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익을 감당하는 사람(룻1:17, 롬16:1-4, 눅1:39-45)
2018.12.09(대림절 둘째 주일 / 인권주일)
제가 얼마 전에 ‘별을 따라가는 여성들’이라고 하는 대강절 묵상집에 글을 한꼭지 쓸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성들이 필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저 역시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을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데, 마리아는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고, 또 하나는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하나님께 순종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모습으로 찬양받는 인물인데, 이것이 여성들에게 과연 복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실은 오늘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씨름해 보면서, 여러분들에게 제 생각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마리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라는 주변 인물로부터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와 여성을 그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소개되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활동과 그의 활동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을 강조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만이 강조하고 있는 또 다른 면은 마리아가 또 다른 여성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려고 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수태고지의 장면이 복음서마다 다른데요.
마태복음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를 알리는 장면만 묘사하고, 따라서 마리아는 순전히 천사의 말에 순종함으로 아이 낳기를 결심하게 된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만이 유일하게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면서, 그 주변에 엘리사벳이라고 하는 동지를 소개합니다.
스가랴의 배우자 엘리사벳은 완숙한 나이가 될 때까지 아이가 없었던 여성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가복음의 저자는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지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것만으로 마리아와 같은 처지에 있게 되었고, 천사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리아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산골에 숨어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아마도 지금의 이 상황을 가장 잘 동감해 줄 사람이 엘리사벳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천사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 말을 수락했지만, 아마도 마리아는 지금 마음이 반쯤은 멍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난 후에 그 수태고지에 응했음에도, 별도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저는 짐작해 봅니다.
마리아는 또 다른 용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괜찮은 일이라고 수긍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줄 그런 사람이 필요했을 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아이가 뛰어노는 것을 느끼면서 마리아에게도 아이가 생길 것을 축복하게 됩니다. 단순히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메시야가 될 자의 어머니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축복과 기쁨이 있을 자리만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상식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기에 잉태하게 된 임산부이고, 마리아는 결혼도 하기 이전에 남편과의 상의 없이 난데없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흔히 기대되고 예상되는 그러한 모습의 임산부들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후에 마리아 찬가에서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이 일은 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사건이지만, 이 비천한 자들이 높여지는 그 일들이 평탄하고 안전하거나 무엇이 보장되어 있는 그런 길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여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지를 들으면서,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엘리사벳이 자신을 가장 복 있다 칭찬해주는 그 축복을 듣고 예수님을 낳을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저는 사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저 성서에 등장하고 있는 여성들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여성에게 부과된 성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누구의 어머니라든지, 누구 누구의 아내라든지, 딸이라든 지 늘 남성과의 관계성 속에서 표현되거나 그들이 감당하는 여성의 성역할에 따라 찬양되거나 비난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마리아를 전통적으로 해석하듯 성스러운 어머니, 혹은 순종적인 신앙인, 흠이 없는 순결의 아이콘으로 읽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이미 그렇게 표현되어 있는 여성들을 어떻게 의미있게 읽을 것인가? 라는 물음은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 질문의 끝에 발견하게 된 것이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북돋아주고 축복해주고,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주고 있는 이 장면이었습니다.
오늘 읽으신 구약말씀 룻기에도 잘 아시듯이 며느리 룻이 사실 떠나가도 그만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룻의 선택이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 기반하는 지 상상 속에 맡겨지겠지만, 후에 나오미가 룻을 결혼시키기 위해 강권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우리가 읽은 이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한 여성이 또 다른 여성과 ‘함께’하기를 선택하는 그런 이야기가 들려집니다.
로마서에서 읽은 뵈뵈라고 하는 인물도 바울이 ‘나의 보호자’가 되어 준 사람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영향력있고, 중요한 여성이었다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어쩌면 목회자에 준하는 그런 인물이었다고도 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또한 바울을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까지 바울을 지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이름과 바울의 소개만이 전해집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그 면면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부러 왜곡되어져서 부정적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 한 여성이 다른 여성과 ‘함께’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자신을 불살라 열심히 헌신했다는 그 흔적입니다.
저는 그래서, 마리아를 ‘연대’의 흔적에서 한 번 더 기억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의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여서 그 걸음을 선택하기가 그래도 조금 더 쉬웠던 것은 아닐까요?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만 그래도 자신을 축복해주는 또 다른 여성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내딛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단서는 오늘의 제목이기도 한 ‘불이익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그 당시에 그렇게 좋은 상황에서 임산부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꽤 들어 상식적으로 아이를 이제 못 낳겠거니 생각되던 엘리사벳 보다 어쩌면 마리아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이 아이를 낳고 싶다라고 하는 어떤 소원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지만, 사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1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도 하기 전에, 그리고 남편이 될 요셉에게 어떤 설명해 줄 수 있는 근거도 없이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마리아는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같은 처지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겠지만,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엘리사벳의 상황은 마리아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또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좀 민망한 것 빼고는 아이를 낳는 것은 본인이 원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감당해야 할 것들은 고스란히 불편하고 불이익만 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의 끝 구절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 마리아가 안타까웠습니다. 마리아인들 정말 마음에 어떤 의문도, 문제제기도 없었을까요.
그러면서 마리아의 이러한 모습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이 “이 잔을 옮기실 수 있다면 저에게서 옮겨 주십시오(막 14:36)”라고 기도한 그 모습이 겹쳐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길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렵게 어렵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 예수님도 마리아처럼 그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마리아는 자신이 낳게 될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정결예식의 장면에 등장하는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특별히 이런 말을 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을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34절)”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장차 사람들에게 미움과 비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요새말로 너무도 돌직구의 말입니다. 어머니한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또 어떤 사람이었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낳고 사회에서 돌아오는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그 아이를 낳았을 텐데, 그 어렵게 낳은 아이가 장차 자라서 세상의 비난을 밥 먹듯이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니 말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입니다(눅 2:35)”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줍니다.
조금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죽음이 헛되이 남게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아이의 죽음이 세상을 더 안전하게 하고, 고통 받는 사람이 더는 없게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 분들은 지금 마리아처럼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르듯 가슴이 아프실 것이라” 짐작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마리아가 더 이상 성서 속에서 정형화된 순종과 순결의 아이콘으로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당장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을지라도, 내 앞날이 보장이 안 되더라도, 나에게 불이익이 올 지라도 그래도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저는 마리아를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했던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룩하시려고 하는 것, 그것이 평등한 세상일지, 보다 더 정의로운 세상일지 저는 짐작만 해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믿고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 자신은 그 사람들과 조금 닮아있다고 느끼지만 아직은 불완전 합니다.
주변에 저 보다 훨씬 더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훨씬 더 고통스러워지겠지만 다른 여성들이 자신처럼 힘들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폭력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 있습니다. 부당한 해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400여일이 넘도록 굴뚝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마리아는 이렇듯이 제게 열악한 상황이지만 ‘연대’하면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비록 올지라도 그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젖힌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용감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