다면 이른 아침에 일자리를 얻었던 사람은 자신이 선택되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일을 얻지 못해 속 태우던 시간들,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냈던 그 시간을 보낸 이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일을 얻었다는 안도감, 일하면서 누리는 보람, 가족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단 하루라도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했을 것입니다. 저도 20대 초반 군에 가기 전에, 인력 시장을 통해 막노동을 한 적이 있는데, 새벽에 일을 구하러 가면 노동 현장으로 가는 차가 오고, 선택된 사람들부터 일터로 가게 됩니다. 보통은 아침 이른 시간에 일자리 배분이 마감되고, 어떤 분은 끝내 선택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공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뽑히고, 왜소하고 늙은 분들이 뒤처집니다. 일이 많이 없는 날이면 뽑혀 가는 이들보다 남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남은 이들은 바로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가족 보기가 미안해서입니다. 그러면 공원을 어슬렁거리다가 저녁 늦게 돼서야 휑한 마음 달래려고 소주 한 병 사 들고 들어가곤 하지요. 저는 알바로 해 본 경험이지만, 그것이 삶이었던 분들의 축 늘어진 어깨를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목수 아버지 요셉을 따라다니며 날품팔이 경험을 했던 예수님도 이런 이들의 삶을 잘 압니다. 어쩌면 자기 경험이 여기에 녹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가 자란 나사렛은 세포리스라는 도시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울 때, 세포리스 도시는 한창 재건 중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로 불린 예수는 어쩌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종종 세포리스로 일하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치는 날이면 시름에 가득 차서 되돌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해는 저물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예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농민이자, 목수이고, 목동이자, 날품팔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상에서 제일 이른 아침에 먼저 일자리를 얻게 된 사람은 하루가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일자리를 얻어서 기뻤던 이 사람이, 불평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한 시간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을 보고, 자기는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였더라면, 아침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교했기 때문에 불평을 하게 되고, 주인과 다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포도원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일꾼들이 일자리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하늘나라의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논의를 확대해 보자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재산, 우리의 능력 그 모두가 사실은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주어진 많은 것들을 공짜로 이용하면서 이어져 갑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능력과 스펙을 자랑하고, 그 능력과 스펙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성공에는 자연적 운과 사회적 행운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능력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공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현대인은 주인보다는 일꾼의 편에 서기 쉽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이니, 돈으로 예를 들어보지요. 손흥민 선수는 돈을 많이 법니다. 손흥민 선수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번 것은 손흥민의 축구 능력 때문일까요? 다수는 그렇다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반만 맞습니다. 만약 전 세계 사람들이 전혀 축구에 관심이 없다면 과연 손흥민 선수가 지금 받는 연봉을 받을 수 있을까요? 손흥민 선수는 마침 전 세계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시기, 즉 사회적 운을 타고 성공을 한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사람이 바로 존 롤스입니다. 모든 성공에는 사회적 운과 자연적 운이 따릅니다. 그래서 존 롤스는 이런 행운을 받지 못한 사람 즉 최소수혜자를 생각해서 행운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돕자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능력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말하는 공정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공정이 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전부라고 믿게 되면, 12시간 일한 사람이 얻은 행운, 즉 아침부터 일할 수 있게 된 그 행운을 잊어버리고 우리 삶은 불평과 억울함으로 가득 차게 되고, 남을 탓하게 되고, 그래서 분노 조절에 실패하면 잘못된 행동, 어떨 때는 폭력까지 사용하게 되지요.

   제가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창조주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명이 그렇게 주어진 값진 선물인 줄 알고 산다면, 우리는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능력 이상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안다면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의 불만과 짜증이 대부분 자족하지 못하고 비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남는 문제: 1데나리온인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아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것이라면 통 크게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 12데나리온을 주시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이런 질문부터 풀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왜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정하는가? 그리고 그는 왜 91235시에도 계속 일꾼을 구하고 있는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거리를 계산해서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전부 고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포도원 주인이 효율성을 제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는 자본을 증식하려는 자본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포도원을 통해 이익을 얻기 보다는 일꾼들에게 일감을 주고, 그들을 먹여 살리려는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계속 일꾼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사실 포도원의 일은 오전 6시에 계약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비유의 포도원 주인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빈둥거리기 때문에 일꾼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유를 시작하면서 미리 언급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는 이익 창출을 위해 일꾼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일꾼에게 일을 주고 임금을 주려고 고용합니다. 9시에도, 12시에도, 3시에도, 그리고 5시에도 말이지요. 우리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라 당연히 이윤을 얻으려는 농장주를 떠올리지만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농장주들은 대개 삶을 터전을 도시에 둔 엘리트로서, 대리인을 통해서 농촌에 있는 농장들을 관리하곤 했습니다. 보통 그들의 관심은 농장으로부터 나오는 이익이었습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전략 중 하나입니다. 포도 농사는 다른 농사에 비해 손이 덜 가고, 수확철에만 많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싼 품삯으로 일시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작물이 포도였습니다. 그래서 땅 주인들은 포도 농장을 확대해갔습니다. 그런데 포도는 일용할 양식인 곡식은 아니기에, 갈릴리 농부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농장주는 낮은 임금으로도 또 일꾼을 고용하기 쉬워지고, 부를 늘릴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이른 아침 즉 6시에 포도원 주인과 노동계약을 한 일꾼은 처음 1데나리온에 순순히 합의합니다. 그 돈이 그의 가족들이 간신히 하루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생계비밖에 되지 않는데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것보다 못 받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슬슬 한 데나리온의 비밀이 풀립니다. 왜 한 데나리온인가? 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왜 한 데나리온만을 주는가? 1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12시간 일한 사람에게는 열두 데나리온을 주고,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1시간 일한 사람에게 12분의 1데나리온을 주지 않고, 왜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가 하는 것이지요.

   포도원 주인이 보여준 자비와 은총은 임금의 풍족함에 있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자비는 사람들을 고용한 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할 일이 많이 없는데도 일부러 일꾼을 고용하고 적당한 품삯을 지불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특히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은 주인의 자비와 은총을 한껏 입게 됩니다.

   이른 아침에 와서 일한 사람이 놓치고 있는 주인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왜 주인은 계속 인력 시장을 서성거리는 것일까요? 주인은 사람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모두의 생명을 동등하게 살리고 싶은 것입니다. 능력주의와 비교 의식에 사로잡힌 일꾼은 다른 일꾼들과 자기를 구별하면서 더 많이 일한 만큼 더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며 분열을 일으키고, 그렇기에 모두가 일자리를 얻어 함께 삶의 기쁨을 나누는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여러분!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 A라고 할 때, 만약 5시에 온 사람이 A의 아들이거나, 형제자매였다면 어땠을까요? 그때에도 계속 불평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의 말씀에서 카인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카인의 대응은 달랐을 것입니다. 자기 제물은 받지 않았지만 동생의 제물이라도 받은 것에 감사하고, 동시에 동생의 제물이 용납됨으로써 한 가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안심했을 것이며, 동생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면서, 다음에는 자신이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질투와 시기심, 비교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던 죄악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류가 겪는 상당한 고통은 이런 모양으로 일어나고 반복됩니다.

   우리 삶에는 정확한 계약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일한 만큼 결실을 얻습니다. 공정하게 대우해야 하고, 그래야 정의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네 삶에는 은총도 있습니다. 덤으로 얻는 것이 있습니다. 되로 주지만 말로 받기도 합니다. 불행은 아무런 이유 없이 불현듯 찾아오고, 행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용서하며 받아 줍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삶을 누리도록 허락합니다.

   오늘 성경에 불평하는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이보시오라고 말한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문을 보면 친구여”(Ἑταρε)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모든 일꾼을 자기 동료로 여기고, 일한 만큼 주어지는 계약 관계와 일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은총의 관계를 모두 행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 중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습니다. 맨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열두 데나리온을 주면 더 풍성한 호의를 베풀었다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포도원에서 나는 이윤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지금 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최대한 모든 사람을 살려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의 요구대로 다 주려고 했다면 포도원 전체가 망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9123시에 만난 일꾼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했는데, “적당한 품삯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도 살리고, 계약 관계에 있는 노동자도 살리고, 일자리를 얻지 못해 서성거리며 근심에 쌓인 이들도 살려내려 합니다. 바로 모두가 상생하고 공존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를 고려합니다.

   오늘 한 데나리온이라는 적당한 품삯의 비밀이 놀라운 것은 바로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의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제학은 무한자원에서 무한적 이윤이 나올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유한합니다. 유한한 지구라면 계속되는 성장이라는 신화는 거짓이고, 속임수입니다. “무한성장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어느 정도 자라면 멈추고, 그리고 늙고 죽어야 합니다. 나누고 비우지 않으면서 저만 무한대로 자라려고 하면 결국 온몸을 죽게 하는 암처럼 우리 사회를 망가트리게 될 것입니다. 한 명이 열두 데나리온을 가져간다면 열한 가족은 하루를 굶어야 하는 비참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우리 사회는 자연과 사람, 사람과 로봇, 남과 여, 아이와 어른,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가 서로 얽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저것도 모두를 품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서의 본문은 하늘나라의 경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품으려고 하십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이 파면되면 60일 이내 우리는 다시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 같은 사람, 어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그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서를 써낸 사람들은 제법 부유한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율법을 재해석해 낼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계속 관심을 잃지 않고, 주목하고 도우려는 이들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입니다. 마태에는 작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작은 자들에 대한 마태의 관심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공동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인지 우리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전국과 해외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꿈꾸셨고, 마태 공동체가 만들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 그것을 우리가 이어갑시다. 무엇보다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에 속한 그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생(寄生)도 공생(共生)입니다. 기생하는 생물을 벌레 보듯 하지 말고, 함께 품어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갑시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사용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능력으로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섭시다. 거기에 하나님의 높은 뜻이 있고, 미래가 달려 있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후하기 때문에 혹시 거슬리는 것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무엇이 거슬리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더 정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후하고 넉넉한 마음을 닮을 때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거슬리는 일이 있거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모두를 품어 안으시는 뜻을 깨달으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닮아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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